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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PE · 18장 / 전체 41장

질서가 깨어졌을 때

창조의 질서는 단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남자에게서 여자를 지으시고 그녀를 남자에게 데려오셨습니다. 둘은 한 살(바사르)이 되었고, 서로를 알았으며, 하나님의 복 아래에서 열매를 맺어 땅을 채웠습니다. 창세기 6장은 아담 이후 여러 세대를 거치며 그 질서가 어떻게 짓밟혔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는지를 들려줍니다. 이 기록은 수천 년 동안 논란이 이어져 온 한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천천히 짚어 볼 만합니다.

창세기 6:1-2 아담이 흙(아다마)의 표면에 번성하기 시작하고 그들에게 딸들이 태어났을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담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자기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입니까? 많은 독자가 여기에서 숨겨진 암호를 기대하며, 어떤 이들은 그 빈자리를 천사들이나 다른 세계에서 온 거인들로 채워 넣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자체로 더 평이한 답을 주며, 바로 앞선 장들에서 그 답을 줍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입니까?

창세기 6장을 읽기 전에, 성경의 나머지 부분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말을 어떻게 쓰는지 먼저 물어보면 도움이 됩니다. 토라에서 사도들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거듭해서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걷는 사람들에게 이 이름을 붙입니다.

누가는 예슈아의 계보를 맨 처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목록의 마지막 말은 이러합니다.

누가복음 3:38 가이난은 에노스의 아들이고, 에노스는 셋의 아들이고, 셋은 아담의 아들이고,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누가가 하나님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는 셋을 거쳐 이어집니다. 토라는 한 백성 전체에게도 같은 이름을 붙입니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맏아들이다”(출애굽기 4:22). 또 모세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다루는 장을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신명기 14: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 몸을 베지 말고 너희 두 눈 사이의 머리털을 밀지 말라.

토라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애도하는 방식에서부터 무엇을 먹느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도들도 저마다의 말로 같은 것을 전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프뉴마(영)에 의해 인도되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다”(로마서 8:14). 그리고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가 의로움을 행하느냐로 드러난다고 씁니다(요한일서 3:10).

욥기도 이 표현을 쓰는데, 여호와 앞에 나아와 서는 하늘 법정을 두고 씁니다(욥기 1:6; 38:7). 하지만 욥기는 하늘의 장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4–6장은 흙의 표면 위에 사는 사람의 가족을 말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평이한 뜻은 누가와 모세와 사도들이 붙인 뜻, 곧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까이에 있던 땅

아담은 동산에서 내보내졌지만, 하나님의 임재 밖으로 내보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에덴 밖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사람들과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아벨이 죽기 전과 후에 가인에게 말씀하셨고, 가인은 하나님께 대답했습니다(창세기 4:6-15). 사람들은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왔고, 하나님께서는 그 예물을 돌아보셨습니다(창세기 4:3-4). 그러다 가인이 판결을 받았고, 그는 자기가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말했습니다.

창세기 4:14 보십시오, 당신이 오늘 저를 이 흙(아다마)의 표면에서 쫓아내시니, 제가 당신의 얼굴을 피하여 숨을 것이며 땅에서 떠돌며 헤매는 자가 될 것입니다. 저를 만나는 모든 자가 저를 죽일 것입니다.”

창세기 4:16 가인이 여호와 앞에서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 살았다.

여호와의 임재 가까이에 있던 “흙(아다마)의 표면”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를 지으신 분과 이야기하고, 그분께 예물을 가져오며, 그분의 대답을 듣던 곳이었습니다. 이것이 이 장들의 핵심입니다. 가인은 그 자리를 잃고 놋으로 나갔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성읍을 세웠고(창세기 4:17), 거기에서 그의 후손 라멕은 자기를 상하게 한 사람을 죽였다고 노래했습니다(창세기 4:23-24). 그 세상의 기술은 빠르게 자랐습니다. 야발은 “장막에 거하며 가축을 치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다루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으며,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온갖 도구를 만드는 자”였습니다(창세기 4:20-22).

