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여행
약 46–48년 · 사도행전 13:1–14:28
- 수리아 안디옥
- 실루기아
- 구브로(살라미 · 바보)
- 버가
- 비시디아 안디옥
- 이고니온
- 루스드라
- 더베
- 앗달리아
- 수리아 안디옥
- 동행
- 바나바 · 요한 마가(버가까지)
- 절기 · 특기
-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전함(13:14).
성경 해설 · 역사
예슈아의 생애에서 사도 시대, 박해와 성전 파괴, 제국 교회와 중세를 거쳐 인쇄본과 오늘의 번역에 이르기까지, 신약성경과 에클레시아(교회)가 걸어온 길을 연대순으로 개관합니다. 연대는 학계의 표준을 따르며, 견해가 나뉘는 곳에는 「약 · 추정 · 전승 · 다른 견해」를 밝혔습니다.
한눈에 보기
신약성경이 기록된 기간은 교회 역사 전체에서 반세기 남짓입니다. 그 뒤의 긴 시간 동안 언어와 중심지, 본문과 해석의 틀이 차례로 바뀌었습니다.
시대 구분은 본 쪽의 서술을 위한 것이며, 경계 연도는 대표적인 사건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카드를 누르면 해당 구역으로 이동합니다.
01 · 기원전 약 6–4년 – 기원후 33년
복음서는 예슈아의 생애를 토라의 절기와 함께 기록합니다. 탄생 후의 정결 예식, 해마다의 유월절, 유월절의 십자가, 첫 열매의 부활, 샤부오트의 거룩한 영 강림이 하나의 달력 위에 놓여 있습니다.
기원전 약 6–4년
「예슈아(예수)께서 헤롯 왕 시대에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신 후에」(마태복음 2:1). 헤롯 대왕은 기원전 4년에 사망하였다는 것이 다수설이므로(기원전 1년으로 보는 다른 견해가 있음), 탄생은 그 이전으로 추정됩니다. 기원후 1년을 탄생 해로 삼은 연대 계산은 6세기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것으로, 실제 연대와 몇 해의 차이가 있습니다.
탄생 후 40일
부모는 「모세의 노모스(법)를 따라」 정결 기간이 찬 뒤 아기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여호와께 드리고 제물을 바쳤습니다(레위기 12:2–8 · 출애굽기 13:2).
기원후 약 6–9년경 (추정)
「그런데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 헤오르테(절기)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열두 살 되던 해에도 「명절 관례를 따라」 올라갔고, 소년 예슈아는 성전에서 선생들과 문답하였습니다.
기원후 약 27–29년
요한의 사역은 「디베료 황제 통치 십오 년째」(누가복음 3:1)에 시작되었습니다. 이를 기원후 28/29년으로 보는 계산이 일반적이며, 공동 통치 기간부터 세면 26/27년이 됩니다. 예슈아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약 삼십 세」였고(3:23), 침례 후 광야에서 사십 일을 금식하셨습니다(마태복음 4:1–11).
공적 사역 초기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비롯한 열둘을 세우셨습니다. 열둘이라는 수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연결됩니다(마태복음 19:28).
기원후 33년 3월 31일 · 니산월 13일 — 유월절의 준비일
예슈아께서는 유월절의 준비일인 기원후 33년 3월 31일 아침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이날은 니산월 13일이었으며, 잠시 후 늦은 오후 해가 저물 때 니산월 14일 유월절 절기가 시작되기 전이었습니다(요한복음 19:14).
죽음에 들어가시고 무덤에 들어가신 때로부터 부활까지는 정확히 3일 낮 3일 밤입니다. 신약 번역들에서 예슈아의 시신이 저녁이 되어서 무덤에 안치되었다고 기록된 것은, 원어 옵세 · 옵시아스 등의 용법을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대로 하지 않고 이방인의 방식으로 생각한 해석입니다. 본 사역의 성경 해설 「최후의 만찬과 3낮 3밤」과 「옵세 — 신약의 ‘저녁’ 단어 연구」를 보시면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이 날짜는 어디까지나 수학적인 날짜 계산입니다. 현재 Hebcal 등에서 발표된 날짜, 곧 유대인들이 발표한 성경력을 따른 계산입니다. 이 계산에 오류가 있다면 다시 계산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마태복음 27:31–33 · 마가복음 15:20–22 · 누가복음 23:26–33 · 요한복음 19:16–17
숨을 거두심 마태복음 27:50 · 마가복음 15:37 · 누가복음 23:46 · 요한복음 19:30
준비일 · 무덤에 안치 마태복음 27:57–62 · 마가복음 15:42–46 · 누가복음 23:50–54 · 요한복음 19:31 · 38–42
3일 낮 3일 밤 마태복음 12:40
기원후 33년 4월 3일 · 니산월 16일 아주 이른 아침
예슈아께서는 니산월 16일 아주 이른 아침, 서기로는 기원후 33년 4월 3일에 부활하셨습니다. 바울은 「메시아(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셨으니, 잠든 자들의 아파르케(첫 열매)가 되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고린도전서 15:20).
