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에서 자유? · 15장 / 전체 41장
십자가 이전의 성도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다니엘은 율법 아래에서 거룩하게 살았고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하지만 침례자 요한조차 하늘의 왕국에서는 가장 작은 이보다 작습니다(마태복음 11:11). 구약의 성도들은 종이고, 우리는 아들입니다.”
꽤 너그러운 말처럼 들립니다. 다니엘을 실패자로 깎아내리지 않고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다니엘을 집 안의 옛 방, 곧 종들의 처소에 두고, 오늘날 믿는 우리는 가족의 자리로 들어왔다고 여길 뿐입니다. 게다가 예슈아께서 실제로 하신 말씀에 바탕을 두고 있으니, 먼저 그 말씀부터 읽어 보아야 합니다.
예슈아께서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
마태복음 11:11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들 가운데 침례자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일어나지 않았으나, 하늘들의 바실레이아(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도 그보다 크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읽습니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들 가운데 요한보다 큰 이는 없지만, 왕국에서 가장 작은 이라도 요한보다는 크다는 말씀입니다.
앞선 주장은 이 구절을 하나의 담장으로 삼습니다. 담장 이쪽에는 요한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종으로 서 있고, 담장 저쪽 왕국 안에는 아들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 자신도 가장 큰 종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종으로서 담장 밖에 남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이며, 앞뒤 문맥을 보면 요한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두 구절 앞서 예슈아께서는 무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마태복음 11:9 그러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선지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선지자보다 더 훌륭한 이로다.
누가도 똑같은 말씀을 기록합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자들 가운데 요한보다 큰 선지자는 없다」(누가복음 7:28). 요한이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도 이 아이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불릴 것」(누가복음 1:76)이라고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1절은 요한을 왕국 밖으로 밀어내지 않습니다. 선지자들이 어디에 있을지 예슈아께서 직접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식탁에 앉는 사람들
어떤 젊은이가 옛날 집안 어른들은 그저 고용된 일꾼이었을 뿐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막상 가족 만찬 자리에 가 보니, 증조할아버지가 식탁 상석에 앉아 계십니다.
예슈아께서 그려 보이시는 모습이 바로 이러합니다.
마태복음 8:11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많은 사람들이 동쪽과 서쪽에서 와서 하늘들의 바실레이아(왕국)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자리에 앉을 것이나,
민족들이 들어와 보니 족장들이 종들의 처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민족들은 들어와서 족장들과 함께 식탁에 기대어 앉습니다.
누가는 그 자리에 선지자들도 함께 있다고 덧붙입니다.
누가복음 13: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바실레이아(왕국) 안에 있고 너희 자신은 밖으로 내쫓기는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울부짖음과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
이 구절은 「모든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왕국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인에게서 난 누구보다도 큰 선지자인 요한이 그들 가운데 있고, 요한보다 앞서 온 선지자들도 함께 있습니다. 예슈아께서 「예언자 다니엘」(마태복음 24:15)이라 부르신 다니엘도 그 가운데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밖으로 내쫓기는」 사람들은 선지자들이 아닙니다. 예슈아의 가르침을 듣고도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11장 11절의 「가장 작은」과 「더 큰」이 무슨 뜻이든, 요한과 선지자들을 다른 체제 아래에 있는 종으로 보아 왕국 밖에 두는 해석은 예슈아께서 친히 하신 말씀과 어긋납니다.
「더 작은 이」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하늘들의 바실레이아(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도 그보다 크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본문이 분명히 밝혀 주는 사실부터 짚어 보겠습니다.
여기서 「가장 작은」으로 옮긴 헬라어 낱말은 미크로테로스(더 작은)입니다. 최상급이 아니라 비교급으로, 「더 작은 이」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5장 19절에 나오는 「가장 작은」이라는 낱말인 엘라키스토스(가장 작은)와는 다릅니다. 요한은 여인에게서 난 자들 가운데 가장 큰 이입니다(마태복음 11:11). 그는 「그의 어머니 태 속에서부터 하기오(거룩한) 프뉴마(영)로 충만함을 받을」 사람이었고(누가복음 1:15), 「모든 예언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왕국 안에 있습니다(누가복음 13:28). 게다가 예슈아께서는 감옥에 있던 요한이 사람을 보내어 질문을 던진 뒤, 무리 앞에서 요한을 높여 주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마태복음 11:2-11).