임재 가까이에 머문 이들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아벨이 죽은 뒤에 새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창세기 4:25-26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를 알았고, 그녀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불렀다. “가인이 죽인 아벨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나에게 다른 씨를 주셨다” 하였기 때문이다. 셋에게도 아들이 태어나니,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불렀다. 그때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셋은 아벨 대신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예물을 받으셨던 바로 그 아벨입니다. 셋은 하나님의 임재 가까이에서,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걸었고 여전히 그분의 음성을 알던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며, 그의 집안에서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함께 읽으면, 이것이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가장 확실하게 읽는 길입니다. 셋은 하나님의 자녀로 길러졌고, 그의 계보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지키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5장은 대를 이어 그의 계보를 따라가며, 누가도 바로 그 계보를 「하나님의 아들」로 끝맺습니다.

긴 수명의 시대에 누린 넉넉한 삶

창세기 5장은 이 계보에 관해 또 하나를 기록합니다. 그들이 산 햇수입니다. 아담은 930년을 살았고, 셋은 912년, 에노스는 905년, 게난은 910년, 마할랄렐은 895년, 야렛은 962년, 에녹은 하나님께서 데려가시기 전까지 365년, 므두셀라는 969년, 라멕은 777년, 노아는 950년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임재 가까이에서 살던 집안의 수명이었습니다. 창세기는 가인의 계보에 관해서는 그런 햇수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창세기가 그 땅에 관해 들려주는 모습은 굶주림이 아니라 넉넉함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땅을 고통 속에서 일구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지만, 또한 “너는 … 먹을 것이다”(창세기 3:17-19)라고도 말씀하셨으며, 친히 가죽옷을 지어 남자와 여자에게 입혀 주셨습니다(창세기 3:21). 가인은 땅을 일구어 “흙(아다마)의 소산 중에서” 가져왔고, 아벨은 양을 치며 “자기 양 떼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가져왔습니다(창세기 4:3-4).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별조차 홍수 이전에 이미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모든 정결한 짐승은 일곱 쌍씩” 데려가라고 말씀하셨고(창세기 7:2), 홍수 뒤에 노아가 “모든 정결한 가축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바쳤기 때문입니다(창세기 8:20).

하나님의 임재 가까이에서 살던 이들에게는 밭과 양 떼와 옷과 예배가 있었고,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전해지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음식과 건강과 삶의 방식 전체는 그분의 임재 밖으로 나간 이들의 삶보다 분명 더 넉넉했습니다. 창세기가 이것을 한 문장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창세기가 두 곳에 관해 말하는 것에서 따라 나오는 결론입니다.

그들이 기르던 양도 같은 방식으로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토라에서 예물의 기름은 여호와께 속하며, 화목제의 고기는 예물을 가져온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먹습니다(레위기 3:16-17; 7:15; 신명기 12:7). 하나님께서는 양을 드시지 않으며, 고기는 버려지지 않습니다. 홍수 이전의 집안들이 양고기를 먹었다고 글자 그대로 말하는 구절은 없으며, 어떤 이들은 창세기 9:3을 홍수 뒤에야 비로소 고기를 먹었다는 뜻으로 읽기도 합니다. 하지만 창세기 9:3은 움직이는 모든 것을 온 인류에게 열어 주는 말씀이지, 그 이전에 아무도 예물의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아벨의 양 떼, 그가 바친 기름, 노아가 이미 알고 있던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그리고 가죽옷을 함께 놓고 헤아려 보면, 그 집안들이 자기들이 기르던 양의 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근거가 충분한 추론입니다.

셋에서 노아까지

창세기 5장의 숫자들은 더해 볼 수 있으며, 더해 보면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담의 창조부터 세면, 셋은 130년에 태어났고, 에노스는 235년, 게난은 325년, 마할랄렐은 395년, 야렛은 460년, 에녹은 622년, 므두셀라는 687년, 라멕은 874년, 노아는 1056년에 태어났습니다. 아담은 930년에 죽었으므로, 노아의 아버지 라멕이 태어났을 때에도 살아 있었으며, 라멕의 생애 처음 56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낯선 사람들의 긴 사슬을 거쳐 전해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담 자신의 입에서 노아의 아버지에게로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홍수가 났을 때 노아는 600세였으므로(창세기 7:6), 홍수는 1656년에 났습니다. 그때까지 아담은 930년에, 셋은 1042년에, 에노스는 1140년에, 게난은 1235년에, 마할랄렐은 1290년에, 야렛은 1422년에 이미 죽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걸었고,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으므로 그가 없어졌다”(창세기 5:24). 라멕은 홍수 5년 전인 1651년에 죽었습니다. 므두셀라는 홍수가 난 바로 그해인 1656년에 죽었습니다. 그에 관해 성경은 “므두셀라가 산 날이 모두 구백육십구 년이었고, 그가 죽었다”(창세기 5:27)라고만 말합니다. 그가 물속에서 죽었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직계 조상 가운데 홍수로 죽었다고 기록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 안에서 지켜진 셋의 계보는 끊어지지 않고 노아에게까지 이어졌으며,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집을 통해 여덟 혼을 물을 통해 안전하게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보았고, 그들이 취했습니다

