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과 얼굴로 · 33장 / 전체 41장
힘으로 빼앗는 나라
순서의 첫 단계는 태어나는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출생이었습니다. 둘째 단계는 얼핏 보면 그 반대처럼 보입니다. 예슈아께서는 침례자 요한에 관해 무리에게 말씀하시면서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12 침례자 요한의 날들부터 지금까지 하늘들의 바실레이아(왕국)는 힘있게 밀고 나아가고 있고, 힘쓰는 자들이 그것을 붙잡는다.
예슈아의 이 말씀은 여러 가지로 읽혀 왔으므로, 먼저 이 구절의 어려움을 공정하게 짚어 두어야 합니다.
태의 문제
앞부분의 동사는 비아제타이로, 「힘을 쓰다」라는 뜻의 비아조마이에서 왔습니다. 헬라어는 현재 시제에서 중간태와 수동태를 똑같은 형태로 쓰기 때문에, 형태만으로는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습니다.
중간태로 읽으면, 이 동사는 나라 자체가 힘 있게 밀고 나아가는 모습을 그립니다. YLV 는 이렇게 옮깁니다. “하늘들의 바실레이아(왕국)는 힘있게 밀고 나아가고 있고.” 수동태로 읽으면, 나라는 「폭력을 당하는」 것, 곧 힘에 의해 행함을 받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YLV 의 기준 본문인 비잔틴 다수 본문(로빈슨–피어폰트 2018)은 이 형태를 수동태로 표시합니다. 또 적지 않은 주석가들이 뒷부분의 명사 비아스타이를 나쁜 뜻의 난폭한 사람들, 곧 나라를 그릇되게 빼앗으려는 사람들로 봅니다.
이 해석들은 모두 신중한 독자들이 지지해 온 것입니다. 이 책은 태를 결정하려 하지 않으며, 이 책의 논증도 태가 결정될 필요가 없습니다. 단계의 순서는 마태복음 11:12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3:3에서 나옵니다. 거기서 예슈아께서는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나라를 볼 수조차 없다고 하셨습니다. 비아제타이의 태가 무엇이든, 이 구절에서 확실히 얻을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구절이 말하는 붙듦은 어떤 것이든 출생 뒤에 온다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붙드는 사람들
구절의 뒷부분에는 그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명사는 「힘쓰는 자들」인 비아스타이이고, 동사는 「붙잡다, 힘으로 빼앗아 가다」라는 뜻의 하르파조에서 온 하르파주신입니다. 이 동사는 현재 능동태입니다. 앞의 동사와 달리 형태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붙드는 이들은 사람이며, 그들이 붙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다른 자리에서 나온 같은 결의 말씀을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16:16 노모스(법)와 예언자들은 요한까지 선포되었고, 그때부터 하나님의 바실레이아(왕국)의 복음이 전파되어 모든 이가 그리로 강하게 밀고 들어간다.
여기서도 동사는 같은 비아제타이이며, 주어가 분명합니다. “모든 이가 그리로 강하게 밀고 들어간다.” 밀고 들어가는 이는 사람이고, 그가 밀고 들어가는 곳은 전파되고 있는 나라입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비아조마이는 마태복음 11:12과 누가복음 16:16, 단 두 번 나옵니다. 「힘쓰는 자」인 비아스테스는 마태복음 11:12에 단 한 번 나옵니다. 이렇게 드물게 쓰였다는 것이 무언가를 말해 줍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편지 곳곳에서 되풀이되는, 따라야 할 프로그램 같은 가르침이 아닙니다. 한 번 던져진 장면, 곧 나라를 볼 눈을 받은 사람들이 그 나라를 그냥 지나가게 두지 않을 때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주는 그림입니다.
얍복의 밤
성경은 그 그림을 이미 몸으로 살아 낸 한 사람을 보여 줍니다. 동이 터 오를 때, 얍복에서였습니다.
창세기 32:27 그가 말했다. “동이 트니 나를 보내라.” 야곱이 말했다.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마태가 쓴 동사가 그리는 바로 그 행동입니다. 그 동사가 기록되기 훨씬 전의 일입니다. 야곱은 밤새도록 한 사람(이쉬)과 씨름했는데, 그는 나중에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의 허벅지 관절은 어긋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붙들고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이 하나님과 야곱 사이의 이야기의 시작은 아닙니다. 여러 해 전 벧엘에서 여호와께서 꿈에 그 위에 서서 그에게 말씀하셨고, 그는 거기서 서원했습니다. 더 최근에는 하나님의 사자가 또 다른 꿈에서 그에게 “나는 … 벧엘의 하나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알기 시작하려고 어둠 속에서 낯선 이를 붙든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에게 말씀하셨고 이미 그를 지켜 주신 분을 붙든 것입니다. 그의 붙듦은 만남 뒤에 왔지, 만남 앞에 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밀고 들어가는 일은 참되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그분을 만났고, 이미 보는 눈을 받았고, 이미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그곳에 이르는 방법이 아닙니다.
붙듦과 절뚝거림
밀고 들어가는 일이 첫자리에 설 수 없는 둘째 까닭이 있는데, 그것은 야곱의 몸에 새겨져 있습니다. 7장에서 보았듯이, 해는 “자기 허벅지로 인하여 절뚝거렸다”(창세기 32:32)고 기록된 사람 위에 떠올랐습니다. 붙드는 힘은 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실이 둘째 단계를 제자리에 둡니다.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참으로 밀고 들어가고, 놓지 않으려 하며, 전파되는 나라를 붙듭니다. 그러나 그 붙듦이 기초는 아닙니다. 다른 무언가가 먼저 그를 붙들고 있습니다.
힘쓰는 자들이 나라를 붙잡는 일을 그리는 바로 그 동사 하르파조가, 요한복음에 있는 예슈아의 다른 말씀에도 나옵니다.
요한복음 10:28-29 나는 그것들[양들]에게 영원한 조에(생명)를 주고, 그것들[양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으며, 아무도 그것들[양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양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며,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거기서도 동사는 같습니다.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나라를 붙잡을 수 있지만, 아들의 손에서나 아버지의 손에서 양을 빼앗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태어난 사람이 힘써 붙드는 일은 참되지만, 그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손은 그의 손이 아닙니다.
문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한 분을 붙드는 것
쉽게 오해할 수 있는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마태복음 11:12의 밀고 들어감은 닫힌 무언가를 부수고 들어가는 일이 아닙니다. 야곱은 잠긴 문을 억지로 열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 분을 붙들고, 그분께 복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이 구분이 곧바로 순서의 셋째 단계로 이어집니다. 나라에는 들어가는 길이 있고, 그 길은 두들겨 부수어 여는 것이 아닙니다. 예슈아께서는 그것을 문이라 부르셨고, 그 문이 누구인지 말씀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