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성전 · 42장 / 전체 45장
식탁의 정결과 삶의 정결
중요한 계약서에 서명해 본 사람이라면 거의 아무도 읽지 않는 대목을 압니다. 가격과 날짜와 약속보다 먼저 맨 앞에 나오고, 「용어의 정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회사」가 무엇을 뜻하는지, 「재산」이 무엇을 뜻하는지가 적혀 있습니다. 계약서에서 가장 지루한 대목이지만, 뒤에 오는 모든 조항을 다스립니다. 제8조에 회사가 재산을 제공한다고 적혀 있다면, 누구도 오늘 그 낱말이 어떻게 느껴지는지에 따라 「재산」의 뜻을 정할 수 없습니다. 정의 조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건너뛴 변호사는 소송에서 집니다.
성경에도 그런 정의 조항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지 않은 채 가장 자주 읽히는 낱말 가운데 하나가 「부정한」이라는 말입니다.
흔한 견해는 꽤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많은 교사들은 신약 성경이 부정함을 말할 때 그것은 마음의 죄, 곧 나쁜 생각과 썩은 속사람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음식과 몸과 접촉에 관한 레위기의 정결법은 겉으로 드러나는 육체의 일이었고, 신약 성경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대로라면 구약은 몸을 돌보았고, 신약은 마음을 돌봅니다.
이 견해를 시험하려면 변호사가 하는 대로 맨 앞 조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정의를 내린 이
22장에서 보았듯이,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하며 아카타르톤(부정한 것)이라는 낱말을 썼을 때, 그것은 바울이 지어낸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사야 52장 11절, 곧 처음에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헬라어 아카타르토스(부정한)는 헬라어를 쓰던 유대인들이 히브리어 타메(부정한)를 옮길 때 쓴 낱말입니다.
그렇다면 타메를 정의한 이는 누구입니까? 바울도 아니고 이사야도 아닙니다. 토라가 정의했습니다. 토라를 펴서 이 낱말을 어떻게 쓰는지 보면, 대부분의 독자가 지나치는 것이 보입니다. 토라에서 부정함은 한 줄기에서 두 가지로 자랍니다.
첫째 가지는 음식과 몸과 접촉의 부정함입니다. 이것은 레위기 11장부터 15장까지를 채우는데, 어떤 짐승을 먹을 수 있는지, 유출이나 피부병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주검을 만지면 어떻게 되는지를 말합니다. 둘째 가지는 음행과 우상과 피 흘림의 부정함이며, 레위기 18장에 펼쳐져 있습니다.
가지는 둘이지만 낱말은 하나, 타메입니다.
두 가지에 내린 같은 명령
24장에서 읽었듯이 레위기 10장 10절은 제사장들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구별하고」라는 늘 지킬 직무를 주었습니다. 한 장 뒤, 음식에 관한 법이 끝나는 자리에서 같은 명령이 거의 같은 말로 다시 나옵니다.
레위기 11:47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먹을 수 있는 생물과 먹으면 안 되는 생물을 구별하기 위함이다.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 구별하기」의 동사는 바달, 곧 나누다, 가르다는 뜻입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가르는 제사장의 큰 직무가 곧장 식탁으로 이어집니다. 사람이 무엇을 먹느냐는 거룩함에 붙은 각주가 아닙니다. 거룩함을 실제로 행하는 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제 둘째 가지로, 금지된 결합들을 길게 늘어놓은 레위기 18장의 끝으로 가 보겠습니다.
레위기 18:24-25 너희는 이 모든 것으로 너희 자신을 더럽히면 안 된다.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민족들이 이 모든 것으로 더러워졌고, 그 땅이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위에 그 죄악을 갚으니, 그 땅이 자기 주민들을 토해 냈다.
「너희 자신을 더럽히면 안 된다」, 「민족들이 … 더러워졌고」, 「그 땅이 더러워졌으므로」는 모두 같은 어근 타메에서 나온 말입니다. 레위기 11장에서 주검을 가리키던 낱말이 레위기 18장에서는 간음과 자녀를 바치는 제사를 가리킵니다. 땅마저 간직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인 몸처럼 반응하여, 「그 땅이 자기 주민들을 토해 냈다」고 합니다.
토라는 이 둘을 하나는 실제이고 하나는 상징이라며 두 항목에 나누어 적지 않습니다. 둘 다 사람을 거룩한 것에서 떼어 놓기에, 둘 다에 한 낱말을 씁니다.
한 가지로 다른 가지를 설명하는 에스겔
선지자 에스겔은 두 가지가 어떻게 함께 서 있는지 보여 줍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죄를 그리는 방식을 들어 보십시오.
에스겔 36:17-18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자기 땅(아다마)에 살 때에, 그들이 자기 길과 행위로 그것을 더럽혔으니, 그들의 길이 내 앞에서 월경 중인 여인의 부정함 같았다. 그래서 내가 그들이 그 땅에 흘린 피와 그들이 우상으로 그 땅을 더럽힌 것 때문에, 내 진노를 그들 위에 쏟았다.
