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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정에 선 바울 · 34장 / 전체 47장

헬라어 접두사 하나, 세 낱말

영어에는 낱말 앞에 붙어서 뜻을 바꾸는 작은 조각들이 있습니다. 「tie(묶다)」 앞에 「un」을 붙이면 정반대 뜻이 되고, 「build(짓다)」 앞에 「re」를 붙이면 다시 짓는다는 뜻이 됩니다. 어릴 때부터 배운 아주 작은 조각들이라 우리는 평소 의식하지 않고 씁니다.

헬라어에도 이런 조각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파라(곁에)입니다. 파라는 홀로 쓰일 때 신약성경에 이백 번가량 나오는 흔한 전치사로, 곁에, 나란히, 가까이에, 혹은 지나쳐서라는 뜻을 지닙니다. 대개는 아무런 놀라운 일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조각이 어떤 낱말 앞에 달라붙으면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낱말이 몸을 돌려 정반대쪽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장에서 이런 현상을 한 번 보았습니다. 이번 장은 그 짜임새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세 낱말, 곧 파라테레오, 파라바이노, 파라클레토스를 다룬 연구를 따라갑니다. 파라가 어떤 일을 하는지 보려면 먼저 파라가 붙지 않은 원래 낱말부터 알아야 합니다.

바탕이 되는 세 낱말

첫째는 테레오(지키다)입니다. 우리는 지난 장에서 「너희가 나를 아가페(사랑)하면, 내 계명들을 지키라」(요한복음 14:15) 하신 예슈아의 말씀에서 이 낱말을 만났습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이 낱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붙드는 것, 곧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을 가리킵니다.

둘째는 바이노(걷다, 정해진 길을 가다)입니다. 이 낱말은 신약성경에서 홀로 쓰이지는 않지만, 여기서 나온 낱말들은 걷고 행한다는 뜻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그립니다.

셋째는 클레토스(부름받은)입니다. 부름을 받는 쪽에 서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부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사람은 다만 그 부름을 받습니다. 바울은 믿는 이들을 가리켜 이 낱말을 씁니다.

로마서 1:6-7 여러분도 예슈아(예수) 메시아(그리스도)의 부름받은 자들로서 그들 가운데 있다. 로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들, 부름받은 하기오이(거룩한 자들) 모두에게,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슈아(예수) 메시아(그리스도)로부터 하리스(은혜)와 에이레네(평화)가 있기를 바란다.

로마에 있는 신자들은 스스로 자기를 부른 것이 아니라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로써 세 가지 그림이 그려집니다. 지키는 자를 뜻하는 테레오, 걷는 자를 뜻하는 바이노, 부름을 받는 자를 뜻하는 클레토스입니다. 이제 여기에 파라를 더해 보겠습니다.

지키는 일이 엿보는 일이 되다

파라테레오는 파라와 테레오가 합쳐진 낱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로빈슨-피어폰트 2018년판 헬라어 본문에서 이 낱말이 나오는 여섯 곳을 모두 짚어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다섯 곳에서는 원수들이 고발하거나 함정에 빠뜨리거나 죽이려는 목적으로 예슈아나 바울을 감시합니다. 여섯 번째는 갈라디아서 4장 10절인데, 거기서 갈라디아 사람들은 똑같은 적대감을 품고 하나님의 정해진 때들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두 낱말을 나란히 놓아 보면 접두사가 무슨 일을 했는지 드러납니다. 테레오는 계명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지키는 것입니다. 파라테레오는 계명들 곁에 서서 흠을 잡으려는 사람이 감시하는 것입니다. 뿌리는 같으나 마음은 정반대입니다.

걷는 일이 선을 넘는 일이 되다

파라바이노는 파라와 바이노가 합쳐진 낱말입니다. 길을 걷는 일이 길에서 벗어나는 일, 곧 경계선을 넘어 그 너머로 계속 나아가는 일이 됩니다. 이 낱말은 로빈슨-피어폰트 2018년판 신약성경에 네 번 나오는데, 처음 두 번은 한 대화 속에 나란히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5:2-3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파라도시스(전승/전통)를 파라바이노(앞서나가-이탈/위반)합니까? 그들은 빵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도 너희의 파라도시스(전승/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파라바이노(앞서나가-이탈/위반)하는가?

바리새인들이 예슈아의 제자들을 겨냥해 이 낱말을 쓰면서 왜 장로들의 전통을 파라바이노하느냐고 묻자, 예슈아께서는 똑같은 낱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십니다. 공격하려고 썼던 낱말이 그분께서 답하시는 말씀이 됩니다. 경계선을 넘어선 자들은 바로 그들이었고, 그들이 넘은 경계선은 하나님의 계명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유다의 경우입니다.

사도행전 1:25 이 사역과 사도직의 제비를 받도록 하시기 위함이니, 유다는 거기서 파라바이노(앞서나가-이탈/위반)하여 자기 곳으로 갔습니다”라고 했다.

유다는 그저 발을 헛디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졌던 자리를 떠나 「자기 곳으로」 갔습니다.

네 번째는 가르침에 관한 경고입니다.

요한이서 1:9 파라바이노(앞서나가-이탈/위반)하여 메시아(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지 않는 이마다 하나님을 가지지 못한다; 메시아(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무는 이는 아버지와 아들 둘 다를 가진다.

