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성전 · 21장 / 전체 45장
신약이 기록된 그 세계
“돼지고기를 먹든 안 먹든 개인의 양심에 달린 일입니다. 목사가 무엇을 먹는지는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언뜻 듣기에는 이치에 맞는 말 같지만, 여기에는 숨겨진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성전이 무너지고 교회와 회당이 갈라선 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의 교회 모습을 가져다가, 신약이 기록되던 시대에 그대로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식 이야기를 꺼내기에 앞서, 먼저 신약을 그 글이 쓰인 본래의 세계로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성전은 여전히 서 있었습니다
예슈아께서는 성전이 무너질 일을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일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1-2 예슈아(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 제자들이 그분께 나아와 성전 건물들을 보여드렸다. 예슈아(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들을 모두 보는가? 아멘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모두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신약의 어느 책도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예슈아께서 예고하신 대로 성전이 무너졌다고 전하는 책은 단 한 권도 없습니다. 오히려 히브리서는 성전 봉사를 그 글을 쓰던 당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일로 말합니다.
히브리서 8:4 그분이 땅에 계셨다면 제사장도 되지 못하셨을 것이니, 노모스(법)에 따라 도론(예물/봉헌물)들을 드리는 제사장들이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9:8-9 이것은 하기오(거룩한) 프뉴마(영)께서 지시하시는 것이니, 첫 번째 성막이 아직 서 있는 동안에는 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음을 보이심이다. 이것은 현재의 카이로스(정해진-때)를 위한 비유이니, 이 카이로스(정해진-때)에 도론(예물/봉헌물)들과 제사들이 드려지나, 섬기는 이를 양심에 관해 완전하게 하지 못한다.
히브리서 10:11 또 모든 제사장은 날마다 서서 레이투르기아(제사장-섬김)를 행하며 죄를 결코 제거할 수 없는 동일한 제사들을 반복해서 드리지만,
「… 드리는 제사장들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성막이 아직 서 있는 동안」 「이것은 현재의 카이로스(정해진-때)를 위한 비유이니, 이 카이로스(정해진-때)에 도론(예물/봉헌물)들과 제사들이 드려지나」 「모든 제사장은 날마다 서서」 헬라어 본문에서 이 표현들은 모두 글이 쓰이던 시점에 실제로 진행 중인 일을 가리킵니다. 기록자는 여전히 제사가 드려지고 있는 성전을 바라보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에서 살아 가르치는 모습으로 끝을 맺습니다.
사도행전 28:30-31 바울은 만 이 년 동안 자기가 세 낸 집에 머물며 그에게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하나님의 바실레이아(왕국)를 선포하고 주 예슈아(예수) 메시아(그리스도)에 관한 것들을 아무 방해도 없이 파레시아(담대함)로 가르쳤다.
사도행전은 62년에 야고보가 죽은 일도, 64년에 일어난 네로의 박해도, 바울이 처형된 일도, 70년에 성전이 함락된 일도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기록 시기를 두고 논의가 이어지는 요한계시록을 제외하면, 신약은 성전이 서 있고 제사장들이 날마다 제사를 드리며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모세의 글을 소리 내어 읽던 세계에서 기록되었습니다.
그 글들을 2세기나 3세기의 세계로 옮겨 놓고 읽으면, 본래 본문에 없던 내용들을 읽어 내기 시작합니다.
누가 거룩한 직무를 맡았습니까
그 세계에서 누가 회당에서 토라를 읽고, 누가 성전에서 섬기며, 누가 에클레시아를 이끌었습니까? 신약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4:16-17 그리고 그가 자라나신 나사렛으로 오셔서, 자기 관례대로 사바톤(레위기 23장의 모든 모에드를 지칭함)들에 회당으로 들어가시어 읽으려고 일어서셨다. 그리고 선지자 이사야의 두루마리가 그에게 전달되었고, 두루마리를 펴시자 이렇게 기록된 곳을 찾으셨으니,
예슈아께서는 「자기 관례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서서 두루마리를 건네받으십니다.
사도행전 6:7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게 널리 퍼져 가고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의 수가 매우 많아졌으며, 제사장들의 큰 무리도 믿음에 순종했다.
