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성전 · 32장 / 전체 45장
실체는 메시아께 속해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누가 왜 골로새 사람들을 판단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뒤에 이어지는 구절이 이 문제를 완전히 끝맺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두 구절을 나란히 읽어 보겠습니다.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이나 헤오르테(절기)나 새달이나 사바톤(레위기 23장의 모든 모에드를 지칭함)들의 일부에 대해 아무도 여러분을 크리노(심판/결정하다)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앞으로 올 것들의 스키아(그림자)요, 실체는 메시아(그리스도)의 것이다.
「앞으로 올 것들의 스키아(그림자)」. 사람들은 대개 이 구절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그림자는 희미한 윤곽일 뿐이니 실체가 오고 나면 더 이상 윤곽은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메시아께서 이미 오셨으므로 절기와 새달과 안식일은 제 역할을 다 마쳤고, 이제는 제쳐 두어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석하려면 그 문장을 과거 시제로 읽어야 하는데, 바울은 과거 시제로 쓰지 않았습니다.
현재 시제로 쓰인 그림자
헬라어 원문은 「하 에스틴 스키아(그것들은 그림자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에스틴은 ‘이다’라는 뜻의 동사 현재형입니다. 바울은 메시아께서 오시기 전에 이 날들이 그림자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일어난 지 여러 해가 지난 뒤에 글을 쓰면서도, 바울은 이 날들이 지금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이미 왔다가 지나간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림자가 어떻게 생기는지 떠올려 보십시오. 맑은 날 늦은 오후, 한 사람이 등 뒤로 낮게 깔린 햇살을 받으며 거리를 걸어갑니다. 그 사람의 그림자가 앞쪽 보도 위로 길게 뻗어 나갑니다. 길 저편에서 기다리던 사람은 그 사람이 도착하기 전에 그 그림자를 먼저 보고, 그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림자는 그 사람 자체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림자는 실제로 있는 것이며,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실제 사람이 드리우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린 그림이 바로 이것입니다. 절기와 새달과 안식일은 「앞으로 올」 무언가에 앞서 드리워진 그림자이며, 그 그림자를 드리우는 분은 여전히 걸어오고 계십니다. 바울이 「실체」라고 쓴 낱말은 글자 그대로는 ‘몸’을 뜻하는 소마(몸)입니다. 「실체는 메시아(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림자를 드리우는 단단한 실체는 메시아께 속해 있으며, 바로 그 실체가 그림자의 모양과 의미를 만들어 냅니다.
그림자는 지금도 드리워집니다
바울이 하지 않은 말에 주목해 보십시오. 바울은 실체가 메시아께 속해 있으니 그림자는 아무 가치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실체는 메시아께 속해 있고, 그림자는 지금도 여전히 드리워진다고 말합니다.
거리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그것이 단지 그림자라는 이유로 눈길을 돌리지 않습니다. 그림자를 드리우는 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동안에는, 누군가 오고 있다는 것과 어느 방향에서 오는지를 알려 주는 것이 바로 그 그림자입니다.
마찬가지로 절기들은 하나님께서 아직 끝내지 않으신 일을 가리킵니다. 절기를 그림자라고 부르는 것은 절기가 공허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실제로 있는 무언가, 메시아께 속한 무언가, 「앞으로 올」 무언가를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앞날을 가리키는 그림자는 계속 지켜볼 이유이지, 버릴 이유가 아닙니다.
「모든 날을 같게」?
독자들은 흔히 골로새서 2장 옆에 또 다른 구절을 나란히 놓고 읽곤 하는데, 이 구절 역시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이렇게 씁니다.
로마서 14:5-6 어떤 이는 어떤 날을 다른 날보다 낫게 크리노(심판/결정하다)하고 어떤 이는 모든 날을 크리노(심판/결정하다)한다. 각 사람이 자기 자신의 누스(지성, 영적영역)에서 충만히 확신을 가져라. 날을 프로네오(여기다/생각하다)하는 자는 주를 위해 프로네오(여기다/생각하다)하며, 날을 프로네오(여기다/생각하다)하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해 프로네오(여기다/생각하다)하지 않는다. 먹는 자는 주를 위해 먹으니 하나님께 감사하고,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해 먹지 않으며 하나님께 감사한다.
얼핏 보면 이 구절은 안식일 준수를 개인의 선택에 맡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특정한 날을 지키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똑같이 여기는데, 바울은 두 쪽을 다 받아들이는 듯합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에 있는 두 가지 사실을 알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첫째, 많은 영어 성경이 「모든 날을 같게」라고 번역하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같게’라는 낱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슈아 직역성경(YLV)은 이 낱말을 넣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쓴 글을 낱말 그대로 옮기면 「어떤 사람은 날보다 날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은 모든 날을 판단합니다」입니다. 번역자들은 문장을 매끄럽게 다듬으려고 ‘같게’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그 바람에 바울이 쓰지도 않은 뜻, 곧 모든 날이 똑같다는 생각이 구절 속에 슬그머니 들어오고 말았습니다.
둘째, 로마서 14장 어디에도 사바톤(안식일)이나 헤오르테(절기)라는 낱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만약 바울이 하나님께서 십계명에 직접 새기신 그날을 지키는 의무에서 신자들을 해방하려 했다면, 그날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은 채 그렇게 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장은 무엇을 다루고 있을까요? 바울은 첫머리에서 그 주제를 직접 알려 줍니다.
로마서 14:2 어떤 이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고 믿고, 약한 자는 채소만 먹는다.
주제는 먹는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유롭게 모든 것을 먹지만, 「약한」 다른 사람은 채소만 먹습니다. 그리고 5절에 나오는 날들은 이 먹는 문제와 단단히 맞물려 있습니다. 본문은 「먹는 자는 … 먹지 않는 자도」라고 말합니다. 자연스럽게 읽어 보면 이 날들은 먹고 먹지 않는 날, 곧 어떤 사람들이 금식하려고 스스로 정한 날들입니다. 이 장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십계명에 정해 두신 날을 각 사람의 개인적인 신념에 넘겨주었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어떻게 행했습니까
만약 골로새서 2장과 로마서 14장이 정하신 때가 다 끝났다는 뜻이었다면, 사도들도 당연히 그날들을 더 이상 지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2:1 펜테코스테(오순절)의 날이 다 찼을 때 그들이 모두 한 곳에 한마음으로 있었다.
성령께서는 토라의 절기인 오순절, 곧 칠칠절에 부어지셨고, 바로 그날 제자들은 「모두 한 곳에 한마음으로」 있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우리가 16장에서 보았듯이, 바울은 「할 수 있으면 오순절(펜테코스테) 날에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서두르며 바다를 건넜습니다(사도행전 20:16).
또한 바울은 민족들 가운데서 온 신자들로 가득한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며 「그러므로 … 헤오르타조(동사, 절기)를 지키자」라고 썼습니다(고린도전서 5:8). 우리는 이 구절을 7장에서 읽었습니다. 메시아께서 우리의 유월절이 되셨으므로 절기를 지키라고 말한 것이지, 절기가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림자는 바로 이렇게 작용합니다. 그림자는 지금도 드리워져 앞날을 가리키고 있으며, 메시아를 가장 잘 알았던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 그림자 속을 걸어갔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많은 독자의 마음에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사도들이 안식일과 절기를 지켰다면, 일요일에 예배한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는 사람들은 대개 드로아라는 도시의 어느 특별한 밤으로 눈을 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