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표적 · 45장 / 전체 47장
콰르토데시만(14일파)
유월절 주간을 요일이 아니라 절기의 날짜로 지키는 것은, 옛것을 흔들려고 들여온 새 생각이 아닙니다. 그 뿌리는 1세기와 2세기로, 시대로 보아 사도들과 가까웠고 자기들의 관습을 사도들에게서 받았다고 말한 교회들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교회사는 그들을 라틴어 콰르타 데키마, 곧 「열넷째」라는 말에서 따와 콰르토데시만(14일파)이라고 부릅니다.
열나흗날
14일파는 초기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로, 무엇보다 아시아 속주, 곧 오늘날 튀르키예의 서부 지역에 많았습니다. 그들은 예슈아의 죽음과 부활을 기리는 해마다의 절기인 파스카를 날짜로 지켰습니다. 첫째 달 열나흗날이 그것이며, 그날이 무슨 요일에 오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4세기 초에 글을 쓴 가이사랴의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그들을 이렇게 전합니다. 온 아시아의 교회들은 “더 오래된 전통에 따라” “유대인들이 어린양을 잡으라고 명령받은 달의 열나흗날을 구주의 유월절 절기로 지켜야 한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교회사』 5.23). 그들은 토라가 정한 날짜를 따랐습니다. “첫째 달 그달 열나흘 그 저녁들(하아르바임) 사이는 여호와의 유월절이다”(레위기 23:5).
유세비우스 자신은 다른 관습을 지켰지만, 양쪽을 공정하게 전합니다. 그는 세상 다른 곳의 교회들은 부활의 날에 금식을 끝냈으며, 그들 역시 사도의 전통에 기댔다고 적습니다. 그러니 양쪽 모두 사도들을 내세운 셈입니다. 이 장이 묻는 것은 더 좁습니다. 요한에게 가장 가까웠던 교회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받았다고 말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서머나의 폴리카르포스
열나흗날을 지킨 사람 가운데 서머나의 감독 폴리카르포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2세기 중엽에 순교했습니다. 리옹의 이레나이우스는 어린 시절 폴리카르포스의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훗날 폴리카르포스가 요한과 함께, 그리고 주님을 본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낸 일을 곧잘 이야기하던 모습을 회상했습니다(유세비우스 5.20).
이레나이우스는 또 폴리카르포스가 로마를 찾아간 일도 기록합니다. 아니케투스가 로마 교회를 이끌던 때였습니다. 두 사람은 파스카에 대해 생각이 달랐고, 어느 쪽도 상대를 돌려세우지 못했습니다. 이레나이우스의 말로 하면, 아니케투스는 폴리카르포스를 설득하여 “우리 주의 제자 요한과, 그가 함께 지낸 다른 사도들과 더불어 늘 지켜 온 것을 지키지 않게” 할 수 없었습니다(유세비우스 5.24). 그런데도 두 사람은 화평을 지켰고, 헤어지기 전에 아니케투스는 자기 교회에서 폴리카르포스가 주의 만찬을 인도하도록 존중을 표했습니다.
폴리크라테스가 빅토르에게 쓴 편지
몇십 년 뒤 그 문제가 다시 일어났고, 이번에는 덜 부드러웠습니다. 190년 무렵, 로마의 감독 빅토르는 아시아의 교회들에게 열나흗날을 버리고, 다른 곳의 회의들이 정한 대로 부활 절기를 오직 주님의 날에만 지키라고 압박했습니다. 에베소의 감독 폴리크라테스는 빅토르의 요청대로 아시아의 감독들을 모았고, 그들을 대신하여 답장을 썼습니다. 유세비우스가 그 편지를 남겨 두었습니다(『교회사』 5.24).
편지는 머뭇거림 없이 시작합니다. “우리는 정확한 날을 지킵니다. 더하지도 빼지도 않습니다.” 이어서 폴리크라테스는 지금은 잠든 아시아의 「큰 빛들」을 하나하나 부릅니다. 그가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라고 부르는 빌립, “주님의 품에 기대었던” 사람으로 에베소에서 잠든 요한, 서머나의 감독이자 순교자인 폴리카르포스, 그리고 다른 이들입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분들은 모두 복음에 따라 유월절 열나흗날을 지켰으며, 어느 점에서도 벗어나지 않고 믿음의 규범을 따랐습니다.”
