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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성전 · 25장 / 전체 45장

바른 방향을 향한 열심

계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머지않아 조심스러운 충고를 듣게 마련입니다. 대개 친구가 진심으로 걱정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조심하게. 자기 열심으로 율법을 지키려다 보면 큰 문제가 생긴다네.”

결코 어리석은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부분 신앙에 열심인 사람들을 만나 본 적이 있고, 그중 몇몇은 곁에 있기조차 힘들었습니다. 남을 바로잡는 데는 빠르고 남의 말을 듣는 데는 더디며, 늘 스스로에게 조금은 흐뭇해하고 있었습니다. 열심이 낳는 결과가 그런 것이라면, 그 충고는 지혜롭게 들립니다. 신앙은 차분하게 지키고, 계명을 향한 열정은 약한 불에 올려 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충고를 받아들이기에 앞서, 말씀을 향한 열심에 관해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는지부터 물어보아야 합니다. 답은 분명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살려는 열심을 나무라는 구절은 단 한 절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

성경에서 가장 긴 시편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이 시편은 「여호와의 토라를 따라 걷는 자들」(시편 119:1)로 문을 엽니다. 그리고 몇 줄 뒤에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 119:4 당신께서 당신의 법도를 명하셔서, 우리가 그것을 철저히 지키게 하셨습니다.

「철저히 지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법도를 내어 주시면서, 편할 때만 지키라고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법도로 옮긴 낱말은 피쿠드(맡긴 일)인데, 누군가에게 지워 맡긴 구체적인 책무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맡기신 일을 철저히, 정성과 노력을 다해 지키라고 요구하십니다.

여러 세기가 지난 뒤, 바울은 디도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에서 바울은 메시아께서 도대체 왜 자신을 내어 주셨는지 설명합니다.

디도서 2:14 그분께서 모든 아노미아(토라없음)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자신을 위해 선한 행위들에 열심인 자기만의 소유된 백성을 정결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다.

이 문장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아노미아(토라없음)에서 우리를 구속하시」려고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18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아노미아는 하나님의 토라가 없는 삶을 뜻합니다. 이어서 목표가 나옵니다. 「선한 행위들에 열심인 자기만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십자가는 백성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을 열심 있게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열심은 복음이 경고하는 위험이 아닙니다. 복음이 바로 겨냥한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말을 다시 하는데, 거기서 쓰는 낱말은 한층 더 뜨겁습니다.

로마서 12:11 열심에서 게으르지 말고 프뉴마(영)에서 뜨겁게 하여 주를 섬겨라.

「프뉴마(영)에서 뜨겁게」 하라고 했습니다. 「뜨겁게」 뒤에 있는 헬라어 동사는 제오(끓다)인데, 끓다, 뜨겁다는 뜻입니다. 솥에서 물이 부글부글 끓을 때 쓰는 말입니다. 바울은 안전하게 가려면 영이 미지근한 채로 있으라고 독자들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끓으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걱정하던 갈라디아 교회에 이렇게 썼습니다.

갈라디아서 4:18 그러나 선한 것에서 열심을 받는 것은 항상 선하니,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만이 아니다.

여기서 쓰인 동사는 젤로오(열심으로 타오르다)입니다. 바울이 걱정한 것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열심이라는 점이 아니라, 무엇에 열심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선한 것에서」라면, 열심으로 구함을 받는 것은 「항상」 선하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말은 꼭 붙들어 둘 만합니다. 이 장 전체를 푸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지킨 한 청년

만일 계명을 향한 열심이 문제였다면, 그런 열심이 넘치는 사람을 만나셨을 때 예슈아께서 그 점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슈아께서는 그런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그 사람은 달려와 무릎을 꿇고 어떻게 해야 영생을 유업으로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예슈아께서 계명들을 들려주시자, 그 사람은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마가복음 10:20-21 그가 그분께 말했다: “선생님, 이 모든 것을 내가 어려서부터 지켜왔습니다.” 예슈아(예수)께서 그를 바라보시며 그를 사랑하여 말씀하셨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 사람은 「선생님, 이 모든 것을 내가 어려서부터 지켜왔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예슈아께서 누군가에게 너무 애쓰는 것이 네 문제라고 일러 주실 순간이 있었다면, 바로 이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슈아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마가는 「예슈아(예수)께서 그를 바라보시며 그를 사랑하여」라고 전합니다. 예슈아께서는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오랜 세월 정성껏 순종해 온 삶을 비웃거나 율법주의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일러 주셨는데, 그 한 가지는 계명을 향한 헌신을 줄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진 것을 내려놓고 와서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엔진과 도로

육백 마력짜리 강력한 엔진을 얹은 자동차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 엔진은 훌륭하게 만든 물건이며, 힘이 세다고 해서 악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결코 엔진의 힘이 너무 세냐가 아니라, 차가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경주용 트랙 위에서라면 그 엄청난 힘은 보는 이에게 즐거움을 줍니다. 하지만 북적이는 시장 한복판으로 몰고 들어간다면, 똑같은 힘이 끔찍한 피해를 낳습니다.

