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정에 선 바울 · 25장 / 전체 47장
온유는 침묵이 아닙니다
지난 장은 한 사람이 돌판 두 개를 손에 든 채 산기슭에 서 있는 장면으로 끝났습니다. 이제 그 사람 곁에 서기 전에 먼저 들어 두어야 할 반론이 하나 있습니다. 일리 있는 반론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토라는 이웃을 꾸짖으라고 말하지만, 신약 성경은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려 줍니다. 온유하게 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신이 말하는 모습은 조금도 온유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반론은 실제 성경 구절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우리도 그 구절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온유를 말하는 구절
디모데후서 2:24-25 주의 종은 다투어서는 안 되고, 모든 이들에게 온유하며, 가르치기에 능하고, 악을 잘 참으며, 반대하는 이들을 온유함으로 훈계해야 하니, 혹시 하나님이 그들에게 알레데이아(진리)의 에피그노시스(신령한, 온전한 지식)에 이르도록 메타노이아(회개 / 영적영역)를 주시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주의 종은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친절해야 하고, 부당한 일을 당할 때에 참아야 하며, 온유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문장 안에서 온유한 종은 상대방을 바로잡아 줍니다. 온유는 태도이고, 바로잡아 주는 일은 그가 맡은 임무입니다. 바울이 문장 끝에서 밝히는 소망은 하나님께서 상대방에게 마음과 방향을 돌이키는 「메타노이아(회개)」를 허락하셔서, 마침내 「알레데이아(진리)의 에피그노시스(신령한, 온전한 지식)에 이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온유는 진리를 섬기는 것이지, 진리를 대신하여 그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진짜 질문은 온유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온유가 무엇을 뜻하는지입니다. 성경은 한 사람을 통해 그 질문에 답합니다.
땅 위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
민수기 12:3 그 사람(이쉬) 모세는 매우 온유하여, 흙(아다마) 위의 모든 사람(아담)보다 더하였다.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는 「아나브(겸손하고 낮으며 온유한)」입니다. 모세는 땅 위에 사는 그 어느 누구보다 더 아나브한 사람이었습니다. 온유한 사람의 모습을 찾는 이에게 토라가 직접 한 사람을 눈앞에 보여 준 셈입니다.
이제 바로 그 사람이 산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십시오.
출애굽기 32:19 모세가 진영에 가까이 와서 송아지와 춤추는 것을 보고, 그의 코가 타올라 그의 손에서 판들을 던져 산 아래에서 그것들을 깨뜨렸다.
그의 두 손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시고 하나님의 글씨를 새기신 돌판이 들려 있었습니다(출애굽기 32:15-16). 그는 송아지와 춤추는 모습을 보자마자 손에서 돌판을 던져 산기슭에서 깨뜨려 버렸습니다. 이어지는 다음 구절을 보면, 그는 송아지를 불에 태우고 곱게 갈아 물 위에 뿌린 뒤 이스라엘에게 마시게 했습니다(출애굽기 32:20).
땅 위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그런 일을 행했습니다. 그러고도 성경은 그날 모세가 더 이상 아나브한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한 사람에 대하여 이 두 가지 모습을 모두 기록합니다.
예슈아께서도 같은 자리에 서 계십니다. 그분은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29 나의 멍에를 너희 위에 메고 내게 배우라, 이는 내가 카르디아(마음, 혼적영역)가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이니, 그리하면 너희 프쉬케(혼)들을 위한 안식을 찾을 것이다.
자신을 가리켜 「내가 카르디아(마음, 혼적영역)가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이니」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예슈아께서 마태복음 23장에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33 뱀들이여, 독사의 자식들이여! 게헨나(힌놈 골짜기, 불의 심판 장소)의 크리시스(심판)를 어떻게 피하겠는가?
여기서는 두 낱말이 무게를 지닙니다. 첫째는 「오피스(뱀)」입니다. 둘째는 「겐네마(자손)」인데, 태어난 것, 곧 낳은 것을 뜻하므로 「자식들」로 옮겼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란 곧 뱀의 집안 혈통이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매서운 말씀이며, 스스로 온유하다고 하신 분의 입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온유가 아닌 것
모세가 화를 참지 못했다고 보거나 예슈아께서 답답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감정을 드러내셨다고 생각해서는 이 두 모습이 하나로 맞물리지 않습니다. 온유가 실제로 무엇인지 알 때에야 비로소 이 일들이 하나로 맞아떨어집니다. 온유는 자기 자신을 위해 싸우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짓밟히는 앞에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지도 않습니다.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는 유치원 교사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아이들이 소매를 잡아당기고 신발에 물감을 쏟으며, 심술이 난 어떤 날 오후에는 못된 별명으로 불러도 교사는 미소를 지으며 묵묵히 할 일을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다섯 살배기 아이가 교사의 손을 뿌리치고 찻길로 달려 나가자, 교사는 달리는 차들을 멈춰 세울 만큼 큰 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외칩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 가운데 교사가 온유함을 잃었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교사의 온유함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마침내 보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모세는 누군가 자신을 모욕했기 때문에 돌판을 깨뜨린 것이 아닙니다. 훗날 친형과 누이가 자기를 비방했을 때 모세는 스스로를 변호하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바로 그 자리에 민수기 12장 3절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돌판을 깨뜨린 까닭은 송아지를 보았고, 여호와의 백성이 우상 앞에서 춤추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는 싸우지 않지만, 진리를 위해서는 싸웁니다.
