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에서 자유? · 17장 / 전체 41장
로마서 14장 4절과 형제를 바로잡아 주는 일
남을 판단하는 태도는 교회 안에서 참으로 큰 해를 끼칩니다. 우리 대다수는 남의 허물을 살피고, 형제마다 저울질하여 모자란다고 여기며, 그 일을 은근히 즐기는 듯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은 신선한 바람처럼 들립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께서 다루십니다. 그들이 죄를 짓더라도 판단하지 마십시오(로마서 14장 4절). 성경을 죄와 율법만으로 엮으면 이상한 모습이 됩니다. 성경이 제대로 통하려면 은혜로 엮어야 합니다.”
이 말에는 참된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녀들을 다루시며, 가혹하게 남의 허물을 찾는 태도는 그릇된 것이고, 은혜를 빼놓고 성경을 읽으면 실제로 이상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주장은 진지하게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먼저 그 주장이 근거로 삼은 성경 구절을 살펴보고, 이어서 성경을 실로 꿰는 비유를 짚어 보겠습니다.
로마서 14장 4절 전문
그 구절은 이러합니다.
로마서 14:4 남의 종을 크리노(심판/결정하다)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그가 서거나 넘어지는 것은 자기 주인에게 달린 일이다. 그는 서게 될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그를 세우실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집안 종을 뜻하는 오이케테스(집안 하인)는 남의 집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 주인에게 속해 있고, 「그가 서거나 넘어지는 것은 자기 주인에게 달린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에서 서거나 넘어집니까? 어떤 성경 구절도 맥락에서 홀로 떨어져 있지 않으며, 로마서 14장은 첫머리에서부터 무엇을 다루는지 분명히 밝힙니다.
로마서 14:1-2 믿음에 약한 자를 받아들이되 디알로기스모이(추론들)의 디아크리시스(분별)를 위해서가 아니다. 어떤 이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고 믿고, 약한 자는 채소만 먹는다.
디아크리시스(분별)는 구별하고 판결을 내리는 행위를 뜻합니다. 바울은 믿음이 약한 형제를 받아들이되, 서로 사귀는 자리를 그의 견해를 판가름하는 법정으로 만들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고는 자기가 뜻하는 견해가 어떤 종류인지 바로 밝힙니다. 「어떤 이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고 믿고, 약한 자는 채소만 먹는다.」
이것이 로마서 14장이 다루는 영역입니다. 곧 채소만 먹을 것인가 하는 문제처럼 서로 생각이 갈리는 사안입니다. 로마서 14장 전체는 30장에서 더 자세히 읽겠지만, 여기서는 첫 두 구절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러한 영역에서는 남의 종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지 말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의 주인이 그를 세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선 주장은 이 구절을 본래 자리에서 뽑아내어 전혀 다른 곳에 심어 놓으며 “그들이 죄를 짓더라도 판단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로마서 14장은 죄 가운데 사는 형제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채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죄를 짓는 형제에 대하여
죄를 짓는 형제를 다룰 때 성경은 전혀 다르게 말합니다. 예슈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8:15 네 형제가 네게 죄를 지으면, 가서 그를 너와 그 사람 단 둘이서만 있는 곳에서 책망하라 —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다.
예슈아께서는 “그를 하나님께 맡겨 두어라” 하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단둘이 만나 조용하고 온유하게 이르되, 반드시 찾아가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그 목적도 분명히 밝히십니다.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다.」
이 가르침은 예슈아께서 새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토라에 나와 있습니다.
레위기 19:17 네 마음으로 네 형제를 미워하면 안 된다. 네 이웃을 분명히 책망하여, 그로 인해 죄를 짊어지지 말아라.
이 구절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 보십시오. 「네 마음으로 네 형제를 미워하면 안 된다」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 구체적인 길을 일러 줍니다. 「네 이웃을 분명히 책망하여」. 토라의 시각에서 볼 때, 형제가 죄짓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결코 친절이 아닙니다. 오히려 미움 바로 곁에 자리한 태도입니다. 이 구절은 침묵하는 사람에게 주는 경고로 끝을 맺습니다. 「그로 인해 죄를 짊어지지 말아라.」
바울도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똑같이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6:1 형제들이여,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잘못에 사로잡히더라도, 프뉴마티코이(영적인 이들)인 여러분이 온유의 프뉴마(영)로 그러한 자를 회복시키되, 너 자신도 시험을 받지 않도록 네 자신을 살피라.
