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정에 선 바울 · 44장 / 전체 47장
사랑은 율법을 대신하지 않고 이룹니다
이 주장은 마음씨 고운 분들에게서 자주 듣습니다. “사랑은 더 높은 법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고(로마서 13:10),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이루었습니다(로마서 13:8). 그러니 율법은 끝났습니다.”
이 말이 왜 마음을 끄는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커다란 열쇠 꾸러미를 차고 다닌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도둑질하지 말라」 열쇠 하나, 「거짓말하지 말라」 열쇠 하나, 「탐내지 말라」 열쇠 하나, 그리고 수백 개가 더 허리춤에서 짤랑거립니다. 문을 열 때마다 맞는 열쇠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사랑이라는 황금 열쇠 하나를 건네받으며 이런 말을 듣습니다. “이것 하나면 모든 문이 열립니다. 옛 꾸러미는 버려도 됩니다.”
이것이 이 주장 뒤에 있는 그림이며, 이 주장은 실제로 바울을 인용합니다. 바울은 정말로 사랑이 율법을 이룬다고 썼습니다. 그러므로 물음은 바울이 그 말을 했느냐가 아니라, 무슨 뜻으로 했느냐입니다. 답은 이 책 내내 해 온 방법으로 찾습니다. 한 줄이 아니라 대목 전체를 읽는 것입니다.
세 절을 모두
로마서 13:8-10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아무것도 빚지지 말라. 이는 남을 사랑하는 자는 노모스(법)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는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하는 것과 다른 어떤 계명이 있을지라도 이 말씀 안에서 아나케팔라이오마이(요약되다/하나로 모아지다)되니, 곧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이다. 아가페(사랑)는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가페(사랑)는 노모스(법)의 플레로마(충만한 완성)이다.
8절에는 그 주장이 인용하는 문장, 「남을 사랑하는 자는 노모스(법)를 이루었기 때문이다」가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하다」는 헬라어 아가파오입니다. 10절에는 다른 문장, 「아가페(사랑)는 노모스(법)의 플레로마(충만한 완성)이다」가 있습니다.
그 사이에 9절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절입니다.
9절은 「이는」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바울이 이제 사랑이 어떻게 율법을 이루는지 설명하려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맨 먼저 하는 일은 계명들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이 넷은 말을 바꿔 풀어 쓴 것도, 새 규칙도 아닙니다. 십계명의 일곱째, 여섯째, 여덟째, 열째 계명을 있는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다른 어떤 계명이 있을지라도」라고 덧붙입니다. 나머지를 버리지 않고, 그 하나하나가 들어올 자리를 남겨 둡니다.
바울이 사랑이 하는 일을 설명하는 바로 그 문장에 계명들이 글자 그대로 서 있습니다. 사랑이 계명들을 끝냈다면, 여기는 계명들을 읊기에 이상한 자리일 것입니다.
한 머리 아래 모이다
이어서 핵심 구절이 나옵니다. 바울은 이 모든 계명이 「이 말씀 안에서 아나케팔라이오마이(요약되다/하나로 모아지다)되니, 곧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씀」은 헬라어 로고스입니다.
「요약되다」 뒤에 있는 헬라어는 아나케팔라이오마이입니다. 그 속에는 머리를 뜻하는 낱말 케팔레(머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 낱말은 무언가를 한 머리 아래로 모으는 것, 여럿을 하나로 모으는 것을 뜻합니다.
신문을 생각해 보십시오. 긴 기사 맨 위에는 이야기 전체를 몇 마디로 모은 제목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목을 찢어 내고는 “이제 제목을 가졌으니 기사는 없어졌다”라고 말한 독자는 지금껏 없었습니다. 제목은 기사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기사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려 줄 뿐이며, 그 아래에는 기사가 한 문단도 빠짐없이 그대로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이 계명들에게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라고 말합니다. 계명들은 사랑 아래 모이는 것이지, 사랑 때문에 폐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여기서 열 계명을 다 늘어놓지 않습니다. 넷을 인용한 뒤 나머지는 「다른 어떤 계명이 있을지라도」로 아우릅니다. 그래서 요점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랑은 그가 이름을 댄 계명이든 대지 않은 계명이든, 모든 계명이 그 아래로 모이는 머리입니다.
