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정에 선 바울 · 35장 / 전체 47장
갈라디아서의 영과 육체
하나님의 계명을 진지하게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흔히 갈라디아서의 한 구절을 들이대곤 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왜 육체로 끝내려 합니까?”라는 말입니다.
이 말 밑바탕에 깔린 주장은 단순합니다. 메시아 안에 있는 삶은 성령 안에 있는 삶이며, 성령 안에 있는 삶은 사랑으로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 대신 율법으로 돌아가는 일은 성령에서 육체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길이며, 갈라디아서 3장 3절에서 바울이 직접 그렇게 말했다고 주장합니다.
진실한 신자 대다수에게 이 말은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 까닭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육체」라는 말을 들을 때 「영」의 반대말을 떠올립니다. 영은 내면적이고 살아 있으며 자유로운 반면, 육체는 외면적이며 물리적이고 규칙과 의식에 매인 것이라고 여깁니다. 계명을 이 두 번째 상자에 넣으면, 갈라디아서의 구절은 그 주장과 똑같은 말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만든 상자를 가지고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기 낱말로 썼고, 그 뜻도 스스로 밝혔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3절에서 「육체」가 무슨 뜻인지 단정하기에 앞서, 세 증인의 말을 먼저 들어 보겠습니다. 바로 앞 구절과 같은 편지의 끝부분, 그리고 바울이 로마에 보낸 편지입니다.
질문보다 앞서는 질문
갈라디아서 3:1-3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누가 여러분을 알레데이아(진리)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홀렸느냐? 예슈아(예수) 메시아(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여러분 앞에 분명히 제시되었건만. 이것 하나만 여러분에게서 알고자 한다 — 여러분이 프뉴마(영)를 받은 것이 행위들의 노모스(법)로서인가, 아니면 믿음의 들음으로서인가? 이렇게 어리석으냐? 프뉴마(영)로 시작하여 이제 사르크스(육체)로 완성하려 하느냐?
앞선 주장은 이 세 구절 가운데 셋째 구절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둘째 구절을 두고 「이것 하나만 여러분에게서 알고자 한다」라고 말합니다. 곧 그들이 프뉴마(영)를 받은 것이 「행위들의 노모스(법)로서인가, 아니면 믿음의 들음으로서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은 성령을 어떻게 받았는지를 다룹니다. 다시 말해, 이 책이 1장부터 줄곧 품어 온 두 가지 질문 가운데 첫째 질문, 곧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오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메시아의 기쁜 소식을 듣고 믿었으며 성령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먼저 할례를 베풀지 않았고, 그들이 한 어떤 일로도 성령을 얻어 내지 못했습니다.
3절이 「프뉴마(영)로 시작하여 이제 사르크스(육체)로 완성하려 하느냐?」라고 물을 때, 그 대조는 여전히 2절의 대조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 시작했는데, 이제는 다른 무언가로 완성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완성하다」에 해당하는 원어는 에피텔레오이며, 완성에 이르게 하다 또는 끝마치다는 뜻입니다. 물음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무엇으로 끝마쳐지고 완성된다는 말을 듣고 있었는가 하는 것인데, 우리는 찾아온 사람들이 무엇을 전하고 있었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편지 끝에 나오는 육체
바울은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같은 사람들을 다시 언급할 때, 자신이 말하는 육체가 무슨 뜻인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우리는 찾아온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32장에서 이 두 구절 가운데 첫 구절을 읽었습니다. 이번에는 한 낱말에 주목하여 두 구절을 모두 읽어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6:12-13 사르크스(육체) 안에서 겉모습을 좋게 보이려는 이들은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도록 강요하니, 이는 메시아(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박해받지 않으려는 것뿐이다. 이는 할례받은 이들도 스스로 노모스(법)를 지키지 않으면서, 여러분이 할례받기를 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르크스(육체)로 자랑하려 함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르크스가 두 번 나옵니다. 한 번은 「사르크스(육체) 안에서 겉모습을 좋게 보이려는」에, 또 한 번은 「여러분의 사르크스(육체)로 자랑하려」에 나옵니다. 여기서 육체는 글자 그대로 할례를 행하는 몸을 가리킵니다. 그 주위를 감싼 태도는 남에게 잘 보이고 싶고 무언가 자랑할 거리를 가지려는 마음입니다. 「겉모습을 좋게 보이다」는 헬라어로 유프로소페오라는 한 낱말인데, 반듯한 얼굴을 꾸미다, 곧 겉으로 보기에 좋게 꾸미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을 갈라디아서 3장 3절과 나란히 놓아 보십시오. 갈라디아 사람들은 믿음을 통해 받은 성령으로 시작했습니다. 「사르크스(육체)로 완성」된다는 말은, 다른 사람이 자랑할 만한 표식을 몸에 지니기 전까지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말을 듣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편지에서 「육체」는 바로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할례로 완성되고 칭찬받으려는 바람을 가리킵니다. 13절은 우리가 5장에서 보았던 내용을 되풀이하여, 할례를 밀어붙이는 사람들이 「스스로 노모스(법)를 지키지 않으면서」 그렇게 한다고 말합니다.