그는 자기 친척 일곱 사람이 자기보다 앞서 감독이었고 자기가 여덟째라고 하며, “내 친척들은 늘 백성이 누룩을 치우던 날을 지켰습니다”라고 덧붙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위협에 겁먹지 않는다고 말하며 편지를 맺습니다. “나보다 큰 분들이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베드로와 사도들이 예루살렘의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 앞에서 한 말을 따온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5:29 베드로와 아포스톨로스(사도)들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 편지가 보여 주는 것
이 편지는 분명한 증언입니다. 2세기 에베소의 감독이, 자기 교회들은 요일이 아니라 정확한 날짜, 곧 열나흗날에 파스카를 지켰다고 말하며, 그 관습을 폴리카르포스를 거쳐 요한과 빌립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 밝힙니다. 열나흗날은 유월절 바로 그날입니다. 요한이 기록한 대로, 예슈아께서 숨을 거두실 때에는 아직 오지 않았고, 그분의 몸이 무덤에 누인 뒤에 시작된 날입니다.
누룩에 관한 그의 말도 같은 그림에 맞습니다. 폴리크라테스는 열나흗날을 「백성이 누룩을 치우던 날」이라고 부르며, 그날을 무교의 날들이 시작되는 날로 가리킵니다. 20장에서 보았듯이, 집안의 마지막 누룩 든 식사는 열사흗날이 시작될 때 있었고, 열사흗날 낮에 집을 치웠으며, 열나흗날을 여는 저녁부터는 누룩 든 것을 먹지 않았습니다. 폴리크라테스는 이 관습을 조상들에게서 이어받았습니다.
빅토르와 이레나이우스
빅토르의 대응은 가혹했습니다. 유세비우스는 그가 “곧바로 온 아시아의 교구들을 공동의 일치에서 잘라 내려 했고” 그들을 파문한다고 선언했다고 적습니다. 많은 감독이 그 일로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 가운데 이레나이우스가 있었는데, 그 자신은 부활 절기를 주님의 날에 지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빅토르에게, 옛 관습의 전통을 지킨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교회들을 통째로 잘라 내서는 안 된다고 편지했고, 그보다 앞선 로마의 감독들이 열나흗날을 지키는 사람들과 화평을 지켰다는 것을 일깨웠습니다. 이레나이우스가 폴리카르포스와 아니케투스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 바로 이 편지에서였습니다.
니케아 이후
문제는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325년 니케아에 모인 감독들은 모든 교회가 같은 한 날에 파스카를 지키기로 합의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가 남긴, 공의회가 알렉산드리아 교회에 보낸 편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지킬 때에 이 절기를 지켜 온 동방의 모든 형제들은 이제부터 로마인들과 우리를 따를 것입니다”(『교회사』 1.9). 그때부터 여전히 열나흗날을 지키는 사람들은 교회의 규범 밖에 선 사람들로 취급되었고, 그들에게 씌워진 혐의는 유대인들을 따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같은 역사가는 5세기에 글을 쓰면서,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가 아시아와 에베소를 방문했을 때 14일파의 많은 사람에게서 교회를 빼앗았다고 기록합니다(6.11). 또 428년에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된 네스토리우스가 아시아와 루디아와 카리아 전역의 14일파를 공격했고, 그 뒤 밀레도와 사데에서 일어난 소요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고 기록합니다(7.29). 열나흗날을 지키는 일은 5세기까지도 살아 있었고, 그때까지도 밀려나고 있었습니다.
뒷날 지어낸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감독의 수를 세어 논쟁에서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 자체로 섭니다. 그러나 앞선 장들을 따라온 독자라면, 초대 교회에 유월절 주간을 절기의 날짜로 지킨 사람이 정말 있었는지 궁금했을지 모릅니다. 답은 「그렇다」입니다. 자기들의 가르침이 요한에게서 왔다고 밝힌 교회들이 열나흗날을 지켰습니다. 폴리크라테스가 「백성이 누룩을 치우던 날」이라고 부른 날, 누룩을 먹지 않기 시작한 날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로마가 요구했을 때에도 그날을 버리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들의 증언은 한 곳에 더 남아 있습니다. 날짜가 아니라 식탁 위의 빵입니다. 다음 장이 그것을 다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