이 날짜 역시 위 십자가의 날짜와 같은 수학적 계산(현재 Hebcal 등에서 발표된, 유대인들이 발표한 성경력을 따른 계산)이며, 오류가 있다면 다시 계산되어야 합니다.
부활 마태복음 28:1–6 · 마가복음 16:1–6 · 9 · 누가복음 24:1–7 · 요한복음 20:1–9
사도의 증언 고린도전서 15:3–4 · 20
부활 후 사십 일 동안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면서 하나님의 바실레이아(왕국)에 관한 것들을 말씀하셨다.」 바울은 오백여 형제에게 한꺼번에 나타나신 일도 전합니다(고린도전서 15:5–8).
오멜 계수의 마흔째 날 무렵
첫 이삭 단을 드린 날부터 오순절까지 일곱 안식일을 세는 오멜 계수(레위기 23:15–16)의 흐름에서, 승천은 부활 후 사십 일째 무렵에 있었습니다. 예슈아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고 명하셨습니다(사도행전 1:4).
샤부오트(오순절) — 오멜 계수 50일째
「펜테코스테(오순절)의 날이 다 찼을 때 그들이 모두 한 곳에 한마음으로 있었다.」 토라가 정한 칠칠절, 곧 샤부오트에 거룩한 영이 임하셨고,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모인 여러 나라의 유대인들 앞에서 에클레시아(교회)가 첫 증언을 시작하였습니다.
02 · 33년 – 약 62년
예루살렘의 유대인 공동체로 시작한 에클레시아는 박해로 흩어지면서 사마리아와 안디옥, 소아시아와 헬라, 로마로 퍼져 나갔습니다.
33년 이후
믿는 이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고 집에서 떡을 떼었습니다(사도행전 2:46). 베드로와 요한은 「아홉 번째 호라(그-시간) 곧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3:1). 첫 공동체는 유대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 질서 안에 있었습니다.
약 34–35년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며 「주 예슈아(예수)여, 내 프뉴마(영)를 받으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날 예루살렘 에클레시아에 큰 박해가 일어나 사도들 외에는 모두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습니다.
약 34–36년
사울은 다메섹 가까이에서 하늘의 빛을 보고 「히브리 방언으로」 자신을 부르는 음성을 들었습니다(사도행전 26:14). 회심 후 삼 년 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습니다(갈라디아서 1:18).
약 40년대 초
흩어진 이들이 안디옥에서 헬라인들에게도 말씀을 전하였고, 바나바와 사울이 한 해 동안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메시아를 따르는 자들)이라고 불렸다.」
44년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 베드로가 갇힌 것은 무교절 기간이었습니다(12:3–4). 아그립바 1세는 같은 해에 죽었습니다(12:23, 요세푸스의 기록과 일치).
약 49년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방인 신자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고, 우상의 더러움 · 음행 · 목매어 죽인 것 · 피를 멀리하라는 편지를 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야고보는 그 근거로 「모세가 예로부터 각 성읍에서 선포되어 매 사바톤(레위기 23장의 모든 모에드를 지칭함)마다 회당에서 낭독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15:21).
사도행전 15:1–35 · 갈라디아서 2:1–10 (같은 사건으로 보는 견해가 많음)
51–52년
바울이 고린도에 1년 6개월 머무는 동안 아가야 총독 갈리오 앞에 섰습니다(18:11–17). 델포이에서 발견된 비문은 갈리오의 재임을 51–52년경으로 확정해 주어, 바울 연대기의 가장 확실한 기준점이 됩니다.
약 57 – 62년
바울은 오순절에 맞추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성전에서 체포되었습니다(21:27–36). 가이사랴에서 두 해를 갇혀 있다가(24:27)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로마로 압송되었고, 로마에서 「만 이 년 동안」 셋집에 머물며 가르쳤습니다(28:30–31).
약 46–48년 · 사도행전 13:1–14:28
약 49–52년 · 사도행전 15:36–18:22
약 53–57년 · 사도행전 18:23–21:17
약 59–60년 · 사도행전 27:1–28:16
성경에 기록된 지킴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은 여정과 사건의 때를 토라의 절기로 표시하고, 성전의 정결 예식에 참여한 일을 기록합니다. 아래 인용은 예슈아 직역성경 본문 그대로입니다.
33년 · 예루살렘
펜테코스테(오순절)의 날이 다 찼을 때 그들이 모두 한 곳에 한마음으로 있었다.
사도행전 2:1
토라의 칠칠절(레위기 23:15–21). 거룩한 영의 강림이 이 절기에 있었습니다.
44년 · 예루살렘
그것이 유대인들에게 기뻐할 일임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했다. 그때는 무교절 기간이었다.
헤롯이 베드로를 잡아 옥에 가두고 넷씩 네 조의 군인들에게 맡겨 지키게 하면서,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려 했다.
사도행전 12:3–4
누가는 사건의 때를 절기로 표시합니다.