여기까지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더 작은 이」가 누구인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이천 년 동안 수많은 설명이 나왔습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해석들과 각 해석이 안고 있는 난점을 있는 그대로 짚어 보겠습니다.
왕국에서 가장 작은 신자라고 보는 해석입니다. 벵겔(J. A. Bengel), 마이어(H. A. W. Meyer), 앨퍼드(Henry Alford), 브루스(A. B. Bruce), 로버트슨(A. T. Robertson) 등 헬라어 본문을 다룬 고전 주석가 대부분이 이렇게 읽었습니다. 바우어와 단커의 표준 헬라어 사전(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미크로스(작은) 항목)도 「왕국에서 가장 덜 중요한 사람」으로 풀이합니다. 난점은 이렇습니다. 요한이 왕국 안에 있다면, 왕국 안에서 가장 작은 신자가 요한보다 클 수는 없습니다. 이 해석을 유지하려고 벵겔은 자신의 주석(Gnomon of the New Testament, 마태복음 11:11)에서 요한이 「아직 하늘의 왕국 안에 있지 않았다」고 썼는데, 모든 선지자가 왕국 안에 있다고 하신 예슈아의 말씀(누가복음 13:28)과 맞지 않습니다.
옛 시대와 새 시대가 누리는 특권의 차이로 보는 해석입니다. 로버트슨(Word Pictures in the New Testament, 마태복음 11:11)은 인격 면에서는 요한이 더 크지만 특권 면에서는 왕국에서 가장 작은 이가 요한을 앞선다고 말했고, 마이어(Commentary on the Gospel of Matthew, 마태복음 11:11)는 요한을 「옛 신정 체제」에 두었습니다. 현대 주석가들 사이에서 가장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해석입니다. 카슨(D. A. Carso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중 Matthew, 마태복음 11:11), 프랜스(R. T. France, The Gospel of Matthew, 마태복음 11:11), 해그너(Donald Hagner, Matthew 1–13, 마태복음 11:11)는 이 문제가 요한이 구원받았느냐가 아니라 구원 역사에서 요한이 어느 자리에 있느냐를 다룬다고 말합니다. 프랜스는 요한이 끝내 메시아의 구원에서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카슨은 왕국에서 가장 작은 신자라도 결정적인 계시의 사건들이 일어난 뒤에 살아가기 때문에 요한보다 예슈아를 더 분명하게 가리켜 보인다고 말합니다. 난점은 이렇습니다. 만약 그 특권이 영을 받는 것이나 메시아를 아는 지식을 뜻한다면 요한에게는 들어맞지 않습니다. 요한은 태에서부터 영으로 충만했고(누가복음 1:15), 「내가 보고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했다」(요한복음 1:34)고 말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한이 배제되지 않는다면 처음 질문이 다시 돌아옵니다. 왕국에서 가장 작은 이가 어떻게 같은 왕국 안에 있는 사람보다 더 클 수 있겠습니까?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Commentary on Luke, 설교 38)는 믿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더 이상 여인의 아들이라 불리지 않고」 하나님께로서 난다고 말했습니다. 난점은 이렇습니다. 이렇게 되면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은 사람이 되는데,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누가복음 1:15).
겸손으로 얻는 위대함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똑같이 미크로테로스라는 낱말이 나오는 누가복음 9장 48절과,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왕국에서 가장 큰 이라고 부르는 마태복음 18장 4절을 가지고 이 구절을 풀어내는 시각입니다. 난점은 이렇습니다. 요한이야말로 「그분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요한복음 3:30)며 자기를 낮춘 장본인입니다. 그 잣대로 재면 요한이 가장 큰 사람이 되어야 하므로, 말씀의 뜻이 거꾸로 뒤집히고 맙니다.
