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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정에 선 바울 · 43장 / 전체 47장

로마서 8:2와 두 법

앞 장은 로마서 8장의 문 앞에서 끝났습니다. 많은 신자에게 이 장은 온 집에서 가장 환한 방입니다. 「결코 카타크리마(정죄)가 없다」로 문을 열고,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으로 가득하며,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로 끝납니다. 율법 문제를 매듭지을 수 있는 장이 있다면, 바로 이 장일 것처럼 보입니다.

이 장의 첫머리 가까이에 그 문제를 단 한 줄로 매듭짓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이 있고, 그 구절 위에 한 주장이 세워졌습니다. “성령은 생명의 법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죽음과 저주의 법으로 자녀들을 대하지 않으신다.”

사람들이 왜 이 문장을 좋아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문이 활짝 열리는 소리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죽음과 저주를 가져오는 법이 있었고, 이제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옛것이 새것으로 바뀌었고, 믿는 이는 새것 안에서 삽니다.

그러나 어떤 구절에 관한 문장은 그 구절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니 구절로 가 보겠습니다.

무엇에서 해방되었는가

로마서 8:1-2 그러므로 이제 메시아(그리스도) 예슈아(예수) 안에 있어 사르크스(육체)를 따르지 않고 프뉴마(영)를 따라 페리파테오(걷다/행하다)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카타크리마(정죄)가 없다. 이는 메시아(그리스도) 예슈아(예수) 안에서 조에(생명)의 프뉴마(영)의 노모스(법)가 나를 죄와 죽음의 노모스(법)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2절을 천천히 읽되, 한 가지만 찾아보십시오. 바울은 무엇에서 해방되었습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이나 토라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죄와 죽음의 노모스(법)에서」라고 말합니다. 이 한 문장에 노모스(법)라는 낱말이 두 번 나오는데, 바울은 그 둘을 각각 다른 주인에게 묶어 둡니다. 한쪽에는 「조에(생명)의 프뉴마(영)의 노모스(법)」가 있고, 다른 쪽에는 「죄와 죽음의 노모스(법)」가 있습니다.

이 장의 핵심 물음은, 바울이 말하는 「죄와 죽음의 노모스(법)」가 하나님의 율법이냐 하는 것입니다.

짐작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이 불과 몇 문장 앞에서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미 이름 붙인 두 법

7장 끝에서 바울은 한 사람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그리며, 두 편에 이름을 붙입니다.

로마서 7:22-23 이는 내가 에소(내면적) 안드로포스(사람)에 따라 하나님의 노모스(법)와 함께 기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지체들 안에서 내 누스(지성, 영적영역)의 노모스(법)와 대항하여 전투하며 내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노모스(법)로 나를 사로잡는 다른 노모스(법)를 본다.

첫째 법은 「하나님의 노모스(법)」이며, 바울은 이 법과 「함께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헬라어는 쉬네도마이(함께 기뻐하다)로, 더불어 즐거워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벗어나려고 애쓰는 법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에소(내면적) 안드로포스(사람)에 따라」 사랑하는 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내 지체들 안에서」 보는 「다른 노모스(법)」입니다. 바울은 구절 끝에서 그 이름을 분명히 밝힙니다. 「내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노모스(법)」입니다. 이 법은 「전투하며」, 「나를 사로잡는」 법입니다. 이 마지막 낱말은 아이크말로티조(포로로 잡다)로, 전쟁 포로를 잡는 것, 창끝으로 몰아 포로를 끌고 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장을 넘겨 바울이 「죄와 죽음의 노모스(법)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가 어느 법을 말하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가 함께 기뻐하는 법이 아니라, 그를 포로로 잡았던 법입니다.

포로가 집으로 돌아오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붙잡힌 군인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여러 해 동안 적의 수용소에서 수용소의 규칙대로 삽니다. 먹으라 할 때 먹고 자라는 곳에서 자며, 그 수용소의 규칙이 이르는 끝은 단 하나뿐입니다. 그동안 내내 그는 떠나온 나라를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법을 사랑하고 다시 그 법 아래 살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포로이기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문이 활짝 열리고 그는 자유의 몸이 됩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풀려난 것이지, 자기 나라에서 풀려난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그에게 “축하합니다. 해방되었으니 이제 다시는 고향의 법대로 살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법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그가 풀려난 까닭의 전부입니다.