영적인 사람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형제를 회복시키는 사람이며, 자기 자신을 살피면서 「온유의 프뉴마(영)로」 그 일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야고보 역시 편지 전체를 같은 어조로 마무리합니다.
야고보서 5:19-20 형제들이여, 너희 중에 누가 알레데이아(진리)에서 떠나 헤맬 때 누가 그를 돌아오게 하면, 죄인을 그의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는 이는 프쉬케(혼)를 죽음에서 구원하고 많은 죄들을 덮을 것임을 알라.
「프쉬케(혼)를 죽음에서 구원하고」. 지금 걸려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길 잃고 헤매는 형제를 돌이키는 일은 로마서 14장이 금하는 의미의 판단이 아닙니다. 그 형제의 생명을 구하는 일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두 가지 다른 사안을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서로 견해가 갈리는 문제에서는 남의 종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에서는 형제를 사랑하기에 그에게 찾아가 타일러 꾸짖고, 바로잡아 주며, 돌이키게 해야 합니다.
구슬 꿰기
이제 앞서 소개한 주장이 든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실로 꿰어야 하는 구슬과 같아서 반드시 은혜라는 실로 꿰어야 하며, 죄와 율법이라는 실로만 꿰면 이상한 목걸이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은혜로 꿰어야 한다는 말은 참으로 맞습니다. 이제 성경에서 은혜가 무슨 일을 하는지 확인하기만 하면 됩니다. 어떤 실을 쓰느냐에 따라 꿰어지는 구슬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은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디도서 2:11-13 하나님의 하리스(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며 나타났으니, 이 하리스(은혜)가 우리를 훈육하여, 경건하지 않음과 세상적인 에피뒤미아(정욕·소욕·강한 욕구)들을 부인하고, 현재의 세대에서 분별 있게, 의롭게, 경건하게 살도록 한다. 우리는 복된 엘피스(소망), 곧 우리의 위대하신 하나님이고 구원자이신 예슈아(예수) 메시아(그리스도)의 영광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니,
은혜는 「우리를 훈육하여, 경건하지 않음과 세상적인 에피뒤미아(정욕·소욕·강한 욕구)들을 부인하고, 현재의 세대에서 분별 있게, 의롭게, 경건하게 살도록 한다」고 했습니다. 문장 끝까지 계속 읽어 보면, 이 은혜를 베푸시는 메시아께서는 「모든 아노미아(토라없음)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자신을 위해 선한 행위들에 열심인 자기만의 소유된 백성을 정결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다」(디도서 2:14)고 했습니다.
은혜가 꿰어 올리는 구슬들을 세어 보십시오. 은혜는 우리가 경건하게 살도록 훈련하고, 모든 아노미아, 곧 온갖 토라 없음에서 우리를 구속하며, 선한 행위들에 열심인 백성을 만듭니다. 성경을 은혜로 엮을 때 우리가 도달하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은혜는 성경 구절들을 엮어 “그들이 죄를 짓더라도 판단하지 마십시오”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자를 회복시키되」, 「가서 … 책망하라」, 「그를 돌아오게 하면」이라는 말씀들을 하나로 엮어 냅니다. 형제를 죄 가운데 그대로 버려두는 은혜라면, 우리를 모든 아노미아에서 구속하시는 그 은혜가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한 친구가 어둠 속에서 벼랑 끝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가 가는 길을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라고 스스로 달랠 수도 있고, 달려가 그의 팔을 붙잡아 발걸음을 돌이키게 할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행동을 두고 남을 판단한다고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것입니다.
성경이 긋는 선이 바로 이것입니다. 형제가 먹는 채소를 두고 법정에 앉아 재판하려 들지 마십시오. 그러나 형제가 벼랑 끝으로 걸어가는데도 그냥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거듭난 사람을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다루시는 길 가운데 하나는 온유의 영으로 조용히 찾아가는 형제를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에 살펴볼 주장 역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이번에는 평생 토라를 읽고 외우는 우리의 유대인 이웃에 관한 이야기이며, 예슈아께서도 바로 이 문제를 두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