셋에서 노아로 곧장 이어지는 계보가 셋 집안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5장의 아버지들은 저마다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여러 세기가 흐르며 셋의 후손은 큰 백성으로 불어났고, 수가 많아지면서 그들 가운데 많은 이가 바깥세상으로, 곧 「아담의 딸들」, 하나님의 임재에서 떨어져 살던 사람들에게로 눈을 돌렸습니다.

창세기 6:2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며, 거기에 쓰인 두 동사는 귀 기울여 들어 볼 만합니다. 첫째는 라카흐(취하다)로, 한국어 YLV는 이를 「아내로 맞이하였다」로 옮겼습니다. 둘째는 바하르(택하다), 곧 「택한」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도 같은 동사 라카흐가 쓰였지만, 그때 취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시고” 여자를 지으시고, “그녀를 아담에게 데려오셨다.” 남자는 하나님의 손에서 자기 아내를 받았습니다. 창세기 6장에서는 그 질서가 뒤집힙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보았고, 자기들이 택한 모든 자 가운데서 자기들을 위해 취했습니다.

이 말씀은 동산의 일과도 같은 울림을 줍니다. 동산에서 “여자(이샤)가 그 나무를 보니 먹기에 좋고 … 그래서 그녀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창세기 3:6). 창세기 6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담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 아내로 맞이하였다.” 원문에서는 「좋고」와 「아름다운」이 같은 낱말 「좋다」이고, 「따서」와 「아내로 맞이하였다」도 같은 동사 라카흐(취하다)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자란 자녀들이 가르침이 아니라 눈으로 택했습니다.

창세기 6:3-4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영(루아흐)이 아담 안에서 영원히 다투지 않을 것이니, 그도 살(바사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될 것이다.” 그 시절에, 그리고 그 후에도, 네피림이 땅에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담의 딸들에게 들어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옛적의 용사들 곧 이름난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영(루아흐)이 아담 안에서 영원히 다투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며, 그 까닭을 “그도 살(바사르)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은 사람을 두고 선포됩니다. 그리고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담의 딸들에게 들어가 자식을 낳았으니”라고 말합니다. 「들어가」에 쓰인 동사는 보(들어가다)인데, 남편이 아내에게 들어갈 때 성경이 쓰는 바로 그 동사입니다. 혼인과 자녀를 낳는 일의 낱말들이 여기에 다 있지만, 그 취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택한 것이었습니다.

용사들, 이름난 자들

창세기는 그 혼인에서 태어난 자녀들을 “옛적의 용사들 곧 이름난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자들」은 히브리어 이쉬(남자)입니다. 「용사들」에 해당하는 낱말은 기보림입니다. 그들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었으며, 창세기는 그들을 사람 말고 다른 무엇으로도 부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어떻게 그토록 강해졌는지 설명하지 않지만, 가장 평이한 설명이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과 들어맞습니다. 여러 세기 동안 하나님의 임재 가까이에서 잘 먹고 잘 배우며 살아온 계보의 아들들이 바깥세상에서 아내를 맞이하자, 그 자녀들이 건장하고 키 크게 자라 이름을 떨친 것입니다.

먹는 것과 삶의 조건이 몸을 얼마나 크게 좌우하는지는 역사가 보여 줍니다. 2016년 NCD 위험요인 협력단(NCD Risk Factor Collaboration)이 학술지 「이라이프(eLife)」에 발표한 세계 성인 키 연구는 1896년생과 1996년생을 비교했습니다. 한국 여성은 약 20센티미터가 커져 세계 여성 가운데 가장 크게 늘었고, 한국 남성은 약 15센티미터가 커졌습니다. 그 한 세기 동안 한국에 새로운 종류의 사람이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더 잘 먹고 더 잘 살았을 뿐입니다. 용사들을 이렇게 읽는 것은 설득력 있는 해석입니다. 사람 말고 다른 존재가 필요 없고, 어느 시대에나 몸이 자라는 이치와도 맞기 때문입니다.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

하나님의 가족이 세상과 섞이자 세상이 그 가족을 삼켰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보셨습니다.