로마서 7장과 8장의 모양이 바로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바울이 함께 기뻐하던 고향이고, 죄의 법은 그를 사로잡은 수용소이며, 생명의 성령은 그 문을 활짝 여신 분입니다. 앞의 주장은 로마서 8:2의 자유를 엉뚱한 곳으로 겨누어, 「수용소에서 해방되었다」를 「고향에서 해방되었다」로 읽습니다.

두 절 뒤

둘째 시험은 더 간단합니다. 누군가 해방되었다면 그 자유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는 것이 마땅한데, 바울은 두 절 뒤에서 그 물음에 친히 답합니다.

로마서 8:4 이는 노모스(법)의 디카이오마(의로운-행위 / 규례를 행함)가 사르크스(육체)를 따르지 않고 프뉴마(영)를 따라 페리파테오(걷다/행하다)하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다.

이 구절은 이미 꼼꼼히 읽었으니, 여기서는 이 구절이 서 있는 자리만 보면 됩니다. 2절은 성령께서 우리를 해방시키셨다고 말하고, 4절은 그 까닭을 말합니다. 「노모스(법)의 디카이오마(의로운-행위 / 규례를 행함)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려 함」, 곧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실제로 행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두 절을 나란히 놓으면 앞의 주장은 설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율법에서 해방시키셨다면 4절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법의 요구가 그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려고 그를 그 법에서 풀어 주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를 죄의 법에서 해방시키셨다면 4절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행하지 못하게 우리를 가두던 수용소가 깨어졌고,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 「사르크스(육체)를 따르지 않고 프뉴마(영)를 따라 페리파테오(걷다/행하다)하는 우리 안에서」 행해집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하나님의 율법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그 법이 마침내 우리로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걷게 합니다.

율법이 아니라 저주

주장의 나머지 절반은 하나님이 더 이상 저주의 법으로 자녀들을 대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참된 것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기쁘게 인정해야 합니다. 신자는 저주 아래 있지 않습니다. 바울이 친히 그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3:13 메시아(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심으로 노모스(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것처럼 —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는다.”

이 구절은 6장에서 읽었고, 거기서 말한 요점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메시아께서는 우리를 「노모스(법)의 저주」에서, 곧 노모스(법)에서가 아니라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낱말은 엑사고라조(값을 치르고 사서 빼내다)로, 몸값을 치르고 사람을 풀어 내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바로 앞에서 자기가 말하는 저주를 신명기 27:26에서 인용했습니다. 「이 토라의 말씀을 굳게 세워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결코 저주가 아니었습니다. 저주는 율법 안에 서지 않는 사람에게 내려진 판결이었고, 메시아께서 우리를 풀어 주신 것은 바로 그 판결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더 이상 저주와 죽음의 판결 아래 있지 않다는 주장은 옳습니다. 그 판결을 율법 자체에 씌울 때 어긋납니다. 로마서 8:2에서 죽음으로 이끄는 법은 죄의 법이고, 갈라디아서 3:10-13에서 저주는 토라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않는 자들의 몫입니다. 어느 구절도 하나님의 율법을 우리가 건짐받은 대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구절이 실제로 하는 말

로마서 8:2를 한 번 더 읽고, 바울이 쓴 그대로 들어 보십시오. 생명을 주시는 성령께서 나를 죽음으로 끌고 가던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7장의 전쟁은 끝났고, 포로는 수용소에서 나왔습니다. 그가 속사람으로 함께 기뻐하던 하나님의 율법은, 이제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시기에 그가 걸을 수 있는 법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끝이 아니라 포로 생활의 끝입니다.

그런데 많은 독자는 또 다른 구절을 진짜 절정으로 내세웁니다. 바울 자신이 사랑이 율법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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