성전에서 일하며 제물을 다루고 엄격한 정결 규례에 따라 살던 사람들인 「제사장들의 큰 무리」가 믿음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0:14 베드로가 말했다. “주님,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코이노스(공통적인, 세상적인)하거나 아카타르토스(부정한, 불결한)한 것은 어떤 것도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지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으뜸 사도인 베드로는 환상 중에 주님께 자신이 코이노스(속된 것)나 아카타르토스(부정한 것)를 결코 먹은 적이 없다고 아룁니다. 나중에 그는 그 환상이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며, 어떤 사람도 부정하다고 불러서는 안 된다는 뜻임을 깨달았습니다(사도행전 10:28). 베드로가 자신이 먹던 음식을 바꾸었다는 말은 본문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도행전 21:26 바울이 그 사람들을 데려다 이튿날 그들과 함께 정결 예식을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 각 사람을 위해 예물이 드려질 때까지의 정결 기간이 언제 끝나는지를 알렸다.
바울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을 정결하게 합니다.
사도행전 24:14 그러나 이것은 인정합니다. 나는 그들이 하이레시스(분파/종파)라고 말하는 그 도를 따라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을 섬기며, 노모스(법)와 예언자들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습니다.
사도행전 25:8 바울이 변명했다. “나는 유대인의 노모스(법)에도 성전에도 황제에게도 아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재판정에 선 바울은 토라와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으며, 토라나 성전을 거슬러 아무 죄도 짓지 않았다고 밝힙니다.
돼지고기가 뜻하던 것
그 세계를 살던 사람들에게 돼지고기가 어떤 의미였는지 이해하려면 한 절기를 알아야 합니다. 예슈아께서도 그 절기에 성전에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0:22-23 예루살렘에서 하누카(봉헌-절기)가 되었고, 겨울이었다. 예슈아(예수)께서 성전에 있는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고 계셨다.
이 봉헌 절기가 하누카이며, 이 절기가 기억하는 사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원전 167년, 스스로를 에피파네스라 부른 헬라 왕 안티오코스 4세가 이스라엘의 신앙을 뿌리 뽑으려 했습니다. 마카베오서에 따르면, 그는 성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제단 위에 우상의 제단을 세우고 돼지를 제물로 바치라 명했으며, 그 집을 올림포스의 제우스에게 바쳤습니다. 온 땅에서 왕의 관리들이 백성에게 돼지고기를 억지로 먹였습니다.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어머니들은 아기와 함께 처형당했습니다. 엘르아살이라는 아흔 살의 늙은 서기관은 돼지고기를 삼키기보다 매 맞아 죽는 길을 택했습니다. 한 어머니는 일곱 아들이 똑같이 거절하다가 차례로 고문당하고 죽임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백성은 목숨을 걸고 맞섰습니다. 이어진 전쟁 끝에 백성은 성전을 되찾아 정결하게 하고 다시 봉헌했습니다. 이것이 하누카입니다.
그 역사를 거치며 돼지고기가 어떤 의미를 띠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돼지고기를 먹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 조상들을 둔 백성에게, 돼지고기는 결코 식단에서 가볍게 고를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교 제국에 억지로 굴복했다는 표시였고, 하나님의 집이 더럽혀진 일의 표시였습니다. 그리고 예슈아께서는 바로 그 사건을 기억하는 절기에 성전 안에 서 계셨습니다.
그 세계의 상식
그러므로 1세기에는 이것이 당연한 상식이었습니다.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이 회당에 서서 토라를 읽는 일은 없었습니다.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이 성전에서 섬기는 일도 없었습니다.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이 에클레시아를 이끌며 거룩한 직무를 수행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 세계에서는 그런 사람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신약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목사가 무엇을 먹는지는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라는 말은 신약의 세계에서 나온 문장이 아닙니다. 신약이 실제보다 더 훗날에 쓰인 것처럼 읽을 때에야 나올 수 있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음식은 도대체 왜 거룩함과 관련이 있습니까? 그 답을 얻으려면 근원인 레위기로 돌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