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iticus 23 · 거룩한 모임
불려 모여 · 소리 내어 읽는 · 거룩한 자리
YLV 성경공부
미크라 코데쉬
레위기 23장은 여호와의 절기를 미크라 코데쉬라고 부릅니다. 우리말 성경은 대개 「성회(聖會)」로 옮깁니다. 틀린 번역은 아닙니다. 다만 그 두 글자에 담기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미크라의 어근은 카라(קרא)입니다. 이 낱말은 부르다이면서 동시에 소리 내어 읽다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이 둘은 갈라지지 않습니다. 불러 모으는 일과 소리 내어 읽는 일이 한 낱말 안에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 미크라 코데쉬는 모여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불려 나와, 소리 내어 읽는 자리입니다. 읽는 소리가 없으면 그것은 아직 미크라가 아닙니다.
두 낱말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넘어와도 이 일은 이름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회당에서 하던 그 일을, 신약의 에클레시아가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레위기 23장이 부르는 이름
여호와께서 절기를 정하시며 백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거룩한 모임으로 선포하라」— 그 「거룩한 모임」이 미크라 코데쉬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너희가 거룩한 모임으로 선포할 여호와의 정해진 때들(모에딤), 이것들이 내 정해진 때들(모에딤)이다.
레위기 23:2 · 예슈아 직역성경절기만이 아닙니다. 이레마다 돌아오는 안식일에도 같은 이름이 붙습니다. 일 년에 몇 번 있는 특별한 행사가 아니라, 주마다 반복되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엿새 동안은 일을 하고, 일곱째 날은 샤밭 중의 샤밭톤이요 거룩한 모임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하면 안 된다. 이것은 너희 모든 거처에서 여호와께 드리는 샤밭이다.
레위기 23:3 · 예슈아 직역성경「너희 모든 거처에서」— 성전 한 곳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는 자리마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각 가정의 식탁을 여는 근거입니다.
수문 앞 광장
그들은 울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백성이 무너진 성벽을 겨우 다시 쌓은 해였습니다. 일곱째 달 초하루, 온 백성이 한 사람같이 수문 앞 광장에 모여 서기관 에스라에게 모세의 토라 책을 가져오라고 청했습니다. 시켜서 모인 것이 아닙니다. 백성이 먼저 청했습니다.
에스라가 책을 폈습니다. 그가 펴는 것을 보고 온 백성이 일어섰습니다. 손을 들어 「아멘, 아멘」 하고는 얼굴을 땅에 대었습니다. 그리고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와 여자와 알아들을 만한 모든 이 앞에서 낭독이 이어졌습니다. 반나절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토라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풀어 밝히 설명하니, 백성이 그 낭독하는 것을 깨달았다.
느헤미야 8:8 · 예슈아 직역성경그리고 백성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울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설교가 없었고 호소도 없었습니다. 읽었을 뿐입니다. 읽고, 그 뜻을 풀어 주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알아들은 순간 사람들이 무너졌습니다.
왜 울었는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잃고 살아왔는지 그제야 들었습니다. 조상이 어떤 언약 안에 있었는지, 자기들이 어디서 떨어져 나왔는지, 그리고 그 말씀이 아직도 자기들을 향해 있다는 것을 — 읽는 소리를 통해 알았습니다.
총독 느헤미야와 학자요 제사장인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이는 온 백성이 토라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울었기 때문이다.
그가 또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가서 기름진 것을 먹고 단것을 마시며,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 몫을 나누어 보내라. 오늘은 우리 주(아도나이)께 거룩한 날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한 기쁨이 너희의 힘이니라."
느헤미야 8:9–10 · 예슈아 직역성경울음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잔치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 잔치에는 조건이 하나 붙어 있었습니다 —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 몫을 나누어 보내라.
깨달음이 눈물이 되고,
눈물이 잔치가 되고,
잔치가 가난한 이웃의 몫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미크라 코데쉬 하루의 전부입니다. 그날 온 백성이 크게 즐거워한 이유를 본문은 이렇게 적습니다 — 「자기들에게 알린 말씀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느헤미야 8:12).
성경은 읽는 일을 명령으로 둡니다
낭독은 관습이 아니라 명령이었습니다.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그렇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그분 앞에 나타날 때에, 너는 이 토라를 온 이스라엘 앞에서 그들의 귀에 들리도록 읽어라.
