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에서 자유? · 10장 / 전체 41장
누가 형벌을 집행할 수 있는가
앞에서 반론의 두 가지 항목인 제사와 할례에 답했습니다. 이제 세 번째 항목이 남았습니다.
“토라는 어떤 죄인들을 돌로 치라고 명합니다. 토라가 지금도 유효하다고 말하려면 간음한 사람들을 돌로 쳐야 합니다. 당신들은 그렇게 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니 당신들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입맛대로 골라 지키는 것입니다.”
타당한 질문이며 정직한 대답을 들어야 마땅한 물음입니다. 대답은 제사 문제에서 찾았던 것과 같습니다. 토라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만 말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누구의 손으로 해야 하는지도 함께 말했습니다.
누가 돌을 들었는가
다른 차가 빨간불을 무시하고 달리는 모습을 본 운전자를 떠올려 보십시오. 법이 깨졌으니 화가 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는 그 차를 끝까지 쫓아가 세우고, 자기 손으로 범칙금 고지서를 써서 그 자리에서 돈을 내라고 요구합니다.
누구도 그 행동을 두고 교통법규를 지킨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빨간불에 멈추라는 법은 분명히 살아 있지만, 법은 누가 그 법을 집행하는지도 정해 두었습니다. 경찰관이 차를 세우고, 법원이 사건을 심리하며, 판사가 판결을 내립니다. 화가 난 운전자가 자기 손으로 형벌을 집행하려 든다면, 법을 집행하려는 바로 그 행동으로 법을 어기는 셈이 됩니다.
토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형을 비롯한 토라의 형벌은 마침 그 자리에 서 있던 아무에게나 맡겨진 적이 없습니다. 형벌은 세움을 받은 법정에 속해 있었습니다.
신명기 17:8-9 네 성문 안에서 피와 피 사이, 다툼(딘)과 다툼(딘) 사이, 상해와 상해 사이의 다투는 일이 판결(미쉬파트)하기에 너무 어렵거든, 너는 일어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곳으로 올라가, 레위 사람 제사장들과 그때에 있을 재판관에게 가서 물으라. 그러면 그들이 너에게 판결(미쉬파트)의 말을 일러 줄 것이다.
절차는 순서대로 진행됩니다. 먼저 「네 성문 안에서」 어려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너는 일어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곳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거기서 「레위 사람 제사장들과 그때에 있을 재판관에게 가서」 묻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너에게 판결(미쉬파트)의 말을 일러 줄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 구절들에서 히브리어 본문은 재판과 관련하여 두 낱말을 씁니다. 미쉬파트는 판결, 평결, 곧 바른 판정을 뜻합니다. 딘(소송 사건)은 재판을 받으러 가져온 사건, 곧 송사를 뜻합니다. 둘 다 같은 곳으로 이어집니다. 여호와께서 택하시는 곳으로 올라가 제사장들과 그때의 재판관 앞에 서게 되며, 바로 거기서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처럼 토라 자체가 범죄에서 판결에 이르는 길을 세워 두었습니다. 「네 모든 성문 안에서」 재판관들을 세웠고(신명기 16:18), 「두세 증인의 입으로」만 사형에 처할 수 있었으며(신명기 17:6), 재판관들이 다루기에 너무 어려운 사건은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 있는 제사장들과 재판관에게로 올라갔습니다. 그들이 없이는 합법적인 판결이 있을 수 없었고, 합법적인 판결이 없이는 합법적인 처벌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 법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섬기는 제사장들도 없고, 그때의 재판관도 자리에 앉아 있지 않습니다. 판결을 내릴 권한은 그 법정에 있었으므로, 법정이 사라진 지금 개인이 그 권한을 쥐고 스스로 행사할 수는 없습니다.
칼은 어디로 갔는가
그렇다면 지금도 벌어지는 악한 일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저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넘어갑니까?
신약성경은 처벌할 권한을 통치 권세들에게 두어 이 질문에 곧바로 답합니다. 8장에서 이 대목의 앞부분을 다루었는데, 전체 본문은 이러합니다.
로마서 13:3-4 이는 통치자들은 선한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악한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엑수시아(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기를 원하는가? 선을 행하라. 그러면 그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이다. 이는 그가 당신에게 선을 위한 하나님의 디아코노스(일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을 행하면 두려워하라. 이는 그가 헛되이 칼을 차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악을 행하는 자에게 오르게(진노) 안에서 복수하는 하나님의 디아코노스(일꾼)이다.
바울은 통치 권세를 「당신에게 선을 위한 하나님의 디아코노스(일꾼)」라고 부릅니다. 그 권세는 「헛되이 칼을 차지 않」으며, 「악을 행하는 자에게 오르게(진노) 안에서 복수하는 하나님의 디아코노스(일꾼)」입니다. 엑수시아(권세)라는 낱말은 권한, 곧 행동할 권리를 뜻합니다. 국가의 형벌을 뜻하는 칼은 그 권세에 맡겨져 있으며, 바울은 그 칼을 신자들에게 넘겨주지 않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에도 권한이 주어져 있지만, 성격이 다르고 범위도 훨씬 작습니다.
고린도전서 5:12-13 이는 밖에 있는 자들을 내가 크리노(심판/결정하다)하는 것이 내게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안에 있는 자들은 여러분이 크리노(심판/결정하다)하지 않는가? 그러나 밖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크리노(심판/결정하다)하신다; “그 악한 자를 여러분 자신들 가운데서 내쫓아라.”
