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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정에 선 바울 · 26장 / 전체 47장

순종하는 믿음

가장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사람들이 흔히 하는 주장은 이렇습니다. “예슈아를 믿기만 하면 계명이나 토라를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심지어 구약성경은 몰라도 됩니다.”

마치 복음의 핵심만 깔끔하게 추려 낸 것처럼 들립니다. 힘들게 올라가야 할 사다리도, 하나하나 채워야 할 목록도, 애써 얻어 내야 할 자격도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정직하게 답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단순히 위안만 주고 끝나지 않습니다. 만일 이 주장이 틀렸다면, 그 말을 믿고 의지한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쫓겨나는 자들 가운데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를 신중하게, 오직 신약성경만을 가지고 답해 보려 합니다. 이 장에서는 구약성경 구절이 하나도 나오지 않으며, 앞으로 살펴볼 내용의 절반은 예슈아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문 앞에 선 사람들

마태복음 7:21-23 나에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들의 바실레이아(왕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텔레마(뜻)를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자들이 내게 말하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또 주의 이름으로 데몬(축출 대상 개별 악령)들을 내쫓지 않았습니까, 또 주의 이름으로 많은 뒤나미스(능력)의 일들을 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선언하기를 ‘나는 너희를 한 번도 알지 못했으니, 아노미아(토라없음)를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할 것이다.

우리는 1권에서 이미 이 본문을 만났고, 23장에서도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이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늘어놓는 이력이 참으로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슈아를 향해 「주여, 주여」라고 부릅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예언도 했고, 그분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냈으며, 그분의 이름으로 「많은 뒤나미스(능력)의 일들」을 했습니다. 뒤나미스는 능력, 그것도 진짜 능력을 뜻합니다.

어떤 사람이 개인 저택의 문 앞에 서서 경비원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나는 이 집 주인을 잘 압니다. 그분이 주최한 행사에서 연설도 했고, 그분의 이름으로 큰일도 많이 해냈습니다.” 바로 그때 집주인이 직접 문가로 나와 그를 바라보며 말합니다. “나는 너를 한 번도 알지 못했다.” 그 사람이 늘어놓은 이력이 전부 사실일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가 이름을 빌려 썼던 바로 그 주인이 그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슈아께서는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시는데, 모든 것이 한 단어에 달려 있습니다. 「아노미아(토라없음)를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그분이 지적하신 잘못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도, 권능이 부족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3장에서 보았듯이 아노미아는 토라 없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오직 그것 하나가 없었습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첫머리에서도 예슈아께서는 누가 들어가는지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텔레마(뜻)를 행하는 자」라야 들어갑니다. 「주여」라고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누가는 같은 장면을 조금 다른 세부 내용과 함께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13:26-27 그때 너희가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당신 앞에서 먹고 마셨고, 당신이 우리 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실 것이다, ‘나는 너희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아디키아(불의)를 행하는 자들이여, 내게서 떠나라.’”

이 사람들은 예슈아와 가까이 지냈던 자들입니다. 그분과 함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나누었고, 자기들이 사는 거리에서 그분이 가르치시는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내게서 떠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마태가 아노미아라는 단어를 쓴 자리에서 누가는 아디키아(불의)라는 단어를 썼지만, 이 둘은 서로 다른 판결이 아닙니다. 요한이 우리를 위해 이 두 단어를 하나로 이어 줍니다. 「모든 불의가 죄」(요한일서 5:17)이며, 「죄는 아노미아(토라없음)이다」(요한일서 3:4). 불의와 범죄와 죄는 모두 토라를 거스르는 반역이며, 그러한 모든 반역의 뿌리가 바로 아노미아입니다. 많은 영어 성경이 이 단어를 「무법(lawlessness)」이라고 옮기는데, 그 단어 안에는 「율법(law)」이라는 말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라는 말은 바로 그 낱말을 소리 내어 말한 것입니다.

예슈아께서는 다른 비유에서도 이처럼 골라내어 쫓아내는 장면을 말씀하십니다. 천사들이 「그분의 바실레이아(왕국)에서 모든 스캔달론(걸림돌)들과 아노미아(토라없음)를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마태복음 13:41) 간다고 하셨습니다.

예슈아께서 남기신 다른 말씀들

앞서 본 주장은 믿는 사람에게 계명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2장과 16장에서 예슈아께서 계명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 이미 읽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가장 작은 계명들 가운데 하나라도 어기고 또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는 하늘들의 바실레이아(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라 불릴 것이나」(마태복음 5:19). 이번에는 그 문장의 가운데 있는 「또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치는」이라는 대목을 보십시오. 예슈아께서는 스스로 계명을 어기는 사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계명을 어겨도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까지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믿기만 하십시오, 계명은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말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요한복음 14:15 너희가 나를 아가페(사랑)하면, 내 계명들을 지키라.

