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정에 선 바울 · 36장 / 전체 47장
히브리서 8장과 백성의 실패
앞 장은 히브리서의 한 문장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많은 독자는 이 한 문장으로 모든 질문에 답이 났다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첫 언약에 흠이 없었다면 둘째 언약을 찾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첫 언약에는 흠이 있었다는 뜻이고, 사람들은 흔히 그 첫 언약이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이라고 여깁니다.
여기서부터 주장은 대개 이렇게 흘러갑니다. “히브리서는 첫 언약에 흠이 있어서 하나님이 새 언약을 주셨다고 말한다. 물론 율법 자체는 완전하다. 하지만 사람은 율법을 지킬 수 없고, 율법이 있는 곳에는 진노가 따른다.”
언뜻 듣기에는 신중하고 공손한 말 같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율법을 나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죄인에게는 율법이 알맞은 도구가 아니었기에, 하나님이 율법을 치우시고 더 나은 것을 가져오셨다고 말할 뿐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서에는 첫 언약에 흠이 없지 않았다는 말이 나오며, 그 내용까지는 분명히 본문에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히브리서는 누구에게서 그 흠을 찾으셨는지 정확히 밝힙니다. 그것이 바로 이 장에서 다룰 주제입니다.
한 절만 더 읽어 보십시오
사람들이 흔히 빼놓고 읽는 그다음 절까지 함께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8:7-9 저 첫 번째 디아데케(언약)가 흠이 없었다면, 두 번째를 위한 자리가 찾아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흠을 잡으시며 말씀하시기를: “보라, 주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새 디아데케(언약)를 맺을 날들이 올 것이다 —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디아데케(언약)와 같지 않을 것이니, 그들이 내 디아데케(언약) 안에 머물지 않았으므로 나도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7절은 첫 언약이 흠이 없지 않았다고 말하고, 8절은 그 까닭을 바로 밝혀 줍니다. 「그들에게 흠을 잡으시며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했습니다. 흠을 잡으신 대상은 율법이 아니라 그들입니다.
두 구절에 쓰인 낱말은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7절의 「흠이 없는」은 원어로 아멤프토스(책망할 것이 없는)입니다. 8절의 「흠을 잡으시며」는 멤포마이(책망하다, 흠을 잡다)입니다. 기록자는 앞뒤로 이어지는 두 구절에서 같은 어근의 낱말을 써서, 독자가 이 연결 고리를 놓치지 않게 했습니다. 첫 언약은 책망할 것이 없지 않았는데, 그 책망은 바로 그들에게 돌아갔습니다.
9절은 「그들」이 누구이며 무엇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그들이 내 디아데케(언약) 안에 머물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언약 안에 머물지 않은 백성에게 흠을 잡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인용한 예레미야 본문은 훨씬 더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그들이 내 베리트를 깨뜨렸음이라」(예레미야 31:32).
그러므로 흠은 실제로 있었습니다. 다만 그 흠이 율법이 아니라 백성에게 있었을 뿐입니다.
프로그램과 기계
실력 있는 개발자들이 설계한 목적에 따라 깔끔하고 훌륭하게 작동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냉각팬이 깨지고 하드 드라이브가 고장 나 가는 낡은 노트북에 그 프로그램을 설치했더니, 실행할 때마다 화면이 멈춰 버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발자들에게 연락해 코드를 다 버리고 완전히 다른 프로그램을 새로 짜 달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프로그램에는 아무 문제가 없고, 기계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개발자들이 노트북 주인을 아낀다면 다른 소프트웨어를 건네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만든 프로그램을 실제로 돌릴 수 있는 새 기계를 건넬 것입니다.
히브리서 8장의 구조가 바로 이러합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 흠을 두고 어떻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지 보여 줍니다.
히브리서 8:10 이것이 저 날들 이후에 이스라엘 집과 내가 세울 디아데케(언약)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노모이(법들)를 그들의 디아노이아(생각) 안에 두며, 그들의 카르디아(마음들, 혼적영역들)에 기록하겠고,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될 것이다.
여기서 어떤 것은 새롭고 어떤 것은 그대로입니다. 이스라엘 집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도 그대로이십니다.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될 것이다.」 기록하시는 내용도 「내 노모이(법들)」입니다. 8장에서 살펴보았듯이 히브리서가 인용한 예레미야 31장 33절은 이를 「내 토라」라고 부릅니다. 달라지는 것은 그것을 기록하는 장소입니다. 「그들의 디아노이아(생각) 안에」 두시고, 「그들의 카르디아(마음들, 혼적영역들)에」 기록하십니다.
