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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정에 선 바울 · 31장 / 전체 47장

하갈, 사라, 그리고 시내 산

지난 장은 바울이 「노모스(법) 아래에 놓여 있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고개를 돌려 두 여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갈라디아서 4장 문 앞에서 끝났습니다. 많은 독자는 이 대목에서 모든 결론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하갈은 종이고, 하갈은 시내 산이며, 시내 산은 토라입니다. 그렇다면 토라는 곧 종살이이며, 몇 구절 뒤에서 바울도 다시 종의 멍에에 매이지 말라며 그 점을 분명히 말하는 듯합니다.

이 주장을 온전히 옮기면 대개 이렇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나오는 종의 멍에는 율법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 이미 율법은 육체를 따라 난 사람들에게 주어졌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허투루 읽은 결과가 아닙니다. 실제 편지에 적힌 실제 낱말들을 엮어 놓았기에, 약한 고리가 하나도 없는 사슬처럼 들립니다. 이제 그 고리를 하나씩 살펴보며, 편지 스스로 자기 낱말의 뜻을 말하게 해 보겠습니다.

듣지 못하느냐?

바울은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갈라디아서 4:21 노모스(법) 아래에 놓여 있기를 원하는 이들이여, 내게 말하라. 노모스(법)를 듣지 못하느냐?

바울은 노모스 아래 있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잊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노모스를 듣고 있는지 묻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토라로 직접 돌려보내며, 곧바로 「기록된 것처럼」이라는 말을 잇고 창세기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뒤이어 펼쳐지는 논증은 모든 대목이 모세의 책에서 나옵니다.

이 점만 보아도 우리는 신중해져야 합니다. 토라를 근거로 삼아 토라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토라를 증인으로 부른 까닭은 토라가 여전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아들

갈라디아서 4:22-23 이는 기록된 것처럼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나고 하나는 자유로운 여인에게서 났다. 그러나 여종에게서 난 자는 사르크스(육체)를 따라 난 것이고, 자유로운 여인에게서 난 자는 약속을 통해 났다.

여기에는 두 아들과 두 어머니, 그리고 태어나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여기서 「사르크스(육체)를 따라」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보려면, 바울의 독자들이 펴 볼 수 있었던 바로 그 이야기를 우리도 펴 보면 됩니다.

창세기 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했다.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나에게 출산을 막으셨으니, 내 여종에게 들어가십시오. 어쩌면 그녀를 통하여 내가 가정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아들을 약속하셨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자 사래가 계획을 세웠고,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었다」. 이스마엘은 그 계획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수단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움켜쥐려던 인간적인 안배에서 나왔기에, 이스마엘은 「사르크스(육체)를 따라」 태어났습니다. 이삭은 다른 길로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잉태되기도 전에 이름을 지어 주시며 「내가 그와 … 나의 언약(베리트)을 … 세우겠다」(창세기 17:1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삭은 약속을 통해 태어났습니다.

앞선 주장이 성립하려면 성경에 율법이 육체를 따라 난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는 말이 있어야 하는데, 21절은 물론이고 이야기 어디에도 그런 문장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스마엘은 누군가 시내 산에 서기보다 수백 년 전에 태어났습니다. 바울이 나란히 견주는 것은 율법과 율법 없음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움켜쥐려는 태도와 그 약속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하갈과 시내 산

이어서 모든 논쟁을 끝내는 듯한 말씀이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4:24-26 이것들은 알레고루메나(비유로 말해진 것)이다. 이는 이 여인들이 두 디아데케(언약)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의 것으로 종을 낳으니, 이것은 하갈이다.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을 뜻하고, 지금의 예루살렘에 대응하니, 그 자녀들과 함께 종으로 있다. 그러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로우니, 그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다.

바울은 이것이 비유이며 두 여인은 두 언약을 가리킨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하갈은 시내 산과 연결됩니다. 본문에 분명히 있는 말씀이니 우리가 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25절의 나머지 부분은 천천히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갈은 「지금의 예루살렘에 대응하니」라고 합니다. 여기에 쓰인 낱말은 「쉬스토이케오(같은 줄에 서다)」로, 병사들이 대열을 맞춰 한 줄로 서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하갈을 자기 시대의 도시인 「지금의 예루살렘」과 한 줄에 세우고, 「그 자녀들과 함께 종으로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토라가 하갈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갈이, 자녀들과 함께 종으로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줄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말하는 종살이가 무엇인지 우리가 짐작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을 시작하며 그 이름을 직접 밝힙니다.

