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에서 자유? · 16장 / 전체 41장
바울이 밝힌 비밀
앞 장에서 살핀 경계선은 옛 성도들과 우리 사이에 그어져 있었습니다. 이번에 살필 선은 더 깊숙이, 믿는 사람의 본성 한가운데를 지나갑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창세 이래로 있었던 적이 없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것은 구약에 감추어져 있었다. 복음서에서도 예슈아께서는 비유로만 말씀하셨고, 바울이 계시로 이것을 알렸다.”
이 말의 상당 부분은 성경이 직접 쓰는 표현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 점을 분명히 짚어 두어야 합니다.
그 말에서 참된 부분
고린도후서 5:17 그러므로 누구든지 메시아(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크티시스(창조)이다. 옛것들은 지나갔고, 보라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새로운 크티시스(창조)이다.」 크티시스는 무언가를 세우고 존재하게 하는 일을 가리키는 낱말이며, 바울은 바로 그 뜻으로 이 말을 씁니다. 메시아 안에 있는 사람은 그저 수선된 정도가 아니라, 새롭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2:6 또한 메시아(그리스도) 예슈아(예수) 안에서 우리를 함께 일으키시고 하늘에 속한 것들 안에서 함께 앉히셨으니,
그분과 함께 일으키심을 받고 하늘에 속한 것들 안에서 함께 앉히심을 받았다는 말씀은, 적당히 둘러대어 넘길 과장이 아닙니다. 성경이 직접 하는 말씀이니,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믿는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이냐 아니냐에 있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은 분명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문제는 거기서 어떤 결론이 따라 나오느냐입니다. 저 주장은 새로운 피조물이 구약은 전혀 알지 못했던 존재, 곧 토라와 상관없는 존재이며, 바울의 때에 이르기까지 비밀로 감추어져 있었다고 결론짓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을 뒷받침하려고 바울이 쓰는 한 낱말, 곧 「비밀」에 기댑니다.
봉투를 열어 보다
겉면에 “나중에 열 것”이라고 적힌 봉투를 떠올려 보십시오. 여러 해 동안 그 봉투가 선반 위에 놓여 있는 사이, 사람들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추측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전 유언장을 무효로 만드는 새 유언장이 들어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누군가 봉투를 열어 그 안의 글을 소리 내어 읽는 날이 오면, 그 순간부터 모든 추측은 끝납니다. 편지에 적힌 그대로가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비밀을 봉인한 채로 두지 않았습니다. 직접 열어서 우리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에베소서 3:3-6 이는 내가 짧게 미리 쓴 것처럼, 그 뮈스테리온(신비)이 아포칼뤼프시스(계시)를 통해 내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것을 읽으면 여러분이 메시아(그리스도)의 뮈스테리온(신비) 안에 있는 나의 쉬네시스(이해/통찰)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은 다른 세대들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제 프뉴마(영) 안에서 그분[하나님]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계시되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함께 상속자들이 되고, 같은 몸이 되며, 복음을 통해 메시아(그리스도) 예슈아(예수) 안에서 그분[하나님]의 약속에 함께 참여하는 이들이 되는 것이다.
뮈스테리온은 감추어진 것, 곧 비밀을 뜻합니다. 바울은 이것이 「다른 세대들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만일 바울이 거기서 말을 멈추었다면, 우리는 빈칸을 우리 생각대로 채우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멈추지 않고 곧바로 「그것은」 하고 이어 가며 그 비밀의 속내용을 밝혀 줍니다. 곧 「이방인들이 함께 상속자들이 되고, 같은 몸이 되며, 복음을 통해 메시아(그리스도) 예슈아(예수) 안에서 그분[하나님]의 약속에 함께 참여하는 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함께 참여하는 이들」은 헬라어 메토코이(함께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비밀입니다. 토라가 없는 새로운 존재가 나타났다는 것이 아니라, 민족들, 곧 이방인들이 온전한 동반자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헬라어 본문에는 「함께」라는 말이 함께 상속자들, 함께 몸의 지체들, 함께 참여하는 자들, 이렇게 세 번이나 나옵니다. 누군가 이미 유업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다른 사람이 함께 상속자가 될 수 없고, 약속이 이미 있지 않다면 그 약속에 함께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가리켜 「그분[하나님]의 약속」이라고까지 부릅니다. 이 비밀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새 집을 지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옛 집의 문을 민족들에게 활짝 열어 주었다는 뜻이며, 1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에베소서 2장이 허물어진 담을 두고 말하는 바와 정확히 같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말한 것만
만일 새로운 피조물이 구약에는 전혀 없었던 비밀이었다면,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결코 이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6:22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도우심을 입어 오늘 이날까지 서서 작은 자에게나 큰 자에게나 증언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이 장차 될 것이라고 말한 것들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평생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왕 앞에 서서도 자기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이미 말한 것밖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고 단언합니다. 바울이 받은 계시는 이미 기록된 말씀의 뜻을 열어 보여 준 것이지, 그 말씀을 대체한 것이 아닙니다.