약 52년 · 에베소
그들에게 작별하며 "나는 반드시 다가오는 헤오르테(절기)를 예루살렘에서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다시 여러분에게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하고 에베소를 떠났다.
사도행전 18:21
「반드시 … 지켜야 합니다」의 구절은 비잔틴 본문(예슈아 직역성경의 저본)에 있고, 네슬레-알란트 등 비평본에는 없습니다.
약 57년 봄 · 빌립보
우리는 무교절이 지난 후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이르러 칠 일을 보냈다.
사도행전 20:6
이방 도시 빌립보에서도 여정의 기준은 무교절이었습니다.
약 57년 · 밀레도
이는 바울이 아시아에서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려고 에베소를 그냥 지나치기로 크리노(심판/결정하다)했기 때문이다. 그는 할 수 있으면 오순절(펜테코스테) 날에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서두르고 있었다.
사도행전 20:16
약 57년 · 예루살렘 성전
그들을 데려다 그들과 함께 정결 예식을 행하고 그들을 위해 비용을 대어 머리를 깎게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에 관해 들은 것들이 아무 근거 없음을 모두 알게 될 것이고, 당신도 노모스(법)를 지켜 행하는 사람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사도행전 21:24
머리를 깎는 서원은 나실인 서원(민수기 6:1–21)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바울은 이튿날 정결 예식을 행하고 성전에 들어갔습니다(21:26).
약 57–59년 · 가이사랴 법정
당신께서 아실 수 있는 것은, 내가 예루살렘에 경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이 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4:11
바울은 구제헌금과 예물을 드리러 왔으며, 성전에서 발견되었을 때 정결 예식을 마친 상태였다고 진술합니다(24:17–18).
약 59년 가을 · 그레데 미항
많은 시간이 지났고 금식일도 이미 지나 항해가 이미 위험했으므로 바울이 권고했다.
사도행전 27:9
레위기 16:29–31 · 23:27 의 속죄일(티쉬리월 10일)을 가리킵니다. 누가는 지중해 항해 철의 끝을 이 절기로 표시합니다.
약 54–55년 · 에베소에서 기록
새 덩어리가 되도록 묵은 누룩을 제거하라, 여러분이 무교병인 것처럼; 이는 우리의 유월절이신 메시아(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으로도, 악의와 사악함의 누룩으로도 아니고, 성실함과 알레데이아(진리)의 무교병으로 헤오르타조(동사, 절기)를 지키자.
고린도전서 5:7–8
이방인이 다수였던 고린도 에클레시아에게 쓴 권면입니다.
약 54–55년 · 에베소
그런데 나는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겠다.
고린도전서 16:8
바울은 자신의 일정을 절기로 셉니다.
기원후 45–100년
막대는 각 권 안내에 실은 전통적 견해의 연대이며, 점선은 학자에 따라 제시되는 다른 연대입니다. 바울 서신 대부분과 공관복음서는 70년 성전 파괴 이전에 놓입니다.
복음서 · 사도행전
바울 서신
히브리서 · 일반 서신
요한계시록
| 책 | 기록 연대(전통적 견해 · 다른 견해) |
|---|---|
| 마태복음 | 기원후 50~60년대경 (학자에 따라 70~80년대) |
| 마가복음 | 기원후 50년대 후반~60년대 |
| 누가복음 | 기원후 60년대 (학자에 따라 70~80년대) |
| 요한복음 | 기원후 85~95년경 |
| 사도행전 | 기원후 62년경 (학자에 따라 70~80년대) |
| 갈라디아서 | 기원후 48~49년경 또는 50년대 중반 |
| 데살로니가전서 | 기원후 50~51년경 |
| 데살로니가후서 | 기원후 51~52년경 |
| 고린도전서 | 기원후 54~55년경 |
| 고린도후서 | 기원후 55~56년경 |
| 로마서 | 기원후 56~57년경 |
| 에베소서 | 기원후 60~62년경 |
| 빌립보서 | 기원후 60~62년경 |
| 골로새서 | 기원후 60~62년경 |
| 빌레몬서 | 기원후 60~62년경 (로마 투옥 중) |
| 디모데전서 | 기원후 62~64년경 (첫 로마 투옥 이후) |
| 디도서 | 기원후 62~64년경 |
| 디모데후서 | 기원후 64~67년경 (둘째 로마 투옥 중, 순교 직전) |
| 야고보서 | 기원후 40년대 후반~62년 이전 |
| 히브리서 | 기원후 60년대 (성전 파괴 이전으로 보는 견해가 많음) |
| 베드로전서 | 기원후 62~64년경 |
| 베드로후서 | 기원후 64~68년경 (베드로의 순교 직전) |
| 유다서 | 기원후 60~80년경 |
| 요한일서 | 기원후 85~95년경 |
| 요한이서 | 기원후 85~95년경 |
| 요한삼서 | 기원후 85~95년경 |
| 요한계시록 | 기원후 95년경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 학자에 따라 60년대 후반) |
각 권의 저자 · 연대 · 배경은 성경의 각 권 안내에서 볼 수 있습니다.
