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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정에 선 바울 · 39장 / 전체 47장

예레미야 곁에 놓은 히브리서 8장 13절

이쯤에서 조바심을 내는 독자가 있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좋습니다. 예레미야에는 「내 토라」라고 되어 있지요. 하지만 히브리서는 첫 언약이 낡아지고 사라져 간다고 말합니다. 낡아지고 사라져 가는 법을 하나님이 사람 마음에 다시 넣어 주시겠습니까? 결코 그럴 리 없습니다. 히브리어 낱말은 같을지 몰라도 뜻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기록하시는 것은 새로운 무언가입니다.”

깊이 생각해 본 반론입니다. 히브리서 8장 13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무언가 낡아 가고 있다고 그 구절이 말한다는 점도 제대로 짚었습니다. 또한 예레미야에 쓰인 낱말이 토라라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면서, 다만 그 낱말이 다른 뜻을 띠게 되었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따라서 두 가지 물음에 답해야 합니다. 여기서 같은 낱말이 다른 뜻을 품을 수 있는가? 그리고 히브리서가 낡아 간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역사를 지닌 낱말

낱말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서가 인용하는 구절은 예레미야 31장 33절입니다.

예레미야 31:33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베리트는 이와 같으니라. 여호와의 말이라. 내가 내 토라를 그들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히브리어로는 토라티(내 토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기록하실 것을 가리키려고 고르신 낱말입니다.

낱말은 빈손으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독자가 31장에 이르기 전에도 예레미야는 이 낱말을 거듭해서 썼고, 그 뒤로도 계속 씁니다. 쓸 때마다 똑같은 대상을 가리킵니다. 책 뒷부분에 나오는 보기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44:10 그들이 오늘까지 겸비하지 아니하며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 앞에 세운 내 토라와 내 후카를 따라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이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 앞에 세운」 토라라고 하신 그 토라는 시내산의 토라입니다. 예레미야는 31장 훨씬 앞에서도 이 낱말을 똑같은 뜻으로 씁니다. 「내 토라를 거절하였음이라」(예레미야 6:19), 조상들이 「내 토라를 지키지 아니하였느니라」(예레미야 16:11), 「내가 너희 앞에 세운 내 토라를 따라 행하지 아니하며」(예레미야 26:4). 예레미야에서 「내 토라」는 하나님이 백성에게 주셨으나 그들이 지키지 못한 바로 그 토라입니다. 같은 선지자가 같은 책에서 「내가 내 토라를 그들 속에 두며」라고 말할 때, 다른 대상으로 말을 바꾸었다는 기미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지난 장에서 보았듯이 에스겔도 같은 내용을 다른 낱말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으로 하여금 자기 규례(후킴)대로 행하게 하시고 자기 판결(미쉬파트)을 지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에스겔 36:27). 이는 토라가 자기 계명들을 일컬을 때 쓰는 바로 그 낱말들입니다.

히브리서가 덧붙이지 않은 것

다음으로 히브리서가 예레미야를 어떻게 인용하는지 살펴보십시오. 「내 노모이(법들)를 그들의 디아노이아(생각) 안에 두며, 그들의 카르디아(마음들, 혼적영역들)에 기록하겠고」(히브리서 8:10).

히브리서는 그 낱말을 헬라어 노모이, 곧 「내 노모이(법들)」로 옮기고는 그대로 넘어갑니다. 여기서 「내 노모이(법들)」가 예레미야에 쓰인 뜻과 다른 무언가를 가리킨다는 문장은 단 한 줄도 덧붙이지 않습니다. 그런 구절은 아예 없습니다.

유언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가 “내 집을 아들에게 물려준다”고 적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뒤, 법정에서 누군가 유언장에 적힌 「집」은 엘름가에 있는 집이 아니라 아버지가 한 번도 입에 올린 적 없는 다른 집을 뜻한다고 주장합니다. 판사는 딱 한 가지를 물을 것입니다. 유언장 어디에 그렇게 적혀 있는가? 문서가 낱말의 뜻을 새로 규정하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그 뜻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토라에도 똑같은 원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4: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지 말고 거기서 빼지도 말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미츠바)들을 지켜라.

같은 낱말을 다른 뜻으로 읽으려면 성경 어딘가에 그렇다는 말이 직접 나와야 합니다. 그런 구절이 없다면, 새로운 뜻은 본문에서 찾아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본문에 덧붙인 것입니다.