창세기 6:5 여호와께서 땅에 아담의 악이 크고 그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다.

「계획」으로 옮긴 낱말은 예체르로, 생각을 빚거나 지어내는 것을 뜻하며, 창세기 2장 7절에서 하나님께서 티끌로 아담을 지으셨다고 할 때 쓰인 동사와 같은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이 이제는 자기 마음의 생각 속에서 악만을, “항상 악할 뿐”인 것을 지어내고 있었으며, 이 문장은 어떤 예외도 남기지 않습니다.

부패와 폭력

이 기록은 몇 구절 뒤에 판결에 이릅니다.

창세기 6:11-13 땅이 하나님 앞에서 부패하였고, 땅이 폭력으로 가득 찼다. 하나님이 땅을 보시니, 보라, 부패하였다. 모든 살(바사르)이 땅에서 자기 길을 부패시켰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살(바사르)의 끝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그들로 인하여 땅이 폭력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보라,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겠다.

이 대목은 세 히브리어 낱말을 축으로 돌아갑니다. 첫째는 샤하트(부패하다)로, 두 구절에 세 번 나옵니다. 땅이 “부패하였고”, 땅이 “부패하였다”, 그리고 “모든 살(바사르)이 땅에서 자기 길을 부패시켰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마스(폭력)로, 11절에 한 번, 그리고 13절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하신 말씀에 다시, 모두 두 번 나옵니다. 셋째는 콜 바사르, 곧 「모든 살」이라는 말입니다.

바사르는 창세기 2장 24절 「한 살」의 그 「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한 살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든 살」이 자기 길을 부패시켰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한 일을 그리던 동사 샤하트가 이제 하나님의 동사가 됩니다. “보라,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겠다.” 여기서 「멸하겠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쉬히탐(그들을 멸하다)은 같은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사람이 부패시킨 것을 하나님께서 멸하시려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부패와 폭력을 나란히 듭니다. 그 세대의 죄를 한 가지로 좁히지 않습니다. 둘 다 판결에 들어 있습니다. 부패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결합 그 자체에까지 파고들었고, 폭력은 생명으로 채우라고 그분께서 말씀하신 땅을 채웠습니다. 히브리어 동사 하나, 곧 「채우다」를 뜻하는 말레가 두 자리에 서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 첫 복의 낱말이자, 창세기 6장 11절 “땅이 폭력으로 가득 찼다”의 낱말입니다.

노아의 날들과 같이

예슈아께서는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오심에 관해 가르치실 때 그 날들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37-39 인자의 파루시아(오심-임재)는 노아의 날들과 같을 것이다. 홍수 이전의 날들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트로고(씹다)하고 마시며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었으니, 홍수가 올 때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모두 휩쓸려 갔으니, 인자의 파루시아(오심-임재)도 그러할 것이다.

예슈아께서는 노아의 날들을 사람들이 하던 일로 그리셨습니다. “트로고(씹다)하고 마시며 장가들고 시집가고.” 이 가운데 어느 것도 그 자체로 악하지 않으며, 혼인은 창세기 첫 장부터 그분의 복입니다. 그러나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그 모든 일을 그대로 이어 갔고, “홍수가 올 때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모두 휩쓸려 갔으니.” 이것은 예슈아께서 아노미아(토라없음)가 많아지고 많은 자들의 사랑이 식으리라고 경고하신 바로 그 강론입니다(마태복음 24:12).

경고는 어느 시대에나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삶을 택할 때 무너집니다. 토라는 아들을 여호와에게서 떠나게 할 민족들과의 혼인을 금하면서 이스라엘에게 이 경고를 주며(신명기 7:3-4), 바울도 에클레시아에게 같은 경고를 줍니다. “불신자들과 에테로쥐군테스(어울리지 않는 멍에를 메는)가 되지 말라”(고린도후서 6:14).

다른 해석들

공정하려면 「하나님의 아들들」에 관한 다른 잘 알려진 해석들을, 각 해석의 난점과 함께 내놓아야 합니다.

가장 오래된 해석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사람인 아내를 맞이한 천사들로 읽습니다. 이 해석은 에녹1서와 여러 초기 저술가들에게서 볼 수 있으며, 이를 지지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늘의 존재들인 욥기(욥기 1:6; 38:7)와 유다서를 근거로 듭니다.