이 구절은 한 번 실수한 사람이 아니라, 메시아의 가르침을 지나쳐 계속 걸어가는 사람, 그 안에 「머물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단순히 순종하지 못한 수준을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메시아의 가르침을 넘어, 주어진 것보다 앞서 나가는 자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지나쳐 앞서 나가는 모든 가르침이 이 구절에 해당합니다.

각자 자기 주로가 정해져 있는 육상 경기장의 달리기 선수를 떠올려 보십시오. 자기 주로 안에서 힘껏 달리는 것이 바이노입니다. 선을 넘어 옆 주로로 들어선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 달리는 것이 파라바이노입니다. 그 선수는 여전히 움직이고 여전히 땀을 흘리며 어쩌면 아주 빠를 수도 있지만, 이미 자기 주로를 벗어났기에 경기는 그 기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낱말에서 나온 명사가 30장에 등장했습니다. 바울이 행위의 길을 다시 세운다면 자기가 「범법자」로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 헬라어가 바로 선을 넘는 자라는 뜻의 파라바테스였습니다.

곁으로 오시는 부름받은 이

세 번째 낱말은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립니다. 파라클레토스는 파라와 클레토스가 합쳐진 말로, 곁으로 오도록 부름받은 이를 뜻합니다. 부름을 받는 자가 다가오는 자가 됩니다.

이 낱말은 신약성경에 다섯 번 나오는데, 요한복음에 네 번, 요한일서에 한 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14:16 나는 아버지께 구할 것이고, 아버지께서 다른 파라클레토스(옆에 오셔서 부르시는 분)를 너희에게 주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머물게 하실 것이니,

YLV 는 풀이에서 이 뜻을 「옆에 오셔서 부르시는 분」이라고 밝힙니다. 예슈아께서는 파라클레토스 곧 거룩한 영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요한복음 14:26)라고 하실 때 이 낱말을 다시 쓰십니다. 그분은 「나에 대하여 증언하실 것」(요한복음 15:26)입니다. 또한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파라클레토스(옆에 오셔서 부르시는 분)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실 것」(요한복음 16:7)이라고 하십니다.

다섯 번째는 예슈아 자신을 가리켜 말합니다.

요한일서 2:1 내 어린 자녀들아, 이것들을 쓰는 것은 너희가 죄를 짓지 않도록 하려 함이다; 그러나 누가 죄를 짓더라도,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파라클레토스(옆에 오셔서 부르시는 분)이신 의로운 예슈아(예수) 메시아(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다.

이번에 파라는 사뭇 다른 일을 해냈습니다. 파라테레오와 파라바이노에서는 좋은 뜻을 정반대로 뒤집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수동적인 뜻을 능동적인 뜻으로 바꿉니다. 클레토스는 부름을 받고 그 부름을 받아들이는 자이지만, 파라클레토스는 우리 곁에 서도록 부름받은 분이며, 요한의 글에서는 직접 오시고 가르치시고 증언하시는 분입니다. 방향이 뒤집히는 움직임은 같으나 그 결과만 다릅니다.

짜임새

기본 낱말뜻파라가 붙은 낱말뜻
테레오지키다, 순종하다파라테레오적의를 품고 감시하다
바이노정해진 길을 걷다파라바이노선을 넘어 지나쳐 가다
클레토스부름받은 자파라클레토스곁으로 오도록 부름받아 직접 오시는 이

파라는 곁에, 나란히, 지나쳐서라는 뜻, 곧 정해진 자리를 떠나는 움직임을 품고 있습니다. 이 접두사가 순종을 뜻하는 낱말과 만나면 적대감이나 범법이라는 결과가 나옵니다. 수동적으로 받는다는 뜻의 낱말과 만나면 능동적인 임재라는 결과가 나옵니다.

이 짜임새가 보여 주는 것

여기서 세 가지 사실이 따라 나옵니다.

첫째는 갈라디아서 4장 10절에 관한 것입니다. 지키는 일의 반대는 잊어버리는 일이 아니라 적의를 품고 감시하는 일입니다. 바울이 경고한 것은 하나님의 정해진 때들을 지키는 일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그 날들을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 곧 하나님께 순종하여 지키는 자로 서느냐 아니면 엿보는 자로 서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바울 자신도 고린도 교회에 「헤오르타조(동사, 절기)를 지키자」라고 말했습니다.

둘째는 범법에 관한 것입니다. 파라바이노는 부주의한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선을 넘어 계속 밀고 나가는 행위입니다. 요한이서 1장 9절이 그토록 무거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구절은 메시아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자를 겨냥하며, 성경을 앞질러 달려가는 모든 가르침이 이 경고 아래 놓입니다.

셋째는 성령에 관한 것입니다. 영어 성경들이 파라클레토스를 「돕는 자」로 옮길 때, 그 번역은 참되지만 작은 것을 말할 뿐입니다. 이 낱말 자체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합니다. 성령은 단지 요청받을 때 도와주는 누군가가 아닙니다. 그분은 곁으로 오도록 부름받으셨고, 실제로 오시는 분입니다. 그 진리의 온전한 무게가 단 하나의 낱말에 실려 있으며, 파라가 그 무게를 나릅니다.

작은 접두사 하나가 순종을 의심으로, 걸음을 범법으로 바꾸어 놓고, 수동적인 낱말을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의 이름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성령은 갈라디아서가 다음에 시선을 돌리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프뉴마(영)로 시작하여 이제 사르크스(육체)로 완성하려 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질문을 율법 지키는 일을 경고하는 말로 듣는데, 여기서 바울이 말한 육체가 무엇을 뜻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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