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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정에 선 바울 · 42장 / 전체 47장

계명으로 정의되는 사랑

이번 장에서 다룰 주장은 책의 이 부분에 나오는 주장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성령께서 마음에 새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대신해 죽으신 그 사랑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법이지 십계명이 아닙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참된 법입니다.”

이런 주장에 반박하기란 쉽지 않으며, 대부분은 반박해서도 안 됩니다. 이 주장은 십자가를 중심에 둡니다. 사람을 속에서부터 바꾸는 것은 조항을 늘어놓은 목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 상당 부분은 그대로 참되며, 성경도 바로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것부터 살펴본 뒤, 이 주장 속에서 모든 해를 끼치는 짧은 말 하나로 넘어가겠습니다. 바로 「아닙니다」라는 말입니다.

참된 것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성령께서 마음에 두십니다.

로마서 5:5 엘피스(소망)는 부끄럽게 하지 않으니 이는 우리에게 주신 하기오(거룩한) 프뉴마(영)를 통해 하나님의 아가페(사랑)가 우리 카르디아(마음, 혼적영역)들에 부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랑은 아가페(사랑)이며, 바울은 그 사랑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분의 사랑이 먼저 오고, 우리의 사랑은 그 대답입니다.

요한일서 4:19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니,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게 하려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움직이시고, 우리의 사랑은 그에 대한 응답입니다.

앞의 주장은 이 두 가지를 바로 짚었습니다. 어긋나는 것은 그다음 걸음, 「사랑의 법이지 십계명이 아닙니다」입니다. 이 문장은 사랑과 계명을 서로 맞세우는데, 성경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대신 다른 일을 합니다. 계명으로 사랑을 정의합니다.

성경은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어떤 낱말의 뜻을 가장 확실히 알려면 글쓴이가 그 낱말을 정의하는 곳을 보면 됩니다. 요한은 독자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분명한 말로 알려 줍니다.

요한일서 5:2-3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을 아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킬 때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것이니 — 우리가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 그분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것이니 — 우리가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혹시 누군가 이 말을 짐으로 들을까 봐, 요한은 곧바로 「그분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라고 덧붙입니다.

요한은 둘째 편지에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요한이서 1:6 그리고 이것이 사랑이니: 우리가 그분의 계명들에 따라 페리파테오(걷다/행하다)하는 것이다; 이것이 계명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것처럼 그 안에서 페리파테오(걷다/행하다)하도록 하라.

두 편지가 같은 말을 전합니다. 요한은 사랑이 계명을 대신한다고 말하지 않고, 사랑이란 계명 안에서 걷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슈아께서도 친히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5 너희가 나를 아가페(사랑)하면, 내 계명들을 지키라.

사랑과 계명 지킴은 서로 다른 두 길이 아닙니다. 하나가 길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 길을 걷는 일입니다.

두 큰 계명은 어디서 왔는가

누군가는 틀림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예슈아께서 모든 것을 사랑으로 요약하셨다고 말입니다.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는 물음을 받으셨을 때, 예슈아께서는 십계명을 늘어놓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 장면은 이러합니다.

마태복음 22:37-40 그러자 예슈아(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온 카르디아(마음/혼적영역)와 온 프쉬케(혼)와 온 디아노이아(생각)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계명이다. 둘째도 이것과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이 두 계명에 모든 노모스(법)와 예언자들이 매달려 있다.”

그러나 예슈아께서는 그 두 계명을 그 자리에서 지어내지 않으셨습니다. 두 계명 모두 토라에서 인용하셨습니다.

신명기 6:5 너는 네 온 마음과 네 온 혼(네페쉬)과 네 온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레위기 19:18 네 백성의 자손에게 원수를 갚지 말고 앙심을 품지 말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여호와다.

첫째 계명은 신명기에서 왔습니다. 둘째 계명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는 레위기에서 왔는데, 추수와 품삯과 정직한 저울에 관한 계명들로 가득한 장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사랑의 법은 토라를 대신하러 온 새 법이 아닙니다. 사랑의 법은 토라 자신의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걸이에 걸리다

이어서 예슈아께서는 이 두 계명이 다른 모든 계명과 어떤 관계인지 말씀하십니다. 「이 두 계명에 모든 노모스(법)와 예언자들이 매달려 있다.」

「매달려 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크레만뉘미(매달다)입니다. 무언가를 나무 걸이나 못에 걸 때 쓰는 낱말입니다.

오래된 농가의 뒷문 옆에 나무 걸이가 한 줄로 박혀 있고, 거기에 식구들의 외투와 모자와 밧줄과 연장이 걸려 있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걸이가 모든 것을 받치고 있습니다. 누군가 걸이를 가리키며 “정말 중요한 것은 이것이니, 여기 걸린 것들은 다 내다 버려도 됩니다”라고 말한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벽에는 빈 걸이 두 개만 남을 것입니다. 반대로 누군가 사람들이 실제로 입는 것은 외투라며 걸이를 뽑아 버린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모든 것이 바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예슈아께서는 그 어느 쪽도 하지 않으십니다. 온 토라와 선지자들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매달려 있습니다. 사랑은 계명을 떠받치고, 계명은 사랑이 떠받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라도 치우면, 남는 것은 더 이상 예슈아께서 말씀하신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법과 십계명은 두 법이 아닙니다. 하나의 법, 곧 사랑에 매달린 계명입니다.

십계명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한 가지가 더 있는데, 이것은 우리를 38장에서 읽은 십계명의 첫 줄로 다시 데려갑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다」(출애굽기 20:2).

십계명은 요구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한 백성을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실 만큼 그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으로 시작합니다. 십자가에서와 마찬가지로 시내산에서도 사랑이 먼저 오고, 계명은 사랑받은 백성이 살아가는 길로서 그 뒤를 따릅니다.

성령께서 쓰시는 것이 「사랑의 법이지 십계명이 아닙니다」라고 말할 때, 이 주장은 하나님이 하나로 주신 것을 둘로 쪼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으시며, 요한의 말대로 하나님의 사랑은 이것, 곧 우리가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장에는 더 강한 형태가 있고, 거기에는 그 나름의 근거 구절이 따라옵니다. 바울은 「조에(생명)의 프뉴마(영)의 노모스(법)」가 「나를 죄와 죽음의 노모스(법)에서 해방시켰」다고 말하는데(로마서 8:2), 이 주장은 이 구절을 두고 이제는 성령만이 우리의 유일한 법이며 죽음의 옛 법은 사라졌다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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