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성전 · 22장 / 전체 45장
왜 음식은 거룩함과 닿아 있는가
많은 사람이 토라의 음식 규례를 초기 건강 지침으로 여깁니다. 상한 돼지고기와 기생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배려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건강에 유익한 면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본문이 밝히는 목적은 그게 아닙니다. 음식 규례의 관심은 먹는 사람의 상태에 있습니다.
부정함은 사람을 부정하게 만든다
레위기 11:7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지만 새김질하지 않으니 너희에게 부정하다.
레위기 11:8 너희는 그것들의 살(고기, 바사르)을 먹으면 안 되고 그 사체에 닿으면 안 된다. 그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다.
「부정하다」라는 말은 「타메(부정한)」입니다. 그리고 이 부정함은 짐승 안에만 머물지 않고, 그것을 먹는 사람에게로 옮겨 갑니다.
레위기 11:43-44 너희는 우글거리는 어떤 기는 것으로도 너희 자신(네페쉬)을 혐오스럽게 만들면 안 되고, 그것들로 너희를 더럽혀 부정해지면 안 된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해져야 한다. 내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땅에서 기어 다니는 어떤 기는 것으로도 너희 자신(네페쉬)을 더럽히면 안 된다.
「너희 자신(네페쉬)을 혐오스럽게 만들면 안 되고」 「그것들로 너희를 더럽혀 부정해지면 안 된다.」 사람이 무엇을 먹는지는 그 사람 자신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들 한가운데에는 많은 독자에게 익숙한 문장이 있습니다. 「거룩해져야 한다. 내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민족들 가운데 흩어져 사는 신자들에게 이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16 “거룩하라, 이는 내가 거룩하기 때문이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부정한 채로 거룩한 곳에 들어갈 수 없다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때때로 부정해지기 마련입니다. 주검을 만지거나, 피부병이 생기거나, 몸에서 유출물이 나올 때가 그렇습니다. 토라는 부정해지는 일 자체를 범죄로 다루지 않습니다. 토라가 경계하는 것은 부정한 상태로 거룩한 것에 다가가는 일입니다.
고압 전선을 떠올려 보십시오. 전기는 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에 흠뻑 젖은 사람이 고압 전선을 붙잡는다면, 그 접촉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토라가 거룩함과 부정함을 말하는 방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둘이 맞닿으면 파멸을 피할 수 없습니다.
레위기 7:21 누구든지(네페쉬) 부정한 것에 닿되, 아담의 부정한 것이나 부정한 가축이나 어떤 부정한 혐오스러운 것에 닿고도 여호와의 것인 화목제물의 살(고기, 바사르)을 먹으면, 그 사람(네페쉬)이 자기 백성에게서 끊어진다.
「끊어진다.」 히브리어로는 「카라트(베어 내다, 단절하다)」입니다.
레위기 15:31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부정함에서 떼어 놓아, 그들 가운데 있는 나의 성막(미쉬칸)을 더럽혀 그들이 자기 부정함 가운데서 죽지 않게 하여라.
「그들이 자기 부정함 가운데서 죽지 않게」
민수기 5:2-3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나병 환자와 유출병이 있는 모든 자와 주검(네페쉬)으로 인해 부정해진 모든 자를 진영에서 내보내게 하여라. 남자든 여자든 다 내보내되,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의 진영을 더럽히지 않게 하여라.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기 때문이다.
「진영 밖으로.」 그 이유도 분명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기 때문이다.」
민수기 19:20 그러나 부정해지고도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쉬)은 여호와의 성소(미쉬칸)를 더럽혔으므로, 그 혼(네페쉬)이 총회 가운데서 끊어질 것이다. 부정을 씻는 물이 그에게 뿌려지지 않았으니 그는 부정하다.
이 모든 명령의 바탕에는 한 가지 이유가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시며, 부정한 것은 거룩하신 분의 임재 앞에 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21장에서 바울이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자신을 정결하게 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그 전류가 어떻게 흐르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성전이 없지 않은가”
여기서 자연스럽게 반문이 뒤따릅니다. 그 모든 규례는 예루살렘에 성전 건물이 서 있던 시절에 이스라엘에게나 해당하던 이야기가 아닌가? 지금 우리에게는 성전이 없고 교회가 있을 뿐인데, 거룩한 곳에 다가가는 규례가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는가?
신약성경은 신자들의 공동체를 친목 모임처럼 다루지 않습니다. 그 공동체를 가리켜 성전이라 부르며, 성전의 정결함을 그 공동체에 그대로 적용합니다.
고린도후서 6:16-17 하나님의 나오스(성전)와 우상들에 무슨 슁카타데시스(동의/결합)가 있겠는가? 여러분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나오스(성전)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 “내가 그들 안에 거하고 그들 가운데 엠페리파테오(거닐다/두루행하다)하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서 나와 분리되어, 주가 말씀하시나니,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받아들일 것이다.”
바울은 지금 대부분 이교도 출신으로 이루어진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나오스, 곧 가장 안쪽 성소라고 부릅니다. 그러고 나서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사야 52:11 떠나라, 떠나라, 거기서 나오라,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마라! 그 가운데서 나와 너희를 깨끗이 하라,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아.
본래 이사야는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건넸는데, 바울은 그 말씀을 고린도의 헬라인들에게 건네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고린도후서 7:1 그러므로 사랑받는 이들이여, 이 약속들을 가졌으니 우리 자신을 사르크스(육체)와 프뉴마(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가자.
식탁과 제단
고린도에서는 주의 식탁에 나아가는 방식 때문에 사람들이 병들고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8 사르크스(육체)를 따른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은 제단에 코이노노이(참여자들)가 아닌가?
바울은 주의 식탁을 예루살렘의 제단에 견줍니다. 그 식탁에서 먹는 것은 곧 제단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1:28-30 그러나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살펴보게 하고, 그리하여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시게 하라. 이는 먹고 마시는 자가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면, 주의 몸을 디아크리노(능동: 분별하다)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크리마(확정된-판결/판결문)를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많은 이들이 연약하고 병들며, 상당수가 잠들었다.
「크리마(확정된-판결/판결문)」 「연약하고 병들며, 상당수가 잠들었다.」 여기서 잠든다는 말은 죽음을 완곡하게 이르는 바울의 표현입니다.
레위기 7장과 고린도전서 11장은 나란히 서 있습니다. 부정한 채로 거룩한 제물을 먹는 사람은 끊어집니다. 몸을 분별하지 않고 주의 식탁에서 먹는 사람은 자기에게 내리는 판결을 먹는 셈입니다. 하나는 돌로 만든 제단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정집의 식탁이었지만, 둘 모두에 똑같은 전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질문 너머의 본래 질문
그러므로 본래의 질문은 돼지고기가 건강에 해로운가 하는 문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본래의 질문은 사람이 부정한 채로 거룩한 것에 다가가도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 토라는 아니라고 답합니다. 신약성경 역시 성전이라 부르는 공동체를 향해, 그리고 제단에 견주는 식탁을 두고 똑같이 아니라고 답합니다.
여기서 1세기와 관련된 실제적인 물음 하나가 생깁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면, 당시 외부인은 과연 얼마나 가까이 다가올 수 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