이것이 악에 머물러 있는 자기 구성원들에게 교회가 가진 권한입니다. 교회는 그들을 내보낼 수 있습니다. 교회에 돌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교제에서 누군가를 내보낼 권한이 주어졌을 뿐이며,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빈틈은 없습니다. 이 그림 어디에서도 신자에게 자기 손으로 돌을 들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뜰 가운데 서 있는 여인
복음서에 나오는 한 장면이 이 문제와 직접 맞닿아 있습니다. 사람들이 한 여인을 예슈아께 데려옵니다.
요한복음 8:3-6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붙잡힌 여자를 그분께 데려와 가운데 세우고, 그분을 시험하며 그분께 말하기를,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노모스(법)에서 이런 자들을 돌로 치라고 우리에게 명했으니, 당신은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들이 이것을 말한 것은 그분을 시험하여 고발할 근거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슈아(예수)께서는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며 모른 척하셨다.
그들의 질문은 「당신은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였고, 요한은 그들이 왜 그렇게 물었는지를 알려 줍니다. 「그분을 시험하여 고발할 근거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함정이었습니다.
요한복음 8:7-9 그들이 계속 물으니, 예슈아(예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그녀에게 돌을 던지라”라고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쓰셨다. 그들이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나갔고, 예슈아(예수)만 홀로, 그리고 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 남았다.
그들은 예슈아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질문을 들고 왔고, 예슈아께서는 그들에게 조건 하나를 되돌려 주셨습니다.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슈아께서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10-11 예슈아(예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 여자 외에 아무도 보지 못하시고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네 고발자들이 어디 있느냐? 아무도 너를 정죄하지 않았느냐”라고 하셨다. 그녀가 말하기를, “주여,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하니, 예슈아(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도 너를 크리노(심판/결정하다)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라고 하셨다.
여기서 예슈아께서 하신 일도 중요하고, 하지 않으신 일도 중요합니다.
예슈아께서는 형벌을 집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슈아께서도, 다른 누구도 돌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나도 너를 크리노(심판/결정하다)하지 않는다.」 크리노라는 낱말은 재판하다, 곧 사건을 판결한다는 뜻이며, 그 순간 예슈아께서는 여인에게 형벌을 선고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계명을 폐하신 것도 아닙니다. 간음이 더 이상 문제 되지 않는다거나 계명이 끝났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부터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간음하지 마라」라는 계명은 늘 서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예슈아께서는 여인을 계명에서 벗어난 자유로 내보내신 것이 아니라, 계명 안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삶으로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이며, 기준을 그대로 세워 두는 은혜입니다. 여인은 정죄를 받지 않고 떠났으며,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는 분명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슈아께서 율법을 제쳐 두셨다고 말할 때 흔히 끌어오는 이 장면은 오히려 정반대를 보여 줍니다. 예슈아께서는 돌을 제쳐 두셨고, 계명은 지키셨습니다.
온전히 다 지킨다는 것
이제 반론의 세 가지 항목을 한자리에 모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입맛대로 골라 지킬 수는 없다”는 말은 맞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지킨다는 말은, 토라 자체가 각각의 계명을 두고 정해 놓은 장소와 때와 사람에 맞추어 지킨다는 뜻입니다.
| 반론이 요구하는 것 | 토라가 정한 것 | 오늘날 토라를 지키는 모습 |
|---|---|---|
| 제사를 드려라 | 오직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만 드림 (신명기 12:5-6, 13-14) | 성전이 없음: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이 토라를 지키는 것임 |
| 모든 신자에게 할례를 행하라 | 이방인에게는 구원의 조건이 아님 (사도행전 15장). 디모데는 할례를 받았고 (사도행전 16:3), 디도는 받지 않음 (갈라디아서 2:3) | 토라와 공의회가 요구한 대로 행함 |
| 죄인을 돌로 쳐라 | 두세 증인의 말에 따라 세움을 받은 재판관들만 집행하며 (신명기 16:18, 17:6), 어려운 사건은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의 제사장들과 재판관에게 가져감 (신명기 17:8-9) | 법정이 없음: 형벌을 집행하지 않는 것이 토라를 지키는 것임 |
성전이 없을 때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이 토라를 지키는 길입니다. 법정이 없을 때 형벌을 집행하지 않는 것이 토라를 지키는 길입니다. 이것은 지키기 어려운 부분을 피해 가려고 지어낸 예외 조항이 아닙니다. 토라를 끝까지 읽을 때 나오는 토라 자체의 지침입니다.
이 반론이 놓치고 있는 점은,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안식일과 음식 규례와 십계명을 지키지 않을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성전이 없다고 해서 안식일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법정이 없다고 해서 음식 규례가 느슨해지지 않으며,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계명들은 처음부터 성전이나 법정에 달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예슈아께서도 산상수훈에서 바로 그 점을 말씀하셨고, 우리는 1권 「거룩한 성전」에서 그 말씀을 자세히 읽었습니다.
마태복음 5:19 그러므로 이 가장 작은 계명들 가운데 하나라도 어기고 또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는 하늘들의 바실레이아(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라 불릴 것이나, 그것을 행하고 가르치는 자는 하늘들의 바실레이아(왕국)에서 크다 불릴 것이다.
자기 손으로 범칙금 고지서를 쓰는 화난 운전자는 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고지서를 쓸 수 없으니 이제 온 동네의 빨간불을 마음대로 무시하고 달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운전자 또한 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