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성전 · 24장 / 전체 45장
구별하라는 제사장의 사명
이끄는 사람의 자리는 왜 가장 무거울까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끄는 사람들에게 맡기신 일이 바로 이 구별을 가르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맡은 첫째 일
레위기 10:10-11 이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구별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통해 그들에게 말씀하신 그 모든 규례(호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기 위함이다.
이것이 제사장이 맡은 사명이었습니다. 구별하고, 그 구별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제사장들이 이 일을 해내지 못했을 때, 선지자들은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에스겔 22:26 그녀의 제사장들은 나의 토라를 범하고 나의 거룩한 것들을 더럽혔다. 그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않고,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의 차이를 알리지 않았으며, 내 샤밭들에서 자기 눈을 가렸다. 그래서 내가 그들 가운데서 더럽혀졌다.
장차 임할 왕국의 회복된 성전에서도, 제사장들이 할 일은 똑같은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겔 44:23 그들은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도록 가르치고,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알게 할 것이다.
아론의 날부터 에스겔의 꾸짖음을 거쳐 장차 올 왕국에 이르기까지, 이 일은 바뀌지 않습니다. 백성에게 그 차이를 가르쳐야 합니다.
예슈아와 야고보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무게를 둡니다.
마태복음 5:19 그러므로 이 가장 작은 계명들 가운데 하나라도 어기고 또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는 하늘들의 바실레이아(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라 불릴 것이나, 그것을 행하고 가르치는 자는 하늘들의 바실레이아(왕국)에서 크다 불릴 것이다.
야고보서 3:1 내 형제들이여, 많은 이들이 선생 되려고 하지 말라, 우리가 더 엄한 크리마(확정된-판결/판결문)를 받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그린 마지막 날의 모습
이제 이사야서의 마지막 장에 나오는 한 구절을 천천히 읽어 보십시오.
이사야 66:17 정원으로 가려고 자기를 거룩히 구별하고 정결케 하며, 가운데 선 자를 따라 돼지고기(바사르)와 가증한 것과 쥐를 먹는 자들이 함께 끝장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이 사람들은 신앙심이 없는 이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를 거룩히 구별하고 정결케 하」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어로 「카다쉬(거룩하게 구별하다)」와 「타헤르(정결하게 하다)」입니다. 예배하는 자리에 서서, 자기를 거룩하게 만든다고 믿는 일을 행합니다.
그런 다음 어떻게 하는지 보십시오. 「가운데 선 자를 따라」 행합니다. 한 사람이 한가운데 서 있고, 무리는 그를 따라가며 먹습니다.
이것이 고대 이스라엘에 관한 옛날이야기일 뿐일까요? 이어지는 구절들은 이 일이 언제 일어나는지 일러 줍니다.
이사야 66:18 나는 그들의 행위와 생각을 안다. 내가 모든 민족과 언어를 모으러 올 때가 오니, 그들이 와서 내 영광을 볼 것이다.
이사야 66:23 모든 살(바사르)이 초하루마다, 샤밭마다 내 앞에 경배하러 올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이때는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과 언어」를 모으시는 때입니다. 「모든 살(바사르)」이 「초하루마다, 샤밭마다」 하나님 앞에 경배하러 오는 때입니다. 이것이 그 배경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스스로 거룩하다고 부르는 사람들이 한가운데 있는 사람을 따라 돼지고기를 먹으며, 그들은 「함께 끝장날 것」입니다.
스바냐도 같은 때를 보았습니다.
스바냐 3:9 그때 내가 민족들에게 정결한 언어(사파)를 주어, 그들이 모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어깨로 그분을 섬기게 하겠다.
「정결한 언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베루라인데, 「체로 쳐서 가려내다, 정결하게 하다」라는 뜻의 바라르에서 나온 말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의 신자들에게 인용했던 이사야 52장 11절에서 이사야가 「너희를 깨끗이 하라」고 할 때 쓴 바로 그 낱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민족들을 모으실 때, 하나님께서는 체로 걸러져 깨끗해진 입술에서 나오는 경배를 받으실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서 따라오는 결론
사람이 무엇을 먹는가 하는 문제는 의롭다 함을 얻는 조건이 아닙니다. 의롭다 함은 은혜로, 믿음을 통해 얻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을 먹는지는 거룩한 장소, 그리고 거룩한 것들과 이어져 있습니다.
신약 성경이 성전이 서 있던 시대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 세상에서는 회당에서 토라를 읽거나, 성전에서 섬기거나, 에클레시아를 이끄는 사람 가운데 돼지고기를 먹는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토라는 부정한 상태에서 거룩한 것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신약 성경은 공동체를 성전이라 불렀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주님의 식탁에서 어떤 이들은 병들고 어떤 이들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별을 가르치는 일은 이끄는 사람의 몫입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성전이 서 있을 때 기록된 말씀들을 후대 교회의 눈으로 읽는 데 있습니다. 이사야 66장 17절을 그저 지나간 옛 역사로 접어 두는 동안, 바로 그 구절이 묘사하는 그대로 거룩한 모임이 인도되고 거룩한 말씀이 선포됩니다. 한가운데 있는 사람의 뒤를 따라 먹는 일은 개인의 사사로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더 엄한 판결을 받을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해 줍니다. 1세기의 에클레시아에서는 아무도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 질문을 던져야 하는 까닭은, 교회 안에서 돼지고기를 먹는 일이 너무나 예사로운 일이 되어 레위기 11장과 이사야 66장 17절을 읽으면서도 그 말씀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상상하기조차 어렵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이 글들을 썼습니다. 누구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 함께 말씀을 다시 마주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앞에 말씀을 펼쳐 놓으려는 것입니다.
안경 벗기
이 책의 이 부분 한가운데에는 안경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너무나 익숙해서 우리가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렌즈입니다.
초대 교회에 대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생각의 상당수가, 원래의 낱말들을 가려 버린 번역본들에서 나오고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지 한참 뒤에 벌어진 전쟁과 공의회 속에서 굳어진 분리에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가 그저 한가운데 있는 사람을 따라가느라 받아들인 것은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것들을 발견한다면, 본문이 말하는 바가 우리를 불편하게 할지라도 기꺼이 대가를 치르며 안경을 벗고 본문을 있는 그대로 읽으시겠습니까?
가르치는 자리에 있든 그렇지 않든, 야고보가 한 이 말은 마음에 새겨 둘 만합니다. 「우리가 더 엄한 크리마(확정된-판결/판결문)를 받을 것」입니다. 본문을 읽으십시오. 본문이 스스로 말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안경을 벗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