예슈아께서는 자신을 향한 사랑과 자신의 계명을 서로 다른 편에 떼어 놓지 않으십니다.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주장의 마지막 줄에는 성경의 나머지 부분조차 알 필요가 없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2:48 나를 거부하고 내 레마(발화된-말씀)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크리노(심판/결정하다)하는 것이 있으니, 내가 말한 로고스(말씀)가 마지막 날에 그를 크리노(심판/결정하다)할 것이다.

예슈아께서 하신 말씀이 마지막 날에 심판할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나는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알 필요가 없다”라고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이 모든 사람이 마주하게 될 심판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남긴 말

사도들도 편지마다 똑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요한은 그분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하고(요한일서 2:4), 지난 장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요한일서 5:3). 바울은 이 주장이 꺼내는 바로 그 질문을 직접 던졌습니다.

로마서 6:1-2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리스(은혜)가 더하게 하려고 죄 안에 머물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어찌 그 안에서 여전히 살겠는가?

바울은 은혜가 있으니 죄가 아무 상관없어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여전히 죄 가운데 살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또한 디도에게는 은혜 자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디도서 2:11-12 하나님의 하리스(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며 나타났으니, 이 하리스(은혜)가 우리를 훈육하여, 경건하지 않음과 세상적인 에피뒤미아(정욕·소욕·강한 욕구)들을 부인하고, 현재의 세대에서 분별 있게, 의롭게, 경건하게 살도록 한다.

은혜는 구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를 가르칩니다. 여기에 쓰인 단어는 파이듀오(훈련하다, 훈육하다)인데, 부모가 자녀를 바르게 길러 내듯 훈련한다는 뜻입니다. 구원을 가져다주는 은혜는 우리가 경건하지 않은 것을 버리고 「현재의 세대에서」 의롭게 살도록 가르칩니다.

바울은 또 고린도 사람들에게 「속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하나님의 왕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할 불의한 자들의 목록을 죽 열거했습니다(고린도전서 6:9-10). 히브리서는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깊이 생각해야 할 경고를 덧붙입니다.

히브리서 10:26-27 우리가 알레데이아(진리)의 에피그노시스(신령한, 온전한 지식)를 받은 후에 고의로 죄를 범하면, 죄들을 위한 제사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고, 오히려 크리시스(심판)의 두려운 기대와 대적자들을 삼킬 불의 열기가 있다.

야고보는 우리가 9장에서 읽었던 단 한 문장으로 이 문제를 정리합니다. 「믿음도 행위들이 없으면 그 자체로 죽은 것이다」(야고보서 2:17).

성경이 끝나는 자리

성경의 마지막 책도 똑같이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용이 맞서 싸우는 마지막 날의 성도들을 묘사하면서, 그들을 두 가지 표지로 설명합니다.

요한계시록 12:17 용이 여인에게 분노하여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고 예슈아(예수)의 증언을 가진 그녀의 남은 자손들과 전쟁하러 떠나갔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4:12 여기에 거룩한 이들의 휘포모네(인내)가 있으니 —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슈아(예수)의 피스티스(믿음)를 지키는 이들이다.

거룩한 자들은 둘 중 어느 하나로만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한 문장 안에 나란히 놓인 이 두 가지 모두로 구별됩니다.

18장에서 보았듯이, 성경의 맨 마지막에 이르러 도성 문 앞에는 「그분의 계명들을 행하는 이들은 복이 있으니」(요한계시록 22:14)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문을 통과해 도성 안으로 들어가지만, 바로 다음 구절은 누가 들어가지 못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요한계시록 22:15 밖에는 개들과 파르마코이(주술사들/독조제-사용자들)와 음행하는 이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을 사랑하고 행하는 이들이 있다.

문밖에 남겨진 자들은 계명이 금하는 일을 일삼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메시아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 장의 어떤 내용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신약성경이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에게 하는 말은 이제 계명이 아무 상관없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이 던지는 말씀은 바울이 물었던 바로 그 질문입니다.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어찌 그 안에서 여전히 살겠는가?」

“나를 믿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는 메시아는, 「너희가 나를 아가페(사랑)하면, 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그 메시아가 아닙니다. 참된 메시아의 자리에 그 다른 메시아를 앉히는 것은 요한이 묘사한 바로 그 일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거짓말쟁이가 누구냐? 예슈아(예수)가 메시아(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이가 아니냐? 이 사람이 안티크리스토스(적그리스도)이니」(요한일서 2:22). 23장에서 보았듯이, 요한은 「나는 그분을 안다」고 말하면서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바로 그 거짓말쟁이라고 정의합니다. 계명이 없는 메시아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결국 문 앞에 선 사람들 가운데 서서 「내게서 떠나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 주장이 아무리 부드럽게 들릴지라도 실상 무서운 말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쫓겨난 까닭은 헬라어 한 단어가 가리키는 것, 곧 아노미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단어는 성경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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