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정에 선 바울 · 32장 / 전체 47장
갈라디아 사람들의 이교도 시절
우리 대다수는 갈라디아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 딱히 정리해서 듣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그만 미끄러져 토라로, 모세와 율법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크게 놀라 이를 다른 복음이라 부르며 저주를 선언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8-9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하면, 아나테마(저주받은 것)가 될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한 것같이 이제 다시 말하니, 여러분이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누가 여러분에게 전하면, 아나테마(저주받은 것)가 될지어다.
이렇게 들으면 교훈은 분명해 보입니다. 구원받은 뒤에 토라로 돌아가는 일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위험이며, 바울이 「아나테마(저주받은 것)」라는 말을 두 번이나 쓸 만큼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29장에서 우리는 갈라디아서 본문이 무엇을 「다른 복음」이라 부르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 장에서는 사람에 관한 다른 질문을 던져 보려 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누구였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누가 그들에게 할례를 강요했는지 묻는 것입니다. 흔히 하는 이야기 속의 「돌아갔다」라는 말은, 그들이 예전에 그곳에 있었던 적이 있어야만 성립합니다.
살아 본 적 없는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어떤 친구가 오하이오주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고 미국을 떠나 본 적이 없다고 해 봅시다. 어느 날 누군가 “그 친구가 포르투갈로 돌아간대”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여러분은 그 말을 즉시 가로막을 것입니다. 친구는 포르투갈에 가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포르투갈로 이주하는 길일 수도 있고, 어쩌면 잘못된 선택을 하는 중일 수도 있지만, 무엇을 하든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의 과거를 어떻게 묘사하는지 들어 보십시오.
갈라디아서 4:8-9 그러나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래 신이 아닌 것들에게 종노릇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아니 오히려 하나님에게 알려진 바 되었으니, 어찌하여 약하고 가난한 스토이케이온(기초)들에게 다시 돌이키려 하느냐? 다시 새로 그것들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모세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란 사람들을 묘사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을 건네는 갈라디아 사람들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민족들 가운데서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이었고, 바울이 일깨워 주는 그들의 과거는 모세 아래 살던 삶이 아니라 신이 아닌 것들을 섬기던 삶이었습니다. 토라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토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많은 것을 시사하는 동사 두 개를 씁니다. 첫째는 기노스코(알다)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아니 오히려 하나님에게 알려진 바 되었으니」. 바울은 문장 도중에 자기 말을 고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 나서서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먼저 아셨습니다. 둘째는 둘류오(종으로 섬기다)입니다. 그들은 예전에 종이었으며, 이제 「다시 새로 그것들에게 종노릇하려」 합니다.
이 구절은 그들이 무엇에 매여 종노릇하게 될지 직접 밝혀 줍니다. 「약하고 가난한 스토이케이온(기초)들」입니다. 바울은 「모세의 토라에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스토이케이온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어서 바울이 날과 달에 관해 무엇이라 말하는지는 33장의 주제입니다. 지금은 이 한 가지를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무엇으로 돌아서고 있었든, 그것은 예전에 겪었던 것과 같은 종살이로 돌아가는 길이었으며, 그 종살이는 신이 아닌 것들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강요된 것
그러므로 갈라디아 사람들은 스스로 발걸음을 옮겨 시내산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밖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들어왔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무엇인지 밝히며, 자기 이름을 걸고 경고합니다.
갈라디아서 5:2 보라, 나 바울이 여러분에게 말하니, 여러분이 할례를 받으면 메시아(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첫마디부터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보라에 해당하는 말은 이데(보라, 주목하라)입니다. 다음 구절에 나오는 동사는 마르튀로마이(증인을 부르다, 엄숙히 증언하다)입니다. 「내가 또 할례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니」. 바울은 가볍게 개인 의견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법정에 서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안식일이나 절기나 음식 규례에 관해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 함을 얻는 방편으로 받는 할례에 관해 증언합니다. 3절과 4절에 따르면, 「노모스(법) 안에서 의롭게 되려는」 사람은 「메시아(그리스도)에게서 단절되었」습니다. 외부에서 온 방문자들이 가져온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방문자들은 누구였는가
이어서 바울은 할례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려, 그들이 왜 그렇게 했는지 알려 줍니다.
갈라디아서 6:12 사르크스(육체) 안에서 겉모습을 좋게 보이려는 이들은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도록 강요하니, 이는 메시아(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박해받지 않으려는 것뿐이다.
그들을 움직인 동기는 하나님의 계명을 향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과 안전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할례받은 이방인 개종자는 내세우며 자랑할 만한 거리였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메시아는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주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할례를 강요했고, 오직 자기들을 위해 그렇게 했습니다.
바로 다음 구절에 나오는 세부 내용은 우리가 흔히 알던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어 놓습니다. 5장에서 보았듯이, 바울은 그들을 두고 「할례받은 이들도 스스로 노모스(법)를 지키지 않으면서」(갈라디아서 6:13)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을 할례로 내몰던 사람들은 토라를 지키는 이들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자기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자랑거리로 삼으려고 다른 사람의 육체에 표를 남기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갈라디아에서 벌어진 실제 광경을 머릿속에 그려 보십시오. 한쪽에는 우상 숭배에서 나와 믿음으로 듣고 성령을 받은 민족들의 신자들이 서 있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스스로 토라를 지키지도 않으면서, 할례를 받지 않으면 의롭다 인정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방문자들이 서 있었습니다. 이 모습은 모세에게로 돌아가는 교회가 아닙니다. 메시아를 믿는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을 듣고 있는 교회입니다.
누가 저주를 받았는가
이제 처음 주장의 근거가 되었던 갈라디아서 1장 8절에서 9절로 돌아가, 단순한 질문 하나를 던져 보십시오. 누가 아나테마입니까?
바울이 편지 내내 「형제들」이라 부르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아닙니다. 저주는 「여러분이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선포하는 자, 곧 소식을 변질시키는 전달자에게 내립니다. 바울은 이 경고에 자기 자신과 천사들까지 포함합니다.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또한 바울은 프롤레고(미리 말하다)라는 낱말을 씁니다. 「우리가 전에 말한 것같이 이제 다시 말하니」. 바울이 전에도 그들에게 경고한 적이 있었으므로, 이는 새로운 규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받았던 소식은 죄인이 메시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소식은 할례를 받아야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주는 이 두 번째 소식과 그것을 가져오는 자 위에 머뭅니다.
책망이 향하는 곳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의 책망은 토라를 지키는 일을 향한 것이 아니라, 토라를 지킨 공로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시도를 향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에서 그 시도는 할례를 조건으로 요구하는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이 책망에 이 책도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죄인에게 육체의 표나 그 어떤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의 지위를 얻어 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으며, 바울의 말은 그에게 온전히 적용됩니다.
갈라디아서에는 계명을 겨냥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이 하나 더 남아 있는데, 그 구절은 달력을 언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