사랑은 어떻게 이루는가
이제 10절이 이해됩니다. 「아가페(사랑)는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가페(사랑)는 노모스(법)의 플레로마(충만한 완성)이다.」
플레로마는 충만함, 곧 무언가를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랑이 어떻게 율법을 채우는지 방금 말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의 아내도, 이웃의 목숨도, 이웃의 재물도 빼앗지 않으며, 그것들을 탐내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율법을 이룬 것은 그가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생각이 향하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사랑은 계명들을 대신하는 다른 법이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가 계명들을 행하게 하는 힘입니다. 계명들은 사랑이 무엇을 하는지 말해 주고, 사랑은 우리가 그것을 행하는 까닭입니다.
성경이 쓰는 말
한 가지 더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더 높은 법」이라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사랑과 계명을 첫째 자리를 다투는 두 법처럼 여겨 사랑을 계명 위에 두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대신 다른 두 그림을 씁니다.
하나는 방금 읽은 바울의 그림입니다. 계명들은 사랑 안에서 「요약되다」, 곧 한 머리 아래 모입니다. 다른 하나는 42장에서 본 예슈아의 그림입니다. 「이 두 계명에 모든 노모스(법)와 예언자들이 매달려 있다」(마태복음 22:40). 외투들이 한 줄로 박힌 나무 걸이에 걸리듯 계명들은 사랑에 걸려 있으며, 걸이는 외투를 걸어 두려고 있는 것이지 외투를 대신하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 두 계명은 토라에서 왔습니다. 예슈아께서는 신명기 6:5와 레위기 19:18을 인용하고 계셨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13:9에서 모든 것을 그 아래로 모은 바로 그 문장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토라의 한 줄입니다. 사랑이 율법을 끝냈다면, 사랑은 자기 자신도 끝낸 셈입니다.
야고보와 바울은 같은 말을 한다
야고보는 같은 계명을 왕의 이름으로 부릅니다.
야고보서 2:8 만일 그라페(기록된-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바실리코스-노모스(왕의 법)를 이행하면,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라페(기록된-성경)에 따라」 이행하는 「바실리코스-노모스(왕의 법)」라는 말에서 두 가지가 눈에 띕니다. 야고보는 이웃 사랑을 노모스, 곧 법이라 부르고, 그것이 「그라페(기록된-성경)에 따라」, 곧 기록된 대로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성경과 동떨어진 감정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계명이며, 그것을 이행하는 사람에게 야고보는 「선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바울도 6장에서 읽은 갈라디아서의 한 절에서 같은 말을 합니다. 「온 노모스(법)가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한 말씀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갈라디아서 5:14). 여기서 「말씀」도 로고스입니다. 거기서 율법은 완성되는 것이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편지에서 바울은 누구보다도 단호하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7:19 할례는 아무것도 아니고, 무할례도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전부이다.
바울은 이 말을 대부분 이방인 신자로 이루어진 교회에 썼습니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한 바로 그 사도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전부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에게 이 두 말은 서로 부딪치지 않습니다. 같은 것을 두 가지로 말한 것입니다.
다시 열쇠 꾸러미
그러면 황금 열쇠를 받은 사람에게로 돌아가 봅시다. 그 그림은 아름다웠지만 틀린 그림이었습니다. 사랑은 꾸러미를 버리게 해 주는 만능 열쇠가 아닙니다. 바울의 말로 하면 사랑은 모든 계명이 그 아래로 모이는 머리이고, 예슈아의 말로 하면 모든 계명이 걸려 있는 걸이입니다. 이웃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 주장이 끝났다고 말하는 바로 그 계명들을 날마다 지키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구절을 읽어서 결론에 이르지 않습니다. 꿈으로 결론에 이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