멍에

갈라디아서 5:1 메시아(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그 자유로 굳건히 서고, 다시 종의 멍에에 매이지 말라.

멍에는 소가 짐을 끌 수 있도록 목에 얹는 나무 막대입니다. 농부라면 누구나 멍에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님을 압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멍에이며, 그 멍에가 짐승을 어디에 매어 놓는가 하는 점입니다. 소를 바른길로 가는 무리와 하나로 묶어 주는 멍에는 선물입니다. 반면에 원래 끌어서는 안 될 짐에 소를 묶어 놓는 멍에는 소의 목을 부러뜨리고 맙니다.

바로 다음 문장에서 바울은 자기가 경고하는 멍에가 무엇인지 밝힙니다. 「여러분이 할례를 받으면 메시아(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갈라디아서 5:2). 3절과 4절은 그 생각을 매듭짓습니다. 「노모스(법) 안에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메시아(그리스도)에게서 단절되었고」. 이것이 바로 그 종살이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사람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도 똑같은 멍에가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유대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모세의 에토스(관습)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사도행전 15:1)고 가르쳤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사도행전 15:10 그러므로 이제 왜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능히 지지 못했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메우려 합니까?

여기서 멍에를 뜻하는 헬라어 낱말은 「쥐고스(멍에)」로,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쓴 것과 같은 낱말입니다. 베드로는 그날 제자들의 목에 얹히고 있던 것, 곧 구원이 할례에 달려 있다는 가르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조상들도 「우리」도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6장에서 보았듯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밝힙니다. 「주 예슈아(예수)의 하리스(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믿습니다.」

토라의 계명에 관해서는, 요한이 「그분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요한일서 5:3)라고 말하고, 예슈아께서는 「내 멍에는 쉽고」(마태복음 11:30)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구절 모두 21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에는 쉽다고 부르는 멍에가 있고 종살이라고 부르는 멍에가 있으며, 성경은 이 둘을 결코 같은 것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지금, 육체를 따라 난 사람들

바울이 이 이야기를 자기 시대로 끌어오는 한 줄을 덧붙이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4장을 한 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29 그러나 그때에 사르크스(육체)를 따라 난 자가 프뉴마(영)를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처럼, 지금도 그러하다.

바울은 옛 이야기가 다시 펼쳐지고 있음을 봅니다. 편지 끝부분에서 바울은 누가 갈라디아의 신자들을 거세게 압박하고 있었는지 알려 줍니다. 「사르크스(육체) 안에서 겉모습을 좋게 보이려는」 사람들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려 했다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6:12). 지금은 이것이 똑같은 낱말인 사르크스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 편지에서 「사르크스를 따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이 아닙니다. 살에 베어 낸 표식과 자랑거리를 통해, 자기 수단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움켜쥐려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자유가 주어진 이유

같은 장에서 메시아께서 무엇을 위해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는지도 알려 줍니다. 29장에서 보았듯이 바울은 「그 자유를 사르크스(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아가페(사랑)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하며, 「온 노모스(법)가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한 말씀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라고 덧붙입니다(갈라디아서 5:13-14). 몇 구절 뒤에서 바울은 육체가 실제로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 열거합니다.

갈라디아서 5:19-21 사르크스(육체)의 행위들은 분명하니, 곧 간음, 음행, 아카타르시아(부정함), 방탕, 우상 숭배, 파르마케이아(마술), 원수 맺음, 분쟁, 시기, 분냄, 파당, 분열, 하이레시스(분파/종파), 질투, 살인, 술 취함, 방탕한 잔치,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이니, 이것들을 행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바실레이아(왕국)를 상속하지 못할 것이라고, 내가 전에도 말했고 이제도 미리 말한다.

간음, 우상 숭배, 마술, 살인은 모두 토라에서 그 이름을 직접 들어 금한 것들입니다. 바울 자신이 적은 목록에서 육체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결국 그 사슬은 모든 고리가 끊어집니다. 이야기는 토라에서 나옵니다. 「사르크스(육체)를 따라 난」이라는 말은 인간적인 안배로 태어난 이스마엘의 출생을 설명합니다. 종살이란 할례로 의롭다 함을 얻으라는 요구입니다. 그리고 자유란 사랑할 자유이며, 그 사랑 안에서 온 노모스가 완성됩니다.

이제 기본적인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이 갈라디아 사람들은 누구였으며, 그들이 정확히 무엇으로 돌아가고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 주장은 그들이 구원을 받은 뒤에 토라로 돌아갔다고 말하지만, 편지 자체는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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