만일 그런 차가 시장으로 돌진했다면, 생각이 있는 사람 가운데 엔진이 잘못이니 뜯어내야 한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엔진은 그대로 두고, 운전자에게 운전대 잡는 법을 가르칠 것입니다.

성경이 열심을 다루는 방식이 바로 이러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열심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 열심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열심이 빗나가는 자리들을 살펴보면, 자동차가 도로를 벗어나는 세 가지 길이 드러납니다.

도로를 벗어나는 세 가지 길

첫째는 자기 자신의 의를 세우는 쪽으로 향한 열심입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을 두고 이렇게 썼습니다.

로마서 10:2-3 내가 그들에 대해 증언하니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으나 에피그노시스(신령한, 온전한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디카이오쉬네(의로움)를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들의 디카이오쉬네(의로움)를 세우려 하며 하나님의 디카이오쉬네(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지나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열심이 있다고 증언합니다. 문제는 그다음에 있습니다. 「에피그노시스(신령한, 온전한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들의 디카이오쉬네(의로움)를 세우려 하며」라는 것입니다. 엔진은 멀쩡했지만, 그 엔진이 그들을 스스로 만들어 낸 의 쪽으로 몰고 갔던 것입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을 겨냥한 열심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자기 안에서 겪어 알았습니다. 메시아를 만나기 전의 삶을 이야기하며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빌립보서 3:6 열심에 있어서는 에클레시아(불러내신-공동체)를 박해한 자요, 노모스(법) 안에 있는 디카이오쉬네(의로움)에 있어서는 흠 없는 자였다.

「열심에 있어서는 에클레시아(불러내신-공동체)를 박해한 자요.」 바울의 열심은 사람들을 겨누고 있었고, 그들을 해쳤습니다. 예슈아께서도 성전에서 기도하는 두 사람의 비유로 똑같은 모습을 그려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8:11-12 바리새인이 서서 속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 착취자들, 불의한 자들, 간음하는 자들 — 과 같지 않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나는 한 사바톤(레위기 23장의 모든 모에드를 지칭함)에 두 번 금식하고 내가 얻는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이 기도에서 문제는 금식이나 십일조가 아닙니다. 문제는 남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 과 같지 않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 이 사람의 열심은 잣대가 되었고, 그는 그 잣대를 이웃에게 들이대고 있었습니다.

셋째는 시기와 경쟁심에서 자라나는 열심입니다. 야고보는 이를 분명하게 그려 냈습니다.

야고보서 3:14-17 그러나 너희 카르디아(마음, 혼적영역) 안에 쓴 시기심과 이기적 야망이 있다면, 자랑하지 말고 알레데이아(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 소피아(지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이고 프쉬키케(혼-에 의한), 다이모니오데스(악령적인) 것이다. 시기심과 이기적 야망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비열한 일이 있다. 그러나 위에서 온 소피아(지혜)는 첫째로 순결하며,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분별 있고, 긍휼과 선한 열매들이 가득하며, 아디아크리토스(편파 없는)하고 위선이 없다.

「쓴 시기심과 이기적 야망」입니다. 야고보가 시기심이라는 뜻으로 쓴 헬라어 젤로스(시기, 열심)는 로마서 10장 2절과 빌립보서 3장 6절에서 「열심」으로 옮긴 바로 그 낱말입니다. 야고보는 경쟁심이 연료가 될 때 열심이 어떤 모습이 되는지 보여 주며, 그 출처를 「세상적이고 프쉬키케(혼-에 의한), 다이모니오데스(악령적인)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러고 나서 다른 종류, 곧 위에서 온 지혜를 설명하는데, 그것은 「첫째로 순결하며,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분별 있고, 긍휼과 선한 열매들이 가득하며」라고 합니다.

엔진은 그대로 두십시오

자기 의, 정죄, 시기라는 세 가지를 나란히 놓아 보십시오. 성경이 꾸짖는 것은 바로 이 세 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열심이 전혀 없는 사람 안에서도 얼마든지 자랄 수 있습니다. 미지근하게 교회만 오가는 사람도 교만하고 비판적이며 시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계명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는 사람에게 이 세 가지가 전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빗나간 열심을 고치는 길은 열심을 줄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방향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법도를 「철저히 지키게」 명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선한 행위들에 열심인」 백성을 빚어내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엔진은 그대로 두고, 운전대는 바른 손에 맡겨 하나님을 향하고 다른 이들의 유익을 향하게 하는 것, 곧 온유하고 긍휼이 가득한 쪽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이제 이야기는 바울에게로 이어집니다. 그는 일찍이 자기 자신을 두고 「열심에 있어서는 에클레시아(불러내신-공동체)를 박해한 자요」라고 썼던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이 바울이 마침내 그 열심을 토라 자체를 거스르는 쪽으로 돌려 유대교를 떠나고 기독교라는 새 종교를 세웠다고 믿습니다. 바울이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는 바울 자신의 말이 알려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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