03 · 62년 – 약 100년
예루살렘 에클레시아의 지도자와 두 사도가 순교하고, 유대 전쟁 끝에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1세기 후반은 에클레시아와 유대 백성 모두에게 큰 전환점이었습니다.
70년 아브월
예슈아께서 성전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슈아(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들을 모두 보는가? 아멘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모두 무너질 것이다."마태복음 24:2
약 40년 뒤 티투스의 군대가 성전을 불태웠습니다. 성전 중심의 예배가 끝나면서 유대교는 회당과 랍비 전통으로, 이방인이 다수가 되어 가던 에클레시아는 회당 밖의 독자적인 길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62년
예루살렘 에클레시아의 지도자 야고보는 총독 베스도가 죽고 후임 알비누스가 부임하기 전, 대제사장 아나누스(안나스의 아들)에 의해 돌로 처형되었습니다. 요세푸스가 기록하였습니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20.200 · 갈라디아서 1:19 · 사도행전 15:13
64년 7월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무리에게 돌린 네로는 그들을 짐승 가죽을 씌워 개에게 찢기게 하거나 불태우는 등 잔혹하게 처형하였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기록입니다.
타키투스 「연대기」 15.44
약 64–67년 · 로마 전승
두 사도가 네로 치하의 로마에서 순교하였다는 것은 1세기 말 로마의 클레멘스 서신(약 96년) 이래 일관된 전승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형, 로마 시민 바울은 참수형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서신으로 전해집니다(4:6–8).
클레멘스 1서 5–6장 · 에우세비오스 「교회사」 2.25 · 3.1
66 – 73/74년
가이사랴와 예루살렘의 충돌에서 시작된 항쟁이 전면전으로 번졌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진압을 시작하였고, 그가 황제가 된 뒤 아들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66년 무렵 (추정) 전승
예루살렘의 신자들이 전쟁 전에 계시를 받고 요단 건너편 펠라로 옮겨 갔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예슈아께서는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싸이면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셨습니다(누가복음 21:20–21). 이 전승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나뉩니다.
에우세비오스 「교회사」 3.5.3
70년 아브월 (8월 말경)
티투스의 군대가 성전을 불태웠습니다. 요세푸스는 그날을 아브월 10일로, 랍비 전승은 첫 성전이 무너진 날과 같은 아브월 9일(티샤 베아브)로 기억합니다. 성전 제사와 제사장 제도가 끝났고, 유대교의 중심은 회당과 랍비의 학교(야브네)로 옮겨 갔습니다.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6.250 · 미쉬나 타아니트 4:6 · 마태복음 24:2
73년 또는 74년
항쟁의 마지막 거점이 로마군에 함락되었습니다. 함락 연도는 73년과 74년 두 견해가 있습니다.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7.252–406
70년 이후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인이 성전에 바치던 반 세겔을 로마의 유피테르 카피톨리누스 신전에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로마 당국이 누구를 유대인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가 생겼고, 이는 회당과 메시아 공동체의 경계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학자가 많습니다.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7.218 · 수에토니우스 「도미티아누스」 12
기원후 70–80년대 · 야브네 — 성전 파괴 직후
무엇인가 — 회당에서 날마다 드리는 기도 「열여덟 기도(아미다, 쉐모네 에스레)」의 열두째 축도로 넣은 저주의 기도입니다. 「비르카트 하미님」은 「이단자(미님)들에 대한 축도」라는 뜻이며, 실제 내용은 그들에 대한 저주입니다. 탈무드는 라반 가말리엘 2세의 요청으로 사무엘 하카탄이 이 기도를 지었다고 전합니다.
시기 — 기원후 70년 성전이 파괴된 뒤, 랍비들이 야브네에 모여 회당 예배를 정비하던 70–80년대에 회당 기도문에 두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엇을 낳았는가 — 예슈아를 믿는 유대인 성도들은 회당 예배에서 이 기도를 함께 드릴 수 없었고, 기도를 인도하다 이 축도를 빠뜨리면 의심을 받았습니다. 예슈아를 믿는 이들이 회당에 오지 못하게 한 이 기도로부터, 성도들은 회당과 점점 분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2세기 중엽 유스티누스는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저주한다」고 기록하였고, 4세기의 히에로니무스와 에피파니오스는 회당에서 「나사렛 사람들(노츠림)」을 저주한다고 전합니다. (저주문의 처음 형태와 적용 범위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의가 있습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 베라코트 28b–29a · 유스티누스 「트리포와의 대화」 16 · 96 · 히에로니무스 「이사야 주석」 5.18–19 · 에피파니오스 「파나리온」 29.9
기원후 70–80년대부터 — 점점
회당 기도문의 저주가 두어진 70–80년대부터 예슈아를 믿는 성도들은 회당에서 점점 멀어졌고, 132–135년 바르 코크바 항쟁을 거치며 그 거리는 더 벌어졌습니다. 유대인 성도들은 회당에서도, 이방인이 다수가 된 에클레시아에서도 설 자리를 잃어 갔고, 이방인 지도자들은 안식일 · 절기 · 토라를 「유대인의 것」으로 규정하기 시작하였습니다(이그나티우스 · 「바르나바 서신」 · 유스티누스). 사도행전이 기록한, 성전에 모이고 집마다 빵을 떼며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모세의 글을 듣던 한 공동체는 이렇게 두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사도행전 2:46 · 15:21 · 18:4 · 유스티누스 「트리포와의 대화」 47 · 에피파니오스 「파나리온」 29
04 · 2–3세기
바르 코크바 항쟁 뒤 예루살렘은 이방 도시가 되었고, 이방인 지도자들의 문헌은 안식일과 유월절, 토라와 히브리 성경을 둘러싸고 회당과의 경계를 긋기 시작하였습니다. 동시에 박해는 계속되었습니다.
