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정에 선 바울 · 46장 / 전체 47장
성령께서 지킬 수 있게 하십니다
이 부에서 다룰 마지막 주장은 한 구절을 근거로 한 논증도 아니고 꿈도 아닙니다. 흔히 여러 해 애써 본 뒤에 사람들이 조용히 하는 말입니다.
“예슈아를 믿고 성령을 받은 뒤에도, 하나님의 계명들을 온전히 지키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이 문장에는 교만이 없습니다. 대개는 애써 보고, 실패하고, 다시 애써 보다가 지쳐 버린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입니다. 부드럽게 대답해야 마땅한 말이지만, 참되게 대답해야 마땅한 말이기도 합니다.
이 책 2부에서 계명을 지킬 수 있는지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는 요한의 말과 「내 멍에는 쉽고」라는 예슈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21장). 계명들 가운데 흠 없이 나아간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만났습니다(22장). 그 계명은 너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라는 모세의 말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원함과 행함을 일으키신다는 바울의 말도 들었습니다(20장). 그 길을 다시 걸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그 장들이 정면으로 다루지 않은 한마디가 더 붙어 있습니다. 「예슈아를 믿고 성령을 받은 뒤에도」입니다. 이 장은 바로 그 말을 다룹니다.
없는 구절
간단한 찾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 전체에서 이런 문장을 찾아보십시오. “그들은 믿고 성령을 받았으나, 계명들이 너무 어려워 지킬 수 없었다.”
그런 문장은 선지서에도, 복음서에도, 사도행전에도, 어느 서신에도 없습니다. 성경은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직하게 들려줍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한 사람 안에 오셨는데 그 뒤에 계명들이 그 사람에게 감당하기 벅찼다고 말하는 구절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구절들은 모두 그 반대를 말합니다.
성령은 무엇을 위해 주셨는가
하나님께서 친히 왜 그분의 영을 주시는지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 36:26-27 내가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 영(루아흐)을 두겠다. 내가 너희 살(바사르)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너희에게 살(바사르) 같은 마음을 주겠다. 내가 내 영(루아흐)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내 규례(호크)대로 행하고 내 판결(미쉬파트)을 지켜 행하게 하겠다.
27절은 8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는 그 앞 절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하시는 일을 26절이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 살(바사르)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너희에게 살(바사르) 같은 마음을 주겠다.」 마음에 해당하는 말은 레브(마음)로, 선택이 이루어지는 속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옛 마음을 잘 가르쳐 고쳐 쓰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옛 마음을 꺼내고 새 마음을 넣어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어서 27절은 새 마음과 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말합니다. 「너희가 내 규례(호크)대로 행하고 내 판결(미쉬파트)을 지켜 행하게 하겠다.」 「지켜」에 해당하는 말은 샤마르(지키다)로, 지키다, 살피다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계명들이 지켜지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심장 이식 수술을 받은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수술 전 여러 해 동안 그는 계단 한 층도 오르지 못했습니다. 이제 수술은 끝났고, 새 심장은 튼튼하며, 의사들은 걷기 시작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계단 아래에 앉아 “못 하겠습니다. 제 심장은 너무 약해요”라고 말합니다. 그는 예전에 가졌던 심장은 정확히 말하고 있지만, 지금 자기 안에서 뛰고 있는 심장을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주장도 똑같이 합니다. “나는 성령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해 놓고는, 계명들에 대해서는 신자가 성령을 받지 않은 것처럼 말합니다.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
이 주장이 옳은 것이 하나 있고, 성경이 그것을 먼저 말합니다. 육체는 제 힘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 이는 노모스(법)가 사르크스(육체)로 인해 약하여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으니, 자기 아들을 죄의 사르크스(육체)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죄로 인해 사르크스(육체)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기 때문이다.
사르크스(육체)는 육체, 곧 제 힘에만 맡겨진 사람의 본성을 가리킵니다. 이 점에서 바울은 지친 신자와 완전히 같은 생각입니다. 육체에 맡겨 두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장은 계속되며, 그 주어는 육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입니다.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 보내시고」 처리하셨습니다. 「할 수 없었던」으로 시작하는 문장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이어서 말하고, 43장에서 읽은 다음 절은 그것이 무엇으로 이어지는지 말합니다. 율법의 요구가 「사르크스(육체)를 따르지 않고 프뉴마(영)를 따라 페리파테오(걷다/행하다)하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가 할 수 없다는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바울의 문장 한가운데서 멈추고, 그 한가운데를 끝으로 여깁니다.
육체 안에 있지 않다
이어서 바울은 이 주장이 말하는 바로 그 사람들, 곧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로 눈을 돌립니다.
로마서 8:9 그러나 하나님의 프뉴마(영)가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여러분은 사르크스(육체) 안에 있지 않고 프뉴마(영) 안에 있다. 누구든 메시아(그리스도)의 프뉴마(영)를 가지지 않으면 그분의 사람이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이 안에 거하시는 사람은 「사르크스(육체) 안에 있지 않고 프뉴마(영) 안에 있다」고 말하고,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분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이 주장과 나란히 놓아 보십시오. 「육체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육체 안에 있는 사람을 말하고, 「나는 성령을 받았다」는 육체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을 말합니다. 같은 한 사람에 대해 둘 다 온전한 진실일 수는 없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과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킬 수 없다는 말은 한 문장에 함께 들어가지 않습니다.
