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에서 자유? · 14장 / 전체 41장
선한 일을 위하여 받은 구원
이 책에서 다루는 주장들은 대개 한 문장으로 옵니다. 그러나 이번 주장은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오는데, 꽤 훌륭한 그림입니다.
“시험도 치르지 않고 대학에 입학한 학생이 다시 입학시험을 준비하겠다고 결심하는 것과 같습니다.”
학생은 손에 합격 통지서를 쥐고 있습니다. 대학은 시험도, 점수도, 등록금도 없이 그를 값없이 받아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학생은 이미 얻은 자리에 자신이 합당한지 증명해 보이려고 밤늦게까지 모의고사 문제지를 붙들고 앉아 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고개를 저을 노릇입니다. 그 청년은 이미 합격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공로 없이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어째서 이제 와서 다시 자격을 얻으려고 애쓰겠습니까? 여기서 사람들은 흔히 토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끌어냅니다. 토라는 입학시험이고 우리는 이미 입학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절반은 맞습니다
비유의 앞부분은 정확히 맞으며, 이 책도 그 토대 위에 서 있습니다. 바울은 이 점을 가장 날카로운 말로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4 노모스(법) 안에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메시아(그리스도)에게서 단절되었고 하리스(은혜)에서 떨어진 것이다.
토라를 지키는 일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으려 애쓰는 것은 입학시험장으로 되돌아가는 셈입니다. 이는 무의미한 정도가 아니라 은혜에서 떨어지는 일입니다. 이 책 어디에서도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입학은 값없이 이루어졌고, 앞으로도 값없습니다.
따라서 여기까지는 학생의 비유에 동의합니다. 문제는 그 비유가 그다음에 어디로 가는가 하는 점입니다.
첫 수업 날
같은 학생이 학기 첫날 아침을 맞이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주머니에 합격 통지서를 넣은 그는 강의실을 그냥 지나쳐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더니 그곳에 틀어박힙니다. 수업이 시작되어도 빠지고, 과제가 나와도 무시합니다. 누군가 이유를 물으면 합격 통지서를 들어 보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시험 없이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왜 수업 과제를 해야 합니까?”
지켜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시 고개를 저을 것이며, 이번에는 더 세게 저을 것입니다. 학생이 서로 다른 두 가지를 혼동했기 때문입니다. 시험은 학생이 대학에 들어가는 방법이었고, 수업은 대학에 들어온 학생이 하는 일입니다. 값없이 입학했다고 해서 수업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수업에 그의 자리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이 비유는 바로 이 구분을 슬그머니 흐려 놓습니다. 토라는 비유의 앞뒤에서 각기 다른 역할을 맡습니다. 입학하는 길, 곧 의롭다 하심을 받는 길로서의 토라는 닫혀 있으며, 바울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미 입학한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로서의 토라는 그 집안의 교과 과정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걸어갑니다.
바울이 가로막은 생각
기숙사에 틀어박힌 학생에게 바울이 어떻게 대답할지 추측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바울은 자기 시대에도 똑같은 생각을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1-2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리스(은혜)가 더하게 하려고 죄 안에 머물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어찌 그 안에서 여전히 살겠는가?
「하리스(은혜)가 더하게 하려고 죄 안에 머물겠는가?」 이것이 바로 그 학생의 논리입니다. 값없이 입학했으니 이제 내가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는 생각입니다. 바울은 「결코 그렇지 않다」라고 답합니다. 그가 든 이유는 어떤 규칙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가에 관한 사실입니다.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어찌 그 안에서 여전히 살겠는가?」
그분이 값을 치르신 이유
선물 자체의 이유도 있습니다. 메시아께서는 도대체 왜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까? 바울은 디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디도서 2:14 그분께서 모든 아노미아(토라없음)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자신을 위해 선한 행위들에 열심인 자기만의 소유된 백성을 정결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다.
여기서는 목적을 나타내는 구절이 중요합니다. 그분은 「모든 아노미아(토라없음)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자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구속하다」에 해당하는 원어는 뤼트로오(몸값을 치르고 풀어 주다)입니다. 우리가 몸값을 치르고 풀려난 대상은 토라가 아니라 아노미아, 곧 이 책이 12장부터 줄곧 추적해 온 토라 없음입니다. 그 값은 하나님의 율법 없는 삶에서 우리를 건져 내려고 치러졌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위하여 우리를 건져 내셨습니까? 「자신을 위해 선한 행위들에 열심인 자기만의 소유된 백성을 정결하게 하시려고」입니다. 「열심인」은 뜻이 강한 말입니다. 선한 행위를 그저 마지못해 견디는 정도가 아니라 간절히 바라는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수업을 빼먹는 학생은 자기 합격 통지서를 오해한 것입니다. 왜 입학을 허가받았는지 그 통지서 자체에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디도서 2장 14절의 앞부분과 뒷부분 가운데 어느 쪽도 입학의 대가가 아니며, 둘 다 입학의 이유입니다.
미리 준비하신 일
바울은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구절에서 에베소 사람들에게도 같은 말을 전합니다.
에베소서 2:8-10 이는 여러분이 하리스(은혜)로 믿음을 통해 구원받은 것이고,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론(선물)이니, 행위들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는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 이는 우리는 그분[하나님]의 포이에마(만드신 작품)로서, 하나님이 우리가 그 안에서 페리파테오(걷다/행하다)하도록 미리 준비하신 선한 행위들을 위해 메시아(그리스도) 예슈아(예수)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첫 두 절은 값없는 입학입니다. 은혜로, 믿음을 통해,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행위들에서 난 것도 아닙니다. 셋째 절은 시간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그 안에서 페리파테오(걷다/행하다)하도록 미리 준비하신 선한 행위들을 위해 메시아(그리스도) 예슈아(예수)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수업은 선물을 망치려고 나중에 덧붙인 것이 아닙니다. 학생이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준비되어 있었고, 학생은 그 안에서 걷도록 입학을 허가받았습니다. 게다가 학생은 홀로 과제를 감당하도록 버려지지도 않습니다. 17장에서 읽을 디도서 2장 14절 바로 앞 구절들은 은혜 자체를 교사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그 그림을 간직하십시오. 좋은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믿음을 통해 값없이 입학했으니 다시 입학시험장으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그러나 수업에는 들어가십시오. 학생은 바로 그 일을 하라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선은 시간 자체를 가로질러 그어집니다. 옛 성도들은 종이었고 우리는 아들이라고들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