약 107년 (트라야누스 치하) 전승
글로바의 아들로 예루살렘 에클레시아의 둘째 감독이었던 시므온이 순교하였고(헤게시푸스의 기록),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는 로마로 압송되던 길에 일곱 편지를 남기고 순교하였습니다. 이그나티우스의 연대를 2세기 중엽으로 늦추는 다른 견해도 있습니다.
에우세비오스 「교회사」 3.32 · 3.36
약 107–110년
이그나티우스는 마그네시아 교회에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말고 주의 날을 따라 살라」고 쓰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유대교화하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이방인 지도자가 안식일과 유대적 관습을 공동체 밖의 것으로 규정한 이른 기록입니다.
이그나티우스 「마그네시아인들에게」 9.1 · 10.3
약 70–135년 (흔히 130년경)
언약은 유대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하고(4.6–8), 음식 규례를 우의적으로 풀이하며(10장), 일곱째 날 대신 예수께서 부활하신 「여덟째 날」을 기뻐하며 지킨다고 말합니다(15.8–9). 사도 바나바의 저작은 아닌 것으로 봅니다.
「바르나바 서신」 4 · 10 · 15장
132–135/136년
랍비 아키바는 항쟁의 지도자 시몬 바르 코시바를 「별의 아들(바르 코크바)」, 곧 메시아로 불렀습니다. 예슈아를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 성도들은 그를 따를 수 없었고, 유스티누스는 바르 코크바가 예슈아를 부인하지 않는 이들을 가혹하게 처벌하였다고 기록합니다.
하드리아누스는 항쟁을 진압한 뒤 예루살렘을 로마 식민시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재건하고 유대인의 출입을 금하였으며, 속주 유대의 이름을 「시리아 팔라이스티나」로 바꾸었습니다. 이때부터 예루살렘 에클레시아의 감독은 이방인 출신(마르쿠스)으로 이어졌습니다.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69.12–14 · 에우세비오스 「교회사」 4.6 · 유스티누스 「첫째 변증」 31.6 · 예루살렘 탈무드 타아니트 4:5
약 144년 · 로마
마르키온은 히브리 성경의 하나님을 예슈아의 아버지와 다른 신으로 보고, 구약 전체와 토라를 버렸습니다. 그는 손질한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 열 편만으로 이루어진 목록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알려진 가장 이른 신약 정경 목록입니다. 로마 교회는 그를 출교하였으나, 그의 영향에 맞서는 과정에서 정경 논의가 본격화되었습니다.
이레나이우스 「이단 반박」 1.27 · 테르툴리아누스 「마르키온 반박」(약 207–208)
약 155–160년
유스티누스는 할례 · 안식일 · 절기가 이스라엘의 완악함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논증하였습니다(18–23장). 동시에 토라를 지키는 유대인 신자도 이방인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면 구원받는다고 보면서, 그들과 교제조차 하지 않으려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고 전합니다(47장).
유스티누스 「트리포와의 대화」 18–23 · 47장
약 155년 · 약 190–195년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요한과 빌립의 전례를 따라 니산월 14일에 유월절을 기념하였습니다. 서머나의 폴리카르푸스와 로마의 아니케투스는 약 155년에 서로의 관습을 인정하고 평화롭게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약 190년대에 로마의 빅토르는 일요일 준수를 강요하며 아시아 교회들을 출교하려 하였고, 에베소의 폴리크라테스는 「복음을 따라 14일을 지킨다」고 답하였으며, 이레나이우스는 빅토르를 만류하였습니다.
에우세비오스 「교회사」 5.23–25
약 160–170년
14일파 감독이었던 멜리토는 유월절 설교에서 출애굽의 어린양을 그리스도의 예표로 풀이하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죽였다」고 고발하였습니다(96). 「신 살해」 고발의 가장 이른 명시적 문헌으로 꼽힙니다.
멜리토 「유월절에 관하여」 72–99
2세기 말 – 3세기 초
북아프리카에서 고대 라틴어 역본(베투스 라티나)이 쓰이기 시작하였고,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약 155–220)는 라틴어로 신학 저술을 남긴 첫 주요 저자가 되었습니다. 「trinitas」 등 이후 서방 신학의 용어가 그에게서 비롯됩니다.
