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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정에 선 바울 · 27장 / 전체 47장

신약에 나타난 아노미아

사람들은 흔히 진심을 담아 이렇게 주장합니다. “토라를 지키는 일은 율법주의이며, 다른 복음입니다.” 이 두 낱말도 때가 되면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반대편에 있는 낱말, 곧 토라를 제쳐 둘 때 벌어지는 일을 가리키는 낱말부터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1권과 앞서 3장에서 아노미아(법 없음)가 무슨 뜻인지 설명했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좀 더 단순한 길을 택하려 합니다. 비슷하게 들리는 구절들을 모으는 대신, 그 낱말이 직접 적힌 곳만 찾아가서 읽어 보겠습니다.

법을 어기는 두 가지 방식

먼저 성경이 구분하는 한 가지를 짚어 보아야 합니다.

제한 속도 65마일 표지판이 서 있는 고속도로에 두 운전자가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첫 번째 운전자는 80마일로 달리다가 경찰에게 단속되자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압니다. 제한 속도를 어겼음을 인정하고 면허증을 내밉니다. 두 번째 운전자도 80마일로 달리지만, 경찰이 세우자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제한 속도 말입니까? 내게는 제한 속도 같은 건 없습니다.”

두 사람 모두 법을 어겼지만, 서 있는 자리는 같지 않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여전히 표지판을 인정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표지판 자체가 없다고 단정해 버렸습니다.

헬라어에는 첫 번째 운전자를 가리키는 낱말이 있습니다. 범법, 곧 선을 넘어서는 일을 뜻하는 「파라바시스(범법)」입니다. 바울은 다음 구절에서 이 낱말을 씁니다.

로마서 4:15 노모스(법)는 오르게(진노)를 이루기 때문이다. 노모스(법)가 없는 곳에는 파라바시스(범법/위반)도 없다.

야고보는 같은 어근에서 나온 인칭 명사, 곧 범법자라는 낱말을 씁니다.

야고보서 2:11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분이 또 “살인하지 말라”고도 말씀하셨으니; 만약 간음하지 않더라도 살인하면 노모스(법)의 범법자가 되었다.

범법자는 법을 어기면서도 여전히 법 아래에 서 있습니다. 반면 아노미아는 두 번째 운전자와 같습니다. 법이 없는 상태, 곧 토라가 없는 상태이며, 마치 토라가 아예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두 낱말은 서로 다르지만 둘 다 토라를 거스르는 반역이며, 법을 어기는 행위를 포함해 모든 반역의 뿌리는 토라를 제쳐 두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에 요한은 한 줄로 짧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죄는 아노미아(토라없음)이다」(요한일서 3:4). 성경이 직접 그 뜻을 못 박아 두었습니다.

예슈아께서 네 번 쓰신 말씀

예슈아께서는 이 낱말을 네 번 쓰셨습니다. 첫 번째는 지난 장에서 살펴보았는데, 그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도 문 앞에서 「아노미아(토라없음)를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마태복음 7:23)라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나머지 세 곳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13:41 인자가 자신의 사자들을 내보낼 것이며, 그들이 그분의 바실레이아(왕국)에서 모든 스캔달론(걸림돌)들과 아노미아(토라없음)를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이 사람들은 「그분의 바실레이아(왕국)에서」 거두어집니다. 왕국 밖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밀 가운데 함께 서 있었는데, 천사들이 와서 뽑아냅니다. 비유는 이어서 그들이 맞을 결말이 불 풀무라고 알려 줍니다(마태복음 13:42).

마태복음 23: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나 안에는 위선과 아노미아(토라없음)로 가득 차 있다.

예슈아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마태복음 23:27).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경건의 표본 같았지만, 그분은 그들의 속이 두 가지, 곧 위선과 아노미아로 가득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노미아는 누가 보아도 반역이 뚜렷한 사람들만 짓는 죄가 아닙니다. 사람들 눈에 의로워 보이는 사람의 속에도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12 아노미아(토라없음)가 많아지므로 많은 자들의 아가페(사랑)가 식어질 것이다.

네 번째 구절입니다. 아노미아가 많아지면 사랑이 식어 갑니다. 21장과 25장에서 우리는 요한이 하나님의 사랑을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으로 정의함을 보았는데, 여기서 예슈아께서는 같은 진리를 반대편에서 보여 주십니다. 토라를 치워 버리면 사랑은 더 따뜻해지지 않고 오히려 식어 버립니다.

누가는 문 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불의를 뜻하는 「아디키아(불의)」라는 낱말로 기록합니다(누가복음 13:27). 그리고 지난 장에서 보았듯이 요한은 이 둘을 하나로 묶어, 모든 불의가 죄이며 죄는 아노미아라고 말합니다. 애초에 토라가 주어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9 이것 곧 노모스(법)는 의로운 자를 위해 놓여진 것이 아니라 아노모이스(토라없는 이들)와 불순종하는 이들과 경건하지 않은 이들과 죄인들과 거룩하지 않은 이들과 세속적인 이들과 아버지를 죽인 이들과 어머니를 죽인 이들과 살인자들과,

노모스(법)는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노모이스(토라없는 이들)와 불순종하는 이들」을 위해 놓인 것입니다. 이 가운데 처음 낱말은 같은 어근의 형용사 「아노모스(법 없는)」이며, 여기서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토라는 아노미아 때문에, 그것에 맞서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토라는 결코 문제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문제를 푸는 해답이었습니다.

네 구절을 함께 읽으면 한목소리를 냅니다. 내게서 떠나라, 거두어져 나감, 위선과 아노미아, 식어 버린 사랑. 그곳에는 예언도 있었고, 권능도 있었으며, 「주여, 주여」 하는 부르짖음도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 빠져 있던 것이 토라였습니다.