천사들이나 앞서 간 성도들로 보는 해석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Against the Adversary of the Law and the Prophets, 2권 5장)는 여러 갈래 가운데 하나로 천사들을 제시했고, 히에로니무스(Commentary on Matthew, 2권, 마태복음 11:11)는 이미 주님과 함께 있는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로 읽었습니다. 난점은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11장의 문맥 어디에도 천사들이나 세상을 떠난 성도들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왕국이 임할 때 그 안에 있을 모든 사람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데이비스와 앨리슨(W. D. Davies and Dale Allison, Matthew: A Shorter Commentary, 마태복음 11:11)은 다가올 왕국 안에 있는 사람을 그 왕국이 오기 전에 가장 컸던 사람과 나란히 놓은 것으로 읽으면서, 이 말씀이 요한을 배제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반면 존 P. 마이어(John P. Meier, A Marginal Jew, 2권, 142–144쪽)와 마셜(I. Howard Marshall, The Gospel of Luke, 누가복음 7:28)은 예슈아를 통해 이미 뚫고 들어오고 있는 왕국을 말합니다. 난점은 이렇습니다. 카슨은 미래로 읽는 해석을 두고, 그때가 되면 요한도 왕국 안에 있지 않겠느냐고 묻습니다. 마셜 자신도 이 말씀은 요한이 왕국 안에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결국 이 해석은 왜 그렇게 비교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 채 남겨 둡니다.
왕국의 종들로 보는 해석입니다. 리더보스(Herman Ridderbos, The Coming of the Kingdom, 53쪽)는 「가장 작은 이」를 왕국의 직분자들과 종들로 읽고, 요한을 왕국 이전 시대에 둡니다. 난점은 이렇습니다. 요한은 「메타노에이테(회개하라 / 영적영역), 하늘들의 바실레이아(왕국)가 가까이 왔다」(마태복음 3:2; 4:17)라며 예슈아와 똑같은 말씀을 선포했고, 모든 선지자와 함께 왕국 안에 있습니다(누가복음 13:28).
요한 뒤에 오신 분, 곧 예슈아로 보는 해석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스(Homilies on Matthew, 강해 37)는 「더 작은 이」를 「나이와 대중의 평가에서 더 작은」 예슈아로 읽었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Against Marcion, 4권 18장)와 아우구스티누스(Against the Adversary of the Law and the Prophets, 2권 5장)도 이를 한 가지 해석으로 제시했으며, 마이어에 따르면 힐라리우스, 루터, 멜란히톤도 그렇게 읽었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는 디벨리우스(Franz Dibelius, Zeitschrift für die neutestamentliche Wissenschaft 11, 1910, 190–192쪽)와 쿨만(Oscar Cullmann, The Christology of the New Testament, 24, 32쪽)이 이 해석을 다시 받아들였고, 피츠마이어(Joseph Fitzmyer, Luke I–IX, 누가복음 7:28)는 결론을 열어 두었습니다. 이 해석은 구절의 짜임새가 요한 자신이 한 말인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능하신 분」(마태복음 3:11)이라는 말과 닮았다는 점에 바탕을 둡니다. 난점은 이렇습니다. 「왕국에서」라는 말이 「더 작은 이」와 이어지면, 예슈아께서 왕국에서 더 작은 이가 되어 버립니다. 이를 피하려면 그 어구를 「더 크다」와 이어서 「더 작은 이가 왕국에서는 그보다 더 크다」로 읽어야 합니다. 앨퍼드(The Greek Testament, 마태복음 11:11), 벵겔, 마이어는 문법과 문맥을 근거로 이 해석을 물리쳤고, 현대의 마셜, 존 P. 마이어, 보크(Darrell Bock, Luke 1:1–9:50, 누가복음 7:28)도 주로 어순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미크로테로스가 「더 젊은」이라는 뜻으로 쓰이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1절과 누가복음 7장 28절을 빼면, 이 낱말은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겨자씨를 가리키거나(마가복음 4:31; 참고 마태복음 13:32) 「너희 모두 중에서 가장 작은 자」(누가복음 9:48)를 가리킬 때만 쓰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도들로 보는 해석입니다. 길(John Gill), 풀(Matthew Poole), 반스(Albert Barnes)가 마태복음 주석에서 이렇게 읽었습니다. 난점은 이렇습니다. 사도들이 어떤 면에서 요한보다 더 큰지 본문이 말하지 않을뿐더러, 첫 번째 해석과 마찬가지로 요한도 왕국 안에 있다는 문제가 그대로 남습니다.