유다서 1:6-7 또 자신의 영역을 지키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거처를 버린 천사들을, 큰 날의 크리시스(심판)까지 영원한 사슬로 조포스(흑암) 아래에 지켜 두셨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변 도시들도, 이들과 같은 방식으로 음행하고 다른 사르크스(육체)를 따라간 것이,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는 본보기가 되었다.

이 해석은 몇 가지 난점에 부딪힙니다. 예슈아께서는 부활 때에 사람들이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으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2:30). 창세기 6장의 심판은 사람에게 내립니다. “나의 영(루아흐)이 아담 안에서 영원히 다투지 않을 것이니”, “아담의 악이 크고”, “내가 창조한 아담을 … 쓸어버리겠다”(창세기 6:3, 5, 7). 천사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 유다는 자기 고유한 거처를 버린 천사들과 소돔을 말하지만, 창세기 6장이나 홍수를 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홍수를 거쳐 살아남은 것은 노아의 집뿐인데도, 네피림은 홍수 뒤에 정탐꾼들의 보고에서 다시 나옵니다(민수기 13:33).

두 번째 해석은 고대 아람어 번역인 타르굼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을 원하는 여자는 누구든 데려간 통치자들과 귀족들로 봅니다. 이 해석의 난점은 본문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평민이 아니라 「아담의 딸들」과 맞세운다는 점, 그리고 창세기 어디에서도 왕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부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 해석은 이 장이 따라온 해석입니다. 이 해석도 역사가 깊어서,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의 아들들을 셋의 계보로 읽었습니다. 이에 맞서 제기되는 반론은 욥기가 이 표현을 하늘의 존재들에게 쓴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욥기는 하늘 법정을 말하고, 창세기 4–6장은 사람의 가족을 말하며, 누가와 모세와 사도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에게 이 표현을 씁니다. 성경 전체와 함께 읽으면, 셋 가운데 가장 확실한 해석은 이것입니다.

그러고도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셨습니다

베드로에게서 한 줄이 더 옵니다.

베드로전서 3:20 그들은 전에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기다리실 때, 방주가 준비되던 노아의 날들에 불순종하였다. 그러나 그 방주 안으로 들어간 몇 명, 곧 여덟 프쉬카이(혼들)는 물을 통해 구원받았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기다리실 때, 방주가 준비되던 노아의 날들”을 말합니다. 부패가 시작되자마자 심판이 내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방주가 준비되는 내내 기다리셨고, 베드로는 다른 곳에서 노아를 “디카이오쉬네(의로움)를 선포하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베드로후서 2:5). 끝내 여덟 혼이 물을 통해 건너왔습니다. 그러나 그 인내는 참으로 있었습니다.

이 장들이 걸어온 길

우리는 물고기와 새들에게, 이어서 남자와 여자에게 하신 복에서 출발했습니다. 번성하고 많아져서 채우라는 복이었습니다. 티끌로 지어진 남자와 그의 옆구리에서 지어진 여자를 보았습니다. 「한 살」이라는 말씀을 읽었고, 바울이 그것을 메시아와 에클레시아에 관한 큰 비밀이라고 부르는 것도 들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에게서 근심한 한 영을 보았고, 언약의 아내, 곧 영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하나님의 씨를 찾으시는 아내를 보았으며, 주님과 합하여 그분과 한 영이 된 신자도 보았습니다. 또 야다라는 낱말과, 신약 헬라어에서 그 짝인 기노스코를 따라, “아담이 … 하와를 알았다”에서 호세아와 예레미야를 거쳐 나사렛으로, “나는 너희를 한 번도 알지 못했으니”라는 경고로, 그리고 “이것이 영원한 조에(생명)이니, 곧 … 당신 …을 아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에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홍수 전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눈으로 택하고 세상이 그 가족을 삼켰을 때, 그 질서가 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 뒤에는 혼인을 자기 언약의 그림으로 만드신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그분의 백성이 그분께 신실하지 못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남편으로서 말씀하셨으며, 성경에서 가장 다정한 말씀 가운데 몇몇이 그분의 말씀입니다. 노아의 날들에 인내하며 기다리신 하나님은 아가서와 호세아 선지자의 글에서 사랑을 말씀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 끝내 놓지 않으시는 남편의 사랑을 지니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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