마지막 날들의 사람

바울은 마지막에 나타날 사람을 묘사할 때도 똑같은 낱말을 가져옵니다. 23장에서 스치듯 보았던 구절들인데, 여기서 멈추어 읽어 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3 아무도 여러분을 어떤 방식으로도 완전히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아포스타시아(배교)가 오고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계시되지 않으면 그 날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영어 성경은 다른 헬라어 사본들을 따라 이 구절에서 그를 「무법의 사람(the man of lawlessness)」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YLV 의 기준 본문인 비잔틴 다수 본문(로빈슨–피어폰트 2018)에서는 3절이 「죄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7-8 이는 아노미아(토라없음)의 뮈스테리온(신비)이 이미 에네르게이타이(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니, 다만 지금 카테콘(억제하는 자)이 에크 메수 게네타이(가운데서 비켜남) 할 때까지이다. 그때에 아노모스(토라없는 자)가 계시될 것이니, 주께서 그분의 입의 프뉴마티(영)로 그를 소멸하시고 그분의 파루시아(임재/오심)의 에피파네이아(나타남/출현)로 폐하실 것이다.

7절은 「아노미아(토라없음)의 뮈스테리온(신비)」을 말하고, 8절은 「아노모스(토라없는 자)」, 곧 그 법 없는 자를 말하는데, 여기서도 낱말은 다시 아노모스입니다. 바울은 그를 죄의 사람이라고 부른 뒤, 이미 작용하고 있는 것을 아노미아라고 이름 붙이고, 그 사람 자체를 법 없는 자라고 부릅니다. 요한은 죄가 곧 아노미아라고 이미 알려 주었습니다. 마지막 날들의 사람에게 붙은 이름이 바로 이 낱말입니다.

메시아께서 서 계신 자리

신약은 메시아께서 아노미아를 어떻게 대하시는지도 알려 주는데, 세 구절이 세 가지 답을 줍니다.

히브리서 1:9 당신은 디카이오쉬네(의로움)를 사랑하시고 아노미아(토라없음)를 미워하셨으므로, 하나님, 곧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과 메토코스(함께-참여하는) 이들보다 기쁨의 기름으로 당신에게 부으셨습니다”라고 하셨다.

첫 번째 답은 그분께서 아노미아를 미워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디도서 2:14 그분께서 모든 아노미아(토라없음)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자신을 위해 선한 행위들에 열심인 자기만의 소유된 백성을 정결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다.

두 번째 답은 그분께서 우리를 아노미아에서 건져 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토라에서 건져 내신 것이 아니라 「모든 아노미아(토라없음)」에서 구속하셨으며, 그분께 구속받은 사람들은 「선한 행위들에 열심인」 백성입니다.

이 구절은 천천히 곱씹어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정반대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치 토라가 감옥이라도 되는 것처럼, 메시아께서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하려고 오셨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디도서는 무엇이 감옥인지 분명히 밝히는데, 우리가 배운 바와 정반대입니다. 메시아께서는 토라 없이 살아가는 삶에서 우리를 값을 치르고 사시려고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고도 “나는 자유로우니 토라가 필요 없다” 하고 말하는 신자는, 자신이 몸값으로 구원받아 나온 바로 그 자리로 되돌아가는 셈입니다.

고린도후서 6:14 불신자들과 에테로쥐군테스(어울리지 않는 멍에를 메는)가 되지 말라. 디카이오쉬네(의로움)와 아노미아(토라없음)에 무슨 메토케(함께-참여함)가 있으며, 빛과 어둠에 무슨 코이노니아(교제)가 있겠는가?

세 번째 답은 아노미아가 의와 아무런 몫도 나누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쓰인 낱말은 나눔이나 동업을 뜻하는 「메토케(함께 참여함)」인데, 의와 아노미아는 서로 함께할 몫이 전혀 없습니다.

그분은 아노미아를 미워하셨고, 거기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며, 아노미아는 의와 아무런 공통점도 없습니다.

새 언약이 아노미아를 다루는 방식

이 낱말은 히브리서가 두 번 인용하는 새 언약의 약속에도 등장하며(히브리서 8:12, 10:17), 거기서는 위로를 전합니다.

히브리서 8:12 내가 그들의 불의에 대해 자비로울 것이며, 그들의 죄들과 그들의 아노미아이(토라없음들)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예레미야서에서 인용한 이 새 언약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노미아를 어떻게 다루시는지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아노미아를 승인하지도 않으시고 자유라고 부르지도 않으십니다. 그것을 용서하시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새 언약에서 아노미아는 용서받는 대상이지, 허락된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나란히 놓고 본 구절들

기록된 곳함께 따라오는 내용
마태복음 7:23「내게서 떠나라」
마태복음 13:41그분의 왕국에서 거두어져 나감
마태복음 23:28겉으로는 의로우나 속은 위선과 아노미아로 가득함
마태복음 24:12사랑이 식어 감
요한일서 3:4죄는 아노미아임
디모데전서 1:9노모스는 법 없는 자들을 위해 세워짐
데살로니가후서 2:7-8아노미아의 뮈스테리온(신비) · 그 법 없는 자
히브리서 1:9메시아께서 미워하심
디도서 2:14메시아께서 우리를 거기서 구속하심
고린도후서 6:14의와 함께 참여할 것이 없음
히브리서 8:12용서받고 다시는 기억되지 않음

이 구절들 가운데 아노미아라는 낱말을 좋은 뜻으로 쓴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습니다.

또한 이는 신약에 와서야 새로 생긴 생각도 아니었습니다. 헬라어 낱말이 기록되기 훨씬 전부터,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토라를 버릴 때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미 기록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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