문제가 율법에 있었다면, 해결책은 다른 율법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백성 쪽에 있었기에, 고치는 일도 백성 쪽에서 이루어집니다. 새 언약은 율법을 바꾸지 않습니다. 율법이 백성 안에 자리 잡도록 백성의 마음을 바꿉니다.
하나님이 한 가지 계획을 시도해 보시고 실패하는 것을 지켜보신 뒤에 다른 계획으로 새로 시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하나님이 같은 토라를 가지고 같은 백성에게 하신 말씀을 지키시되, 이번에는 그것을 그들의 마음 위에 기록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이 있는 곳에 진노가 있다?
앞서 본 주장의 뒷부분인 “율법이 있는 곳에는 진노가 따른다”는 말은 바울의 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로마서 4:15 노모스(법)는 오르게(진노)를 이루기 때문이다. 노모스(법)가 없는 곳에는 파라바시스(범법/위반)도 없다.
우리는 27장에서 이 구절을 살펴보며, 선을 넘어선다는 뜻을 가진 파라바시스(범법)라는 낱말을 확인했습니다. 여기서는 바울이 문장을 어떻게 구성하는지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노모스(법)는 오르게(진노)를 이루기 때문이다」에서 말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 뒤에 곧바로 까닭을 덧붙입니다. 「노모스(법)가 없는 곳에는 파라바시스(범법/위반)도 없다.」
두 부분을 함께 읽으면 서로의 뜻을 풀어 줍니다. 율법은 그 안에서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진노를 쏟아붓지 않습니다. 율법이 하는 일은 선을 긋는 것이며, 그 선이 있기 때문에 선을 넘는 행동이 범법이 됩니다. 선이 없는 곳에는 넘어설 것도 없고, 선이 있는 곳에서는 그 선을 넘어서는 행동에 이름이 붙습니다.
그러므로 진노는 율법이 있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넘어서는 일, 곧 파라바시스가 있기 때문에 옵니다. 율법은 선을 표시하고, 그 선을 넘어서는 사람이 진노를 불러옵니다.
선한 것을 이용한 죄
몇 장 뒤에서 바울은 누구나 떠올릴 법한 반론을 직접 제기합니다. 계명이 내 죄를 범법으로 드러내는 선이라면, 그 선한 계명이 내게 죽음이 되었다는 말입니까? 바울은 이렇게 답합니다.
로마서 7:13 그렇다면 선한 것이 내게 죽음이 되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죄가 선을 통해 내게 죽음을 이루어 죄가 죄로 나타나게 하고, 계명을 통해 죄가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다.
바울은 계명을 선하다고 부르며, 자기가 죽음에 이른 책임을 계명에 돌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가」 그렇게 했습니다. 죽인 범인은 죄였습니다. 죄가 선한 것을 가져다 이용해서 「선을 통해 내게 죽음을 이루어」 낸 것입니다.
이 구절은 그 모든 과정에서 계명이 무슨 일을 이루었는지도 보여 줍니다. 「죄가 죄로 나타나게 하고」, 「계명을 통해 죄가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입니다. 계명이 죄를 만들어 내지 않았습니다. 계명을 통해 죄가 죄로 나타났을 뿐입니다.
따라서 죽음의 원인은 율법이 아니라 죄입니다. 바울은 한 구절 안에서 이 사실을 두 번이나 직접 못 박아 말합니다.
흠은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두 본문을 나란히 놓고 보면, 앞선 주장은 조용히 허물어집니다.
히브리서는 분명 첫 언약에 흠이 없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흠을 잡으신 대상은 「그들」, 곧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지 않았」던 백성이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가 말하는 해결책은 새로운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새겨 넣은 새로운 마음입니다.
로마서도 분명 율법이 진노를 일으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문장 안에서 진노를 범법과 연결하고, 몇 장 뒤에서는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 율법이 아니라 죄라고 분명히 지목합니다.
재판대에 오른 것은 율법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우리였습니다.
율법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설명할 때 흔히 쓰는 익숙한 비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거울입니다. 그 비유는 실제로 어디에서 나왔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