테르툴리아누스 「프락세아스 반박」 등
약 240–245년 · 가이사랴
히브리어 본문 · 그 헬라 문자 음역 · 아퀼라 · 심마쿠스 · 칠십인역 · 테오도티온을 여섯 단으로 나란히 놓은 대역 성경입니다. 교회가 쓰던 칠십인역을 히브리어 본문과 대조한 대작이었으나, 오리게네스의 주석 방법은 비유적(알레고리) 해석의 전통을 굳혔습니다.
에우세비오스 「교회사」 6.16
250년 · 257–258년
데키우스는 제국의 모든 주민에게 신들에게 제사하고 증명서(리벨루스)를 받게 하였습니다. 발레리아누스 치하에서는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가 순교하였습니다(258).
키프리아누스 서신 · 이집트 출토 리벨루스 문서
303–311년
303년 2월의 첫 칙령은 교회 건물을 허물고 성경을 넘겨 불사르라고 명하였습니다. 사본이 대거 소실된 이 박해는 311년 갈레리우스의 관용 칙령으로 끝났습니다. 같은 무렵 스페인의 엘비라 회의(약 306년)는 신자가 유대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제50조).
락탄티우스 「박해자들의 죽음에 관하여」 12–13 · 34 · 엘비라 회의 제49–50조
05 · 313년 – 476년
박해받던 공동체는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공의회와 황제의 법령이 예배의 날과 절기의 계산을 정하였고, 27권의 신약 목록과 라틴어 불가타가 이 시기에 자리 잡았습니다.
312년 10월 · 313년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이긴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리키니우스와 함께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모든 종교의 자유와 몰수 재산의 반환을 정하였습니다(흔히 「밀라노 칙령」이라 부르나, 실제로는 두 황제의 합의를 시행한 서신입니다).
락탄티우스 「박해자들의 죽음에 관하여」 48 · 에우세비오스 「교회사」 10.5
321년 3월
콘스탄티누스는 도시의 재판관과 주민, 장인들에게 「존귀한 태양의 날」에 쉬도록 하는 법을 반포하였습니다. 주간의 첫날이 국가의 휴일이 된 첫 법령입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3.12.2
325년
공의회는 아리우스 논쟁과 함께 부활절 날짜를 다루어, 모든 교회가 한날에 지키되 유대인의 유월절 계산을 따르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결정을 알린 콘스탄티누스의 서신은 「유대인들과는 아무것도 함께하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이후 니산월 14일 준수는 이단적 관습으로 다루어졌습니다.
에우세비오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3.18–20 · 공의회의 알렉산드리아 교회 서신
330년 5월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온을 새 수도로 봉헌하였습니다. 이듬해 무렵 그는 에우세비오스에게 새 수도의 교회들을 위한 성경 사본 50부를 주문하였습니다.
에우세비오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4.36
약 363–364년 (연대 추정)
「그리스도인은 유대교화하여 안식일에 쉬어서는 안 되며 그날에 일하고, 주의 날을 더 존중하여 할 수 있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날에 쉬어야 한다. 유대교화하는 자로 드러나면 그리스도에게서 파문된다.」 같은 회의는 유대인과 절기를 함께 지키거나 무교병을 받는 것도 금하였습니다(제37–38조).
라오디게아 회의 제29 · 37 · 38조
367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는 오늘의 신약 27권과 정확히 일치하는 목록을 처음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아타나시우스 「제39 축일 서신」
380년 2월
테오도시우스 1세는 공동 황제들과 함께 로마의 다마수스와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가 전하는 신앙을 모든 백성이 따라야 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니케아 신앙의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391–392년에는 이교 제사가 금지되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법전 16.1.2 「Cunctos populos」
381년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새 로마」로서 로마 감독 다음의 명예를 가진다고 정하였습니다(제3조). 451년 칼케돈 공의회 제28조가 이를 다시 확인하였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제3조 · 칼케돈 공의회 제28조
386–387년 · 안디옥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회당에 출입하고 나팔절 · 속죄일 · 초막절을 함께 지키는 안디옥의 신자들을 강하게 책망하는 설교 여덟 편을 남겼습니다. 4세기 말까지도 적지 않은 신자가 성경의 절기를 지키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기록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유대인 반박 설교」 1–8
382 – 약 405년
다마수스의 위임으로 히에로니무스는 복음서의 라틴어 본문을 개정하고(약 384), 베들레헴에서 구약을 히브리어 원문에서 새로 번역하였습니다(약 390–405). 「히브리어의 진리」를 내세운 그의 번역은 칠십인역을 영감된 성경으로 여긴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우려를 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18.43 · 히에로니무스 · 아우구스티누스 서신
393 · 397년
북아프리카의 회의들이 신약 27권을 포함한 성경 목록을 확인하였습니다.
카르타고 회의(397) 제47조
410년 · 476년
알라리크의 서고트족이 로마를 약탈하였고(410), 476년 오도아케르가 마지막 서로마 황제를 폐위하였습니다. 서방에서는 로마 감독이 정치적 공백 속에서 권위의 중심이 되어 갔습니다.