동산에 있는 어린 과일나무를 한 그루 떠올려 보십시오. 누군가 나무를 심어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 주었더니, 나무가 살아 자라고 있습니다. 그때 이웃 사람이 울타리 너머로 몸을 내밀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는 절대 다 된 나무처럼 보이지 않을 겁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 감탄하도록 내가 나뭇가지에 밀랍 사과를 철사로 좀 매달아 주지요.” 나무는 생명으로 시작했는데, 이웃은 보기 좋은 모양을 내어 나무를 완성하려 합니다. 그 나무가 진짜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다고 해서 이를 문제 삼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밀랍 사과입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육체
바울은 로마에 보낸 편지에서도 같은 낱말을 같은 뜻으로 쓰며, 거기서는 아예 그 뜻을 명확히 규정합니다. 우리는 율법이 영의 편에 서 있음을 확인했던 7장과 8장에서 이 구절들을 읽었습니다. 여기서는 육체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알아보려고 다시 읽습니다.
로마서 8:4 · 8:7 이는 노모스(법)의 디카이오마(의로운-행위 / 규례를 행함)가 사르크스(육체)를 따르지 않고 프뉴마(영)를 따라 페리파테오(걷다/행하다)하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다. ⋯ 이는 사르크스(육체)의 프로네마(생각이 굳어 형성된 방향·지향)는 하나님을 향한 에크트라(원수됨)이기 때문이니, 하나님의 노모스(법)에 복종하지 않으며 실로 복종할 수도 없다.
이처럼 바울이 직접 내린 정의를 따르면, 육체는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지 않으며 실제로도 복종할 수 없는 편입니다. 로마서 7장 14절은 율법 자체가 어느 편에 서 있는지 이미 이렇게 밝혔습니다. 「노모스(법)가 프뉴마티코스(영적)인 것임을 알지만 나는 사르키코스(육체적)이며」.
같은 장에서 성령에 관해서도 말합니다. 4절은 노모스(법)의 디카이오마, 곧 규례가 「사르크스(육체)를 따르지 않고 프뉴마(영)를 따라 페리파테오(걷다/행하다)하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디카이오마라는 낱말은 의로운 요구, 곧 실행된 규례를 뜻합니다. 성령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야말로 율법의 요구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직접 쓰는 용어를 따르면, 기준선은 사람들의 주장과 정반대로 그어집니다. 육체는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는 편이고, 성령은 그 율법 안에서 걷는 편입니다.
율법인가, 사랑인가?
앞선 주장은 마치 사람이 율법과 사랑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하는 것처럼 둘을 대립시키기도 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같은 편지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답했는지 29장에서 보았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4절에서 바울은 「온 노모스(법)가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한 말씀에서 완성」된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씀」은 헬라어 로고스이고, 「사랑하라」는 아가페(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에서 멀어지는 길이 아니라 율법이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31장에서 보았듯이,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이 「사르크스(육체)의 행위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바로 토라가 금하는 일들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여 성령으로 끝맺다
따라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완전해진다는 말은, 믿음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아 시작해 놓고, 나중에 남들이 자랑할 만한 표식을 몸에 칼로 새기기 전까지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말을 듣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찾아온 사람들의 복음이며, 갈라디아서 전체가 맞서 싸우는 대상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 안에서 걷는 신자가 육체로 미끄러져 내려갔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바울이 직접 내린 정의를 따르면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육체는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하는 것이며, 성령을 따라 걷는 사람들은 율법의 요구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입니다. 성령 안에서 시작하여 성령 안에서 계속 나아간다는 말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힘을 입어 하나님이 명령하신 길 안에서 걷는다는 뜻입니다.
이제 더 큰 질문 하나가 3부 전체에 걸쳐 떠오릅니다. 토라가 거룩하고 영적이라면, 하나님은 왜 새 언약을 약속하셨을까요? 흔히 히브리서의 한 구절을 들어 답하곤 합니다. 히브리서 8장 7절에 나오는 「저 첫 번째 디아데케(언약)가 흠이 없었다면, 두 번째를 위한 자리가 찾아지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첫 언약에 흠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문장은 하나님께서 누구를 두고 흠을 찾으셨는지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