이처럼 모든 설명에는 저마다 풀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사람의 설명이 말씀 전체를 다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붙드는 것은 본문이 분명하게 말하는 바입니다. 요한은 여인에게서 난 자들 가운데 가장 큰 이이며, 영으로 충만했고, 왕국 밖에 서 있는 종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산 다니엘
이 주장의 뒷부분은 또 다른 방식으로 선을 긋습니다. 다니엘은 율법 아래 있었고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구분도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옛 언약의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그들 모두를 한마디로 이렇게 설명합니다.
히브리서 11:33 이들은 믿음으로 바실레이아(왕국)들을 정복하고, 디카이오쉬네(의로움)를 행하고, 약속들을 얻고, 사자들의 입들을 막고,
끝에 나오는 「사자들의 입들을 막고」는 다니엘을 가리키는 말이고, 첫머리에 나오는 말은 「이들은 믿음으로」입니다. 히브리서는 다니엘이 믿음이 아니라 율법을 지켜서 사자들의 입을 막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그 주장 스스로도 말하듯 토라를 지킨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왕의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려 했고(다니엘 1:8), 「전에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YLV 다니엘 6:11, 마소라 절 번호 기준). 그의 삶에서 믿음과 계명은 서로 다른 두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그 둘은 하나의 삶이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더 거슬러 올라갑니다.
로마서 4:3 그라페(기록된-성경)가 무엇을 말하는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그것이 그에게 디카이오쉬네(의로움)로 여겨졌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윗을 두 번째 증인으로 내세웁니다.
로마서 4:6-8 다윗도 이와 같이 행위들과 별개로 하나님께서 디카이오쉬네(의로움)로 여겨주시는 사람의 복을 말한다. “아노미아이(토라없음들)를 용서받고 죄들을 덮음받은 자들은 복이 있으며 주께서 그 죄를 계산하지 않으실 사람은 복이 있다.”
다윗이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노미아(토라 없음)입니다. 곧 「아노미아이(토라없음들)를 용서받고 죄들을 덮음받은 자들」입니다. 다윗은 토라를 완벽하게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토라를 어겼고, 용서받았으며, 「행위들과 별개로」 의로움을 인정받았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방식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다른 길이나 옛날의 길, 혹은 종의 길이 아니라 똑같은 길입니다.
또한 바울은 복음 자체가 그 주장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3:8 그라페(기록된-성경)는 하나님이 믿음으로 이방인들을 의롭게 하실 것을 미리 알고, 아브라함에게 미리 복음을 전하기를 — “모든 이방인들이 네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다” — 라고 했으니.
복음은 아브라함에게도 전해졌습니다. 율법의 시대가 먼저 있다가 나중에 믿음의 시대로 바뀐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의인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함께 완전하게 되다
히브리서는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한 끝에 이렇게 맺습니다.
히브리서 11:39-40 이 모든 이들이 믿음으로 증언을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더 나은 무언가를 예비하셨으므로, 우리 없이는 그들이 완전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려 하심이다.
옛 성도들이 한 집의 종이고 우리가 다른 집의 아들이라면, 「우리 없이는 그들이 완전하게 되지 못하도록」이라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두 계급을 그리지 않고, 함께 완전하게 되는 한 무리를 그립니다.
신명기에 나오는 아들들
그 주장은 우리가 아들이고 옛 성도들은 종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이름은 신약에서 처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토라에도 그 이름이 나옵니다.
신명기 14: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 몸을 베지 말고 너희 두 눈 사이의 머리털을 밀지 말라.
이 문장이 놓인 자리가 중요합니다. 이 구절은 음식 규례가 시작되는 장의 첫 절이며, 이어지는 신명기 14장의 구절들은 먹어도 되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나열합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종이니, 여기 너희가 지킬 규칙이 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라고 아들로 부르신 뒤에, 그 자녀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일러 주십니다. 아들의 신분과 계명이 한 호흡으로 함께 주어지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속한 것들을 열거할 때 이에 동의합니다. 곧 「휘오테시아(아들-됨/입양)와 영광과 디아테케(언약)들과 노모테시아(율법-수여)」입니다(로마서 9:4). 아들의 신분과 토라는 나란히 서 있습니다.