백성, 곧 남자들과 여자들과 어린아이들과 네 성문 안에 있는 네 나그네를 모아라. 그래야 그들이 듣고 배워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고, 이 토라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할 것이다.
신명기 31:11–12 · 예슈아 직역성경어린아이와 나그네까지 모으라고 하셨습니다. 알아듣지 못할 것 같은 사람도 그 자리에 있어야 했습니다. 아이를 다른 방으로 보내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갈 때까지 아나그노세이(읽기/낭독)와 파라클레세이(권면)와 가르침에 힘쓰라.
디모데전서 4:13 · 예슈아 직역성경바울이 디모데에게 맡긴 세 가지 가운데 첫째가 낭독입니다. 가르침보다 앞에 놓았습니다. 순서가 뒤바뀐 것이 아닙니다. 읽지 않고 가르치면 가르치는 사람의 말만 남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가 여러분에게 읽혀진 후에는 라오디게아인들의 에클레시아(불러내신-공동체)에서도 읽히게 하고, 라오디게아로부터 온 것도 여러분이 읽도록 하라.
골로새서 4:16 · 예슈아 직역성경이 예언의 말씀들을 읽는 이와 듣는 이들과 그 안에 기록된 것들을 지키는 이들은 복이 있으니, 카이로스(정해진-때)가 가깝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1:3 · 예슈아 직역성경성경 마지막 책의 세 번째 절이 복을 선언하는 대상은 읽는 한 사람과 듣는 여러 사람입니다. 곧 소리 내어 읽는 자리를 그린 문장입니다.
완벽한 낭독을 언제든 부를 수 있는 시대에
지금은 버튼 하나로 흠 없는 음성을 부를 수 있습니다. 발음이 틀리지 않고, 숨이 가쁘지 않고, 지치지 않는 낭독입니다. 속도도 목소리도 고를 수 있습니다. 편리하고, 솔직히 말해 사람보다 잘 읽습니다.
그래서 묻게 됩니다. 그것으로 하면 안 되는가.
미크라 코데쉬는 좋은 소리를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수문 앞 광장에서 귀했던 것은 에스라의 발성이 아니었습니다. 거기 서 있던 사람들이 알아듣고 울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읽는 일과 듣는 일과 깨닫는 일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람들에게 일어난 것, 그것이 그날을 거룩한 날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대신 울어 줄 수는 없습니다.
낭독은 정보를 옮기는 일이 아닙니다.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이 자기 입으로 그 말씀을 소리 내어, 그것이 자기에게 하는 말임을 자기 귀로 듣는 일입니다. 그래서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같은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대신 읽어 주는 음성은 그 고리를 끊습니다. 말씀은 전달되지만,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여전히 구경꾼입니다.
더듬는 소리, 낯선 이름에서 멈칫하는 소리, 읽다가 목이 메어 다음 절을 옆 사람이 이어받는 소리 —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에 사람이 바뀝니다.
편리해질수록 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사라져도 아쉽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것은 아닙니다. 수천 년 동안 회당에서, 광장에서, 지하 골방에서 이어져 온 일입니다. 지금 우리 세대에서 끊기게 두지 마십시오.
그래서 우리 상에서는 이렇게 합니다
- 녹음을 틀지 않습니다. 오디오북이든 무엇이든, 모임에서 읽는 것은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의 음성입니다.
- 돌아가며 읽습니다. 한 사람이 다섯 절씩. 읽기를 잘하는 사람에게 몰아주지 않습니다.
- 아이도 읽습니다. 한글을 갓 뗀 아이가 한 절을 더듬어 읽는 소리가 그 자리에서 가장 귀한 낭독입니다.
- 못 읽는 이를 세웁니다. 짧은 한 절을 맡기고, 옆 사람이 먼저 읽어 따라 하게 합니다.
- 듣기만 하는 사람이 없게 합니다. 이것이 미크라의 조건입니다.
- 읽은 뒤에 뜻을 풀어 봅니다. 에스라도 읽고 나서 그 뜻을 풀어 밝히 설명했습니다.
오디오북은 혼자 있을 때를 위한 것입니다. 출퇴근길에, 일하는 중에, 잠들기 전에 들으십시오. 좋은 물건입니다. 다만 상에 둘러앉거든 그것을 끄고 입을 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