아픔을 준 편지
바울도 똑같은 선택 앞에 섰습니다. 그는 일찍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써서 그들을 아프게 한 적이 있었고,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뒤에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고린도후서 7:8-10 이는 내가 그 편지로 여러분을 슬프게 했을지라도 메타멜로마이(후회하다 / 혼적영역) 하지 않으니, 내가 메타멜로마이(후회하다 / 혼적영역) 했을지라도 — 그 편지가 잠시 여러분을 슬프게 했음을 내가 보기 때문이다 — 이제 기뻐한다. 여러분이 슬퍼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이 메타노이아(회개 / 영적영역)에 이르도록 슬퍼했기 때문이니, 이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따라 슬퍼하여 우리로 인해 아무 손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었다. 이는 하나님을 따른 슬픔은 아메타멜레토스(후회 없는/취소 불가한) 구원을 위한 메타노이아(회개 / 영적영역)를 이루지만, 세상의 슬픔은 사망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는 마음의 변화를 뜻하는 서로 다른 두 낱말이 흐르고 있으며, 예슈아 직역성경(YLV)은 이 둘을 모두 구분하여 표시합니다. 하나는 일이 지나간 뒤에 찾아오는 감정인 후회를 뜻하는 「메타멜로마이(후회하다)」인데, 바울은 자기도 한때 그 감정을 느꼈다고 인정합니다. 다른 하나는 돌이킴 자체를 뜻하는 메타노이아입니다. 바울은 자기 편지가 불러일으킨 슬픔이 그 둘째 것을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곧 「아메타멜레토스(후회 없는/취소 불가한) 구원을 위한 메타노이아(회개 / 영적영역)」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편지가 상대방을 얼마나 따갑게 찔렀는지가 아니라 그 편지가 그들을 어디로 이끌었는지를 보고 판단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서는 데서 끝나는 슬픔은 사과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명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다른 슬픔, 곧 「세상의 슬픔」은 사망으로 이끕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반론이 하나 더 남아 있는데, 이 또한 지난 장에서 읽었던 사랑에 관한 말씀, 곧 실제 성경 구절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이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고」라고 말합니다(고린도전서 13:4). 그렇다면 단호하게 바로잡아 주는 일은 일종의 자랑이며, 자기를 남보다 위에 두는 행위입니까?
그 답은 바울이 이 낱말을 어떻게 썼는지에 있습니다. 바울이 금하는 것은 자기를 높이는 자랑이지만, 그는 또 다른 종류의 자랑에 대해서는 거리낌 없이 말합니다. 그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그들이 「주 예슈아(예수)의 그날에」 자기의 자랑이라고 말합니다(고린도후서 1:14). 또한 자기가 헛되이 달음질하지 않았으므로 메시아의 날에 자랑할 이유가 있기를 소망합니다(빌립보서 2:16). 그리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씁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9-20 이는 우리의 엘피스(소망)나 기쁨이나 자랑의 스테파노스(면류관)가 무엇인가? 그분의 파루시아(오심-임재) 안에서 우리 주 예슈아(예수) 앞에 있는 여러분이 아니겠는가? 이는 여러분이 우리의 영광이고 기쁨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쓰인 낱말은 「카우케시스(자랑)」이며, 이와 가까운 낱말인 「카우케마(자랑거리)」는 바울이 고린도후서 1장 14절과 빌립보서 2장 16절에서 쓴 낱말입니다. 바울의 자랑은 그가 섬겼던 사람들이 주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 서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그 원칙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고린도후서 10: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자랑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화살표가 자기 자신을 향하는 자랑이 문제입니다. 누군가가 돌이켜서 그날에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건네는 바로잡음의 말은 자기를 높이는 일과 정반대에 있습니다.
성경이 교만이라 부르는 것
성경은 교만이 무엇인지도 분명히 정의해 두었는데, 목소리가 강한 것을 교만이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19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모세는 마음이 높아지면 여호와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그분을 잊어버리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신명기 8:11-14). 또한 「제드(오만한 자)」를 「당신의 계명(미츠바)에서 벗어난」 자들이라고 부르는 시편 말씀도 보았습니다(시편 119:21). 성경에서 교만이란 계명들에서 떠나는 것이며, 형제를 다시 부르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이 정의된 자리
그러므로 잘못된 가르침을 단호하게 바로잡아 주는 일은 교만이 아니라 레위기 19장 17절의 계명입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보고도 부드럽게 덮어 주는 일은 사랑이 아니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라고 하며 회칠하는 예레미야 6장 14절의 모습입니다. 사랑은 「알레데이아(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린도전서 13:6). 그리고 요한이 하나님의 사랑이 실제로 무엇인지 밝히려 했을 때, 그는 그 문제를 우리의 감정에 맡겨 두지 않았습니다. 21장에서 읽었듯이, 「하나님의 사랑은 이것이니 — 우리가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요한일서 5:3). 사랑에는 분명한 정의가 있으며, 그 정의는 바로 계명들입니다.
이제 흔히 가장 순수한 은혜의 말로 여겨지는 한 문장 앞에 섭니다. “그런 것은 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믿기만 하십시오.” 신약 성경은 이 말에 대해서도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