옛 시대의 종과 새 시대의 아들을 가르는 선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식탁에 앉아 있고, 요한과 모든 선지자는 왕국 안에 있으며, 다니엘은 믿음으로 사자들의 입을 막았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음식 규례를 주시는 바로 그 대목에서 그들을 아들이라 부르셨습니다.
잘려 나간 말씀
「더 작은 자」에 대한 모든 설명에 저마다 난점이 있듯이, 교회가 거의 이천 년 동안 붙들어 온 주장에도 난점이 있습니다. “예슈아를 믿으라, 그러면 무엇이든 먹어도 된다”라는 주장입니다. 이 책에서는 그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는 구절들을 하나씩 살펴보았습니다.
마가복음 7장 19절의 헬라어 본문에는 「선언하셨다」라는 낱말이 없습니다. YLV의 기준 본문인 비잔틴 다수 본문(로빈슨–피어폰트 2018)에서 「말끔히 치워 낸다」는 뜻의 분사 카타리존은 중성입니다(다른 몇몇 사본에는 남성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낱말은 예슈아가 아니라, 먹은 것이 「뒤로 나가며, 모든 브로마(음식)를 말끔히 치워 내」는 일을 설명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환상을 본 뒤에도 베드로는 여전히 「나는 코이노스(공통적인, 세상적인)하거나 아카타르토스(부정한, 불결한)한 것은 어떤 것도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사도행전 10:14)라고 말했고, 그 환상이 사람을 가리키는 것임을 직접 설명했습니다(사도행전 10:28).
로마서 14장 14절의 「그 자체로 코이노스(공통적인, 세상적인)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은 공통적인 것을 두고 하는 말이지, 아카타르토스(부정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시장에서 파는 것은 무엇이든 … 먹어라」(고린도전서 10:25)라는 말씀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다루며, 성경이 이미 음식이라고 부르는 것만을 놓고 하는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3-5절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음식들」을 말하며, 그 음식은 「하나님의 로고스(말씀/메시지)와 엔튁세오스(탄원/중보기도)를 통해 거룩하게 되」는 음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 이전, 시내산 이전, 모세 이전에 이미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별해 두셨습니다(창세기 7:2).
예슈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19 그러므로 이 가장 작은 계명들 가운데 하나라도 어기고 또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는 하늘들의 바실레이아(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라 불릴 것이나, 그것을 행하고 가르치는 자는 하늘들의 바실레이아(왕국)에서 크다 불릴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먹어도 되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는 장인 레위기 11장을 마무리하는 바로 그 말씀으로 신자들을 권면했습니다(레위기 11:44-45).
베드로전서 1:15-16 오히려 너희를 부르신 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이들이 되라. “거룩하라, 이는 내가 거룩하기 때문이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사야는 마지막 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 바로 앞에 다음과 같은 경고를 두었습니다.
이사야 66:17 정원으로 가려고 자기를 거룩히 구별하고 정결케 하며, 가운데 선 자를 따라 돼지고기(바사르)와 가증한 것과 쥐를 먹는 자들이 함께 끝장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바로 그 장에서 이사야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합니다(이사야 66:22). 그 약속은 붙들면서 돼지고기와 가증한 것을 먹는 자들에 대한 말씀은 잘라 버리고, 남은 것만 믿는 태도를 믿음이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서만이 아닙니다. 성경 곳곳에서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말씀이 제거되거나 그 뜻이 굽어지는데, 이는 참으로 애통할 일입니다. 이런 일이 거의 이천 년 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 어디에도 음식 규례가 폐지되었다고 말하는 구절은 단 한 절도 없습니다. 말씀은 처음 주어졌을 때와 다름없이 서 있으며, 대답은 처음부터 하나였습니다. 토라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옛 성도들과 우리를 가르는 선을 한층 더 깊이 그어, 그 모든 세대에게 감추어졌던 비밀이라며 신자의 본성 자체를 가르는 데까지 나아가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