비유로만 말씀하셨는가?
저 주장은 또한 복음서에서 예슈아께서 비유로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마치 그분의 가르침은 베일에 가려진 예고편에 불과하고, 진짜 메시지는 나중에 바울을 통해 왔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다르게 전해 줍니다.
마가복음 4:33-34 그가 그들이 들을 수 있는 만큼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에게 로고스(말씀)를 말씀하시되 비유로 말씀하지 않으심이 없었고 자기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셨다.
비유는 바깥에 있는 무리를 위한 것이었고, 「자기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쓴 낱말은 「모든 것」입니다. 제자들은 수수께끼만 안은 채로 남겨지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배운 것을 가르치도록 보냄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끝에서, 부활하신 예슈아께서는 그들을 보내어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복음 28:20) 하십니다. 여기서 지키다는 말은 테레오(지키다)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슈아의 명령들이야말로 모든 민족들의 제자들이 지켜야 할 바입니다. 그 말씀들은 바울이 오면 한쪽으로 치워 둘 예고편이 아니며, 바울 자신도 모든 가르침을 바로 그 말씀들로 재어 보았습니다.
디모데전서 6:3 누가 에테로디다스칼레오(다른-가르침을-가르치다)하며 우리 주 예슈아(예수) 메시아(그리스도)의 건전한 로고스(말씀/메시지)들과 에우세베이아(경건함)를 따른 가르침에 가까이 하지 않으면,
바울에게는 「우리 주 예슈아(예수) 메시아(그리스도)의 건전한 로고스(말씀/메시지)들」에 맞지 않는 가르침이 곧 「에테로디다스칼레오(다른-가르침을-가르치다)」, 다른 가르침이었습니다. 바울이 그 말씀들을 지나간 시대의 비유쯤으로 여겨 제쳐 두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 편지 안에서 본 새로운 피조물
끝으로, 바울이 새로운 피조물을 말하는 바로 그 편지인 고린도후서로 돌아가서, 그 구절 앞뒤에 어떤 말씀이 있는지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은 그 구절 바로 앞에 이렇게 썼습니다.
고린도후서 5:10 이는 우리 모두가 메시아(그리스도)의 베마(재판석) 앞에 나타나야 하니, 각자가 몸으로 행한 것을, 선하든 악하든 그대로 받기 위함이다.
새로운 피조물도 여전히 베마(재판석) 앞에 나타나, 「각자가 몸으로 행한 것을, 선하든 악하든 그대로」 받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자기가 행한 일의 결과에서 벗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한 장 뒤에서 바울은 「디카이오쉬네(의로움)와 아노미아(토라없음)에 무슨 메토케(함께-참여함)가 있으며」(고린도후서 6:14) 하고 묻습니다. 대답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의로움의 편에 서며, 새로운 피조물이 함께 참여할 수 없는 것은 아노미아, 곧 토라 없음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우리 자신을 사르크스(육체)와 프뉴마(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가자」(고린도후서 7:1) 하고 씁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명령도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깨끗하게 하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을 들려주는 바로 그 편지가, 새로운 피조물이 어떤 모습인지도 함께 보여 줍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자기가 행한 일로 심판을 받고, 아노미아와 함께 참여하지 않으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갑니다.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은 실재하며 완전히 새로운 존재이지만, 토라가 없는 존재는 아닙니다.
다음 주장은 믿는 사람의 본성에서 눈을 돌려 믿는 사람들이 서로를 두고 어떻게 말하느냐의 문제를 다루며, 로마서 14장 4절에 기대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그 장의 첫 절부터 차례로 읽을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