낡아 가는 것은 무엇인가

두 번째 물음은 앞서 본 주장이 근거로 삼는 구절에 달려 있습니다.

히브리서 8:13 새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첫 번째 것을 낡은 것으로 만드셨으니, 낡아지고 늙어가는 것은 사라지기에 가깝다.

두 낱말에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낡은 것으로 만들다」에 해당하는 원어는 팔라이오오(오래되게 하다)입니다. 「늙어가는」에 해당하는 원어는 게라스코(나이를 먹다)로, 사람이 나이가 들어 갈 때 쓰는 말입니다. 무언가 나이를 먹어 가고 있는데, 문제는 그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8장은 13절에서 끝나고, 히브리서 9장이 열리면서 우리에게 그 답을 알려 줍니다.

히브리서 9:1 이제 첫 번째 디아데케(언약)에도 예배의 디카이오마(의로운-행위 / 규례를 행함)들과 세상적인 성소가 있었으니,

글쓴이는 「늙어가는」이라는 말을 끝내자마자 곧바로 「예배의 디카이오마(의로운-행위 / 규례를 행함)들과 세상적인 성소」로 눈길을 돌립니다. 그러고는 곧장 그것들을 묘사해 나갑니다. 장막, 등잔대, 상, 안쪽 방,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피를 가지고 들어가던 대제사장 이야기입니다.

편지의 나머지 부분도 세 가지 면에서 똑같은 요점을 짚어 줍니다. 첫째는 제사장 직분입니다.

히브리서 7:12 제사장직이 바뀌면 반드시 노모스(법)의 변경도 생긴다.

둘째는 성소입니다. 「메시아(그리스도)께서 오실 선한 것들의 대제사장으로 나타나시어, 손으로 짓지 않은 더 크고 완전한 성막을 … 통해」(히브리서 9:11).

셋째는 희생 제사입니다.

히브리서 10:8-9 위에서 “제사들과 제물들과 번제물들과 속죄제물들을 원하지도 않으셨고 기뻐하지도 않으셨다”고 말씀하셨으니 — 이것들은 노모스(법)에 따라 드려지는 것들이라 — 그다음에 “보소서, 내가 당신의 텔레마(뜻)를 행하러 왔습니다”라고 이르셨으니,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첫 번째 것을 폐하신다.

이 대목에서 첫 번째 것은 「노모스(법)에 따라 드려지는」 예물들이고, 두 번째 것은 메시아가 행하러 오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히브리서에서 바뀌는 것은 제사장 직분과 성소와 희생 제사이며, 낡아 가는 것도 바로 이것들입니다.

세 절 간격

히브리서 8장 10절과 8장 13절은 같은 장에서 세 절 간격을 두고 나란히 서 있으므로, 두 구절을 나란히 놓고 읽어야 합니다.

10절은 이렇습니다. 「내 노모이(법들)를 그들의 디아노이아(생각) 안에 두며, 그들의 카르디아(마음들, 혼적영역들)에 기록하겠고」.

13절은 이렇습니다. 「낡아지고 늙어가는 것은 사라지기에 가깝다.」

만일 낡아 가는 대상이 「내 노모이(법들)」라면 13절은 10절을 지워 버리는 셈이 되고, 하나님은 당장 사라지게 하실 바로 그것을 백성의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약속하시는 꼴이 됩니다. 글쓴이는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들은 낡아 가는 쪽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 언약을 이루는 알맹이입니다.

그러므로 앞서 본 주장은 구절은 제대로 짚었으나 주어를 잘못 찾았습니다. 첫 언약에서 무언가 낡아 가고 있었던 것은 맞습니다. 바로 예배의 규례들과 세상에 속한 성소, 그리고 거기서 섬기던 제사장 직분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하나님의 토라이며, 그 약속을 전한 선지자는 책 전체에 걸쳐 조상들 앞에 놓였던 바로 그 토라를 가리키려고 이 낱말을 썼습니다.

은혜와 토라를 서로 맞서게 하려고 흔히들 꺼내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는데, 시내산 이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산에 이르기까지는 줄곧 이스라엘을 오래 참으셨다가, 율법이 주어진 뒤에야 비로소 진노하셨다고 말합니다. 이집트에서 시내산까지 가는 길은 한 장이면 충분히 걸어 볼 수 있을 만큼 짧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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