언어의 이동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언어가 바뀔 때마다 낱말이 담던 뜻의 결도 함께 옮겨 갔습니다.
동방의 갈래 — 헬라어에서 옮긴 고대 역본
한 낱말이 언어를 건너온 길
가르침 → 법
칠십인역이 토라를 노모스로 옮긴 뒤, 라틴어와 각 민족어는 「법」 계열의 낱말을 이어받았습니다.
회중 → 교회
칠십인역은 카할을 자주 에클레시아로 옮겼습니다. 영어 church 는 에클레시아가 아니라 헬라어 키리아콘(「주의 [집]」)에서 온 말입니다.
06 · 476년 – 1453년
서방은 로마 감독과 라틴어 불가타를 중심으로, 동방은 콘스탄티노플과 헬라어 전례를 중심으로 각기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헬라어 신약의 필사 전승은 동방에서 이어졌습니다.
590–604년
그레고리우스 1세는 서방의 행정 · 전례 · 선교를 로마 중심으로 정비하였습니다. 이후 로마 감독(교황)의 수위권 주장은 레오 1세(440–461)에서 시작된 흐름을 이어 중세 내내 강화되었습니다.
637–642년
예루살렘(637/638) · 안디옥(637) · 알렉산드리아(641/642)가 아랍 이슬람 세력의 지배 아래 들어갔습니다. 다섯 총대주교좌 가운데 그리스도교 국가 안에 남은 곳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둘이 되었습니다.
800년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 샤를마뉴에게 황제관을 씌웠습니다. 라틴어 · 로마 전례 · 불가타가 서유럽 전역의 표준이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9세기 (연대가 적힌 가장 이른 것 835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헬라어권 교회는 신약을 끊임없이 필사하였습니다. 9세기에 서체가 대문자에서 연결 소문자로 바뀌었고(연대가 적힌 가장 이른 소문자 사본은 835년의 우스펜스키 복음서, 461번), 예배에서 읽을 본문을 날짜순으로 엮은 성구집도 널리 쓰였습니다. 오늘 남아 있는 헬라어 신약 사본의 대다수가 이 전승에 속하며, 이것이 비잔틴 본문 · 다수 본문의 바탕입니다.
신약 사본 쪽 참조
863년 이후
콘스탄티노플에서 파송된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가 슬라브 문자를 만들고 성경과 전례서를 슬라브어로 옮겼습니다. 동방 교회는 각 민족의 말로 예배하는 전통을 이어 갔습니다.
1054년 7월
로마 교황 사절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가 서로를 파문하였습니다. 교황 수위권과 니케아 신경의 「필리오케(그리고 아들에게서)」 추가 등이 쟁점이었습니다. 상호 파문은 1965년에 철회되었습니다.
1096–1099년 · 1204년
제1차 십자군은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하였고, 그 출정 길에 라인란트의 유대 공동체들이 학살되었습니다(1096). 제4차 십자군은 1204년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여 동서 교회의 골을 깊게 하였습니다.
13세기 초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븐 랭턴이 라틴어 불가타에 붙인 장 구분이 오늘 쓰는 성경 장 구분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1397년 · 1438–1439년 · 1453년 5월
비잔틴 학자 마누엘 크리솔로라스가 피렌체에서 헬라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고(1397), 피렌체 공의회(1438–1439)에는 동방 학자들이 사본을 가지고 왔습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자 더 많은 학자와 사본이 이탈리아로 옮겨 왔고, 이는 서방 인문주의자들이 헬라어 신약 원문으로 돌아가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07 · 1453년 – 1648년
인쇄술은 헬라어 원문과 민족어 성경을 대량으로 보급하였습니다. 원문으로 돌아가자는 인문주의의 구호(ad fontes)는 라틴어 번역의 몇몇 용어를 다시 묻게 하였습니다.
약 1454–1455년
마인츠에서 인쇄된 최초의 주요 활판 인쇄 서적은 라틴어 불가타 성경이었습니다.
1517 · 1522년
루터는 1517년 「95개조」의 첫 조에서 회개의 뜻을 다루었고, 1522년 9월 에라스무스 판을 저본으로 한 독일어 신약을 출간하였습니다.
1526년
헬라어에서 직접 옮긴 첫 인쇄 영어 신약입니다. 틴데일은 에클레시아를 church 가 아니라 congregation(회중)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1536년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1546년
가톨릭 교회는 불가타를 공적 낭독 · 논쟁 · 설교에서 「진정한」 본문으로 삼는다고 선언하였습니다.
1551년
로베르 에스티엔(스테파누스)이 제네바에서 낸 헬라어 신약 제4판에 처음으로 오늘의 절 번호가 매겨졌습니다.
1611년 · 1633년
킹제임스 성경은 번역 원칙에서 「옛 교회 용어를 유지하고, church 를 congregation 으로 옮기지 말라」고 정하였습니다(밴크로프트의 번역 규칙 제3조, 1604). 1633년 엘제비르 판의 서문 문구에서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이라는 이름이 나왔습니다.