에스겔이 꼽는 죄는 둘째 가지에 속합니다. 「그들이 그 땅에 흘린 피」와 「우상」입니다. 그런데 그가 끌어오는 비유는 첫째 가지에서 나옵니다. 「월경 중인 여인의 부정함 같았다」. 그는 도덕적 더러움을 몸의 더러움의 말로 설명하며, 둘 다 토라가 이름 붙인 부정함으로 말합니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의 한낱 그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결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실 때도, 그 약속은 첫째 가지의 말로 적혀 있습니다.
에스겔 36:25 내가 너희 위에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니, 너희의 모든 더러움과 모든 우상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물, 뿌림, 그리고 「너희를 정결하게 하니」라는 말은 모두 정결 예식에 속합니다. 그 물이 그들을 「너희의 모든 더러움과 모든 우상에서」 정결하게 하므로, 한 문장 안에서 두 가지가 함께 정결해집니다.
이것이 정의 조항입니다. 성경에서 「부정한」은 마음의 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토라가 그어 놓은 대로 몸과 행실을 함께 덮습니다.
같은 정의를 읽는 신약 성경
그 정의를 손에 들고 신약 성경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바울은 이사야를 인용하기 몇 절 앞에서 이 단락 전체를 이렇게 엽니다.
고린도후서 6:14 불신자들과 에테로쥐군테스(어울리지 않는 멍에를 메는)가 되지 말라. 디카이오쉬네(의로움)와 아노미아(토라없음)에 무슨 메토케(함께-참여함)가 있으며, 빛과 어둠에 무슨 코이노니아(교제)가 있겠는가?
바울은 의를 아노미아(토라 없음)와 맞세우고, 빛을 어둠과 맞세웁니다. 그는 영적인 안과 육체적인 겉 사이에 선을 긋는 것이 아닙니다. 토라가 그은 선을 긋고 있으며, 단락을 마무리할 때 두 가지를 다 부릅니다.
고린도후서 7:1 그러므로 사랑받는 이들이여, 이 약속들을 가졌으니 우리 자신을 사르크스(육체)와 프뉴마(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가자.
그는 「사르크스(육체)와 프뉴마(영)의 모든 더러움」, 곧 육체의 더러움과 영의 더러움을 말합니다. 부정함이 마음만을 뜻한다면 이 말의 앞쪽 절반은 빈말이 됩니다. 바울은 레위기가 그랬듯이 두 절반을 다 지킵니다.
그의 다른 편지들도 같은 정의를 읽습니다.
에베소서 5:3-5 그런데 음행과 모든 아카타르시아(부정함)나 탐욕은 여러분 중에 언급도 되지 말게 하라. 이것이 거룩한 이들에게 마땅하다. 또한 추잡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경박한 농담도 합당하지 않은 것들이니, 오히려 감사가 있게 하라. 이것을 알라. 음행하는 자나 아카타르토스(부정한, 불결한) 자나 탐욕스러운 자 — 이는 우상 숭배자이다 — 는 메시아(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바실레이아(왕국)에서 상속을 받지 못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7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아카타르시아(부정함)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기아스모(거룩하게 됨) 안에서 부르셨기 때문이다.
「음행과 모든 아카타르시아(부정함)」와 「우상 숭배자」는 레위기 18장, 곧 둘째 가지가 다루는 일입니다. 아카타르시아(부정함)의 반대는 그저 속마음의 상태가 아닙니다. 「하기아스모(거룩하게 됨)」, 곧 거룩하게 되는 것이며, 부정한 것을 거룩한 것과 마주 세우는 토라 자신의 짝입니다.
기록한 이들이 한 일
정결법이 신약 성경에 없다는 주장을 시험할 방법이 하나 더 있습니다. 신약 성경을 쓴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보는 것입니다.
6장에서 우리는 부활 뒤 여러 해가 지나 바울이 야고보의 요청으로 서원한 네 사람과 함께 성전에서 자신을 정결하게 한 일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그것은 마음 불편한 오후 한나절로 끝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뒷날 재판을 받을 때 바울은 자기를 변호하며 그 일을 내세웠습니다.
사도행전 24:18 그 일을 하는 중에 그들이 성전에서 나를 발견했는데, 나는 정결 예식을 마쳤고 무리도 소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온 어떤 유대인들이
사도행전 25:8 바울이 변명했다. “나는 유대인의 노모스(법)에도 성전에도 황제에게도 아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8:17 사흘 후 바울이 그 지방의 유대인 지도자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이 모이자 말했다. “형제 여러분, 나는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에 어긋나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나 예루살렘에서 결박된 채로 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정결 예식을 마쳤」을 때 발견되었고, 「유대인의 노모스(법)에도 성전에도 … 아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에 어긋나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정결법이 폐지되었다고 믿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그것을 지켰다는 데 목숨을 건 사람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주장은 기록과 부딪칩니다. 신약 성경에는 정결법의 폐지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들어 있는 것은 토라가 내린 부정함의 정의를 조금도 바꾸지 않고 쓴 편지들이며, 그 편지를 쓴 사람들은 여전히 토라의 정결 예식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계약서는 다시 쓰이지 않았고, 그 정의 조항은 지금도 효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에 관한 어려운 본문 하나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주의 만찬을 먹은 뒤에 사람들이 병들고, 더러는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