요한도 낱말 하나를 놀랍게 돌려 같은 말을 합니다.
요한일서 3:9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이마다 죄를 행하지 않으니, 그분의 씨앗이 그 안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 없으니, 하나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나는 지킬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같은 종류의 말을 쓰되 방향을 반대로 돌립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이는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 없으니」라고 합니다. 헬라어는 우 뒤나타이(할 수 없다), 곧 그럴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을 순종할 수 없는 사람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요한이 그 사람이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계속해서 죄를 짓는 일이며, 그 까닭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입니다.
탄식과 그 대답
어떤 이들은 로마서 7장으로 대답합니다. “바울 자신도 「내가 원하는 선을 행하지 않고」(로마서 7:19)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못 했다면 내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장의 일부는 43장에서 읽었습니다. 그 탄식은 이렇게 끝납니다.
로마서 7:24-25 나는 비참한 사람이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겠는가? 우리 주 예슈아(예수) 메시아(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런즉 나 자신은 누스(지성, 영적영역)로는 하나님의 노모스(법)를 섬기고 사르크스(육체)로는 죄의 노모스(법)를 섬긴다.
부르짖음은 24절에 나옵니다. 「나는 비참한 사람이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겠는가?」 대답은 바로 다음 숨에, 25절에 나옵니다. 「우리 주 예슈아(예수) 메시아(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8장 전체가 그 대답을 펼쳐 보이며, 생명의 성령께서 그를 해방시키십니다.
7장의 부르짖음을 성령으로 충만한 신자가 평생 지닐 상태로 읽는 것은, 물음에서 멈추고 바울이 바로 다음 절에 쓴 대답은 끝내 읽지 않는 것입니다. 물에 빠져 살려 달라고 외치는 사람의 말만 따오고, 배가 도착하는 대목은 빼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은 결코
바울은 이 주장이 가장 참되게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들을 위한 약속도 줍니다.
고린도전서 10:13 여러분에게 임한 시험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없다; 하나님은 신실하시어,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시험받도록 두지 않으시고, 시험과 함께 여러분이 견딜 수 있는 출구도 만들어 주실 것이다.
시험에 해당하는 말은 페이라스모스(시험, 시련)입니다. 바울은 시험이 없으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험에 대해 세 가지를 말합니다. 시험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어서 아무도 겪어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은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시험받도록 두지 않으시고」, 시험과 함께 「출구도 만들어 주실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를 「지키기는 너무 어렵습니다」와 나란히 읽어 보십시오. 이 주장은 계명을 지키는 일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이라고 말하고, 바울은 하나님은 신실하시어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시험받도록 두지 않으시고」라고 말합니다.
바꿔치기
「너무 어렵다」가 성경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다른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가 슬며시 다른 하나의 자리를 차지할 때 들어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한쪽으로 밀려나고, 그 자리에 사람의 힘이 들어섭니다. 그러면 계명들을 사람의 힘에 대어 재게 되고, 당연히 너무 어렵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로마서 8:3이 말했듯이, 계명들은 육체 혼자에게는 언제나 너무 어려웠습니다.
일은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진 적이 없습니다. 「너무 어렵다」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더 애쓰라」도 「그만 애쓰라」도 아닙니다. 그 대답은 「그 말씀은 네게 매우 가까워, 네 입과 네 마음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행할 수 있다」(신명기 30:14)이고, 「그분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요한일서 5:3)입니다. 계명들을 주신 분이 그분의 영도 주셨기 때문입니다.
3부를 마치며
이로써 3부가 끝납니다. 우리는 안디옥의 한 식탁에서 시작해, 두 여인과 두 언약으로 넘어갔고, 갈라디아서를 한 줄씩 읽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과 싸우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맞선 것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값으로 요구된 할례, 그리고 갈라디아 사람들이 모세에 대해 듣기 훨씬 전부터 알던 종살이였습니다. 날들과 달들과 정한 때들은 하나님의 것이었고,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것들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적대하는 눈으로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르크스(육체)로 완성하려」 한 그 육체는 몸에 새겨 자랑하려는 표였습니다.
이어서 우리는 갈라디아서 곁에 있는 서신들을 읽었습니다. 허물은 토라가 아니라 백성에게서 찾아졌습니다. 야고보의 거울은 우리를 들여다보고 행하라고 부릅니다. 첫 언약은 「나는 너를 … 이끌어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다」로 열렸고, 그 집은 선물이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낡아지는 것은 땅의 제사장 직분과 성소와 제사들이며, 새 언약이 마음에 기록하는 것은 같은 토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시내산 전에도 그분의 규례들과 그분의 토라를 주셨습니다. 메시아께서 지키신 일은 우리가 지키는 일의 본입니다. 사랑은 계명들을 하나로 모으지, 녹여 없애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율법에서가 아니라 죄의 법에서 해방시키십니다. 어떤 꿈도 기록된 말씀보다 높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계명들이 지켜지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이 책을 닫기 전에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마흔여섯 장에 걸쳐 율법에 관한 주장들을 살펴보았고, 그 가운데 많은 주장이 바울의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이제 마침내 율법에 관한 바울 자신의 말과, 바울이 결코 하지 않은 말로 눈을 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