08 · 1648년 – 오늘
1844 · 1859년
티셴도르프가 시내산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4세기 대문자 사본을 찾아 학계에 알렸습니다. 이후 이른 사본을 중시하는 비평 본문이 힘을 얻었습니다.
1881년 · 1898년 이후
웨스트코트와 호트의 본문(1881)은 바티칸 · 시내 사본을 중시하여 이후 비평본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네슬레 판(1898 초판)은 네슬레-알란트 판으로 이어져 제28판(2012)이 학술 표준으로 쓰이며, 오늘 대부분의 현대어 번역이 이 계열을 저본으로 합니다.
1882 · 1887 · 1900 · 1911년
로스와 매킨타이어의 누가복음(1882), 신약 전체 「예수셩교젼셔」(1887), 「신약젼셔」(1900), 구약을 포함한 「성경젼셔」(1911)가 차례로 간행되었습니다. 이후 개역(1938) · 개역한글(1961) · 개역개정(1998)으로 이어졌습니다.
1947년 이후
쿰란에서 기원전 3세기–기원후 1세기의 히브리어 성경 사본이 발견되어, 예슈아 시대 유대 땅의 성경 본문과 신앙 세계를 직접 보여 주는 자료가 되었습니다.
1965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1054년의 상호 파문을 철회하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우리 시대」(Nostra Aetate)는 예수의 죽음을 당시나 오늘의 모든 유대인에게 돌릴 수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1991 · 2005 · 2018년
모리스 A. 로빈슨과 윌리엄 G. 피어폰트가 비잔틴 사본 전승에 근거하여 편집한 헬라어 신약입니다(1991 초판, 2005 · 2018 개정).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되었으며, 예슈아 직역성경 신약의 저본입니다.
교회 중심지의 이동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사도행전 1:8)의 순서는 역사에서도 그대로 펼쳐졌습니다. 다만 중심이 옮겨 갈 때마다 출발점인 예루살렘과 유대적 뿌리는 점점 멀어졌습니다.
신약 본문의 전승
자필 원본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늘의 신약은 손으로 베낀 사본과 그것을 모아 펴낸 인쇄본, 그리고 그 인쇄본을 저본으로 한 번역을 거쳐 우리에게 왔습니다.
역사가 남긴 차이
아래는 기록된 문헌과 결정에 근거한 요인들입니다. 어느 교파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독자가 1세기의 본문을 읽을 때 사이에 놓인 층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예슈아와 사도들의 말은 히브리어와 아람어였고,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으며, 서방 교회는 천 년 넘게 라틴어로 성경을 읽었습니다. 히브리적 개념은 이 과정에서 헬라어 · 라틴어 신학 용어로 옮겨졌습니다. 토라(가르침)는 노모스 · lex 를 거쳐 「법」이 되었고, 마태복음 4:17 의 메타노에이테(회개하라)는 라틴어에서 「고행을 행하라」로 읽혔습니다.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은 절기와 정결 예식을 지키는 공동체를 기록합니다. 그러나 2세기 이후 이방인 지도자들의 문헌과 4세기 공의회는 안식일과 유월절 계산을 「유대교화」로 규정하고 분리를 제도화하였습니다.
마르키온은 히브리 성경을 버렸고, 교회는 그를 정죄하면서도 구약을 주로 헬라어 칠십인역과 라틴어 역본으로 읽었습니다. 2세기의 「신 살해」 고발과 유대인과의 단절을 정한 법규는 회당과 에클레시아 사이의 거리를 넓혔습니다.
313년 이후 교회는 박해받는 소수에서 제국이 후원하는 기관이 되었고, 380년에는 국교가 되었습니다. 감독 위계, 공의회의 결정, 황제의 법령이 신앙과 예배의 형식을 정하였습니다.
서방에서는 테르툴리아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스콜라 신학에 이르기까지 라틴어 성경과 라틴어 신학이 해석의 틀을 만들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성경도 이 용어 체계 안에서 번역되었습니다.
번역은 앞선 번역의 용어를 이어받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옛 교회 용어를 유지하도록 규정하였고, 오늘의 번역은 대부분 19세기 이후의 비평본을 저본으로 합니다. 어떤 본문을, 어떤 용어로 옮기는가가 독자가 만나는 신약을 결정합니다.
돌아갈 곳
본 단체는 1세기 에클레시아가 읽고 지킨 말씀을 오늘의 독자가 그 결 그대로 만날 수 있도록, 히브리어 · 헬라어 원전에서 직접 번역하고 원어의 낱말을 병기합니다. 예슈아 직역성경은 구약을 히브리어 본문에서, 신약을 로빈슨-피어폰트 비잔틴 본문에서 옮겼습니다.
사랑받는 이들이여, 우리 공통된 구원에 관해 너희에게 쓰기를 매우 열망하면서도, 거룩한 이들에게 단번에 전해진 믿음을 위해 열심히 싸우도록 권면하는 것을 써야 할 필요를 느꼈다.유다서 1:3 · 예슈아 직역성경예슈아 직역성경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