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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정에 선 바울 · 29장 / 전체 47장

바울이 지킨 복음

지금까지 성경에 기록된 아노미아(법 없음)라는 낱말을 살펴보았고, 토라를 버렸을 때 어떤 결과가 찾아왔는지 선지자들의 기록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이제 앞서 몇 장을 시작하며 던졌던 주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토라를 지키는 것은 율법주의이며, 다른 복음이다.”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무거운 비판입니다. 바울 자신도 다른 복음을 말한 적이 있으며, 그때 바울의 어조는 매우 격렬했습니다. 바울이 말한 다른 복음이 정말 토라를 지키는 일을 뜻했다면, 우리도 그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표현을 하나씩 차례로 짚어 보겠습니다.

「율법주의」라는 말

첫 번째 표현은 짧게 짚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1권에서 보았듯이 「율법주의」는 성경에 나오는 낱말이 아니며, 성경은 오히려 정반대로 말합니다. 계명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가 왕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습니다(마태복음 5:19). 노모스(법)를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로마서 2:13). 믿음은 노모스를 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굳게 세웁니다(로마서 3:31). 마지막 날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슈아(예수)의 피스티스(믿음)를 지키는 이들」입니다(요한계시록 14:12). 하나님의 계명과 예슈아의 믿음을 한 구절에 나란히 놓은 것은 다름 아닌 성경이며, 성경은 그것을 두고 율법주의라 부르지 않습니다.

「다른 복음」이 기록된 곳

바울은 갈라디아서 첫머리에서 두 번째 표현을 씁니다.

갈라디아서 1:6-7 나는 여러분이 메시아(그리스도)의 하리스(은혜) 안에서 여러분을 부르신 분으로부터 이렇게 빨리 다른 복음으로 옮겨가는 것에 놀란다. 그것은 다른 복음이 아니라, 다만 여러분을 어지럽히고 메시아(그리스도)의 복음을 뒤바꾸려는 어떤 이들이 있을 뿐이다.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에 무언가 들어왔는데, 바울은 그것을 두고 「다른 복음」이라 부르더니 곧바로 실은 다른 것이 전혀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하나뿐인 「메시아(그리스도)의 복음」을 뒤바꾼 것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짐작할 필요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가 직접 정의를 내려 주기 때문입니다. 그 정의를 알아보려면 이 책 1장부터 줄곧 품어 온 두 가지 질문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첫째는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 하는 질문이고, 둘째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갈라디아서를 이해하는 열쇠는 결국 각 구절이 이 두 질문 가운데 어느 쪽에 답하고 있는지를 분별하는 데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까? 우리는 이 책 5장과 6장에서 바울의 대답을 읽었습니다. 사람은 노모스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고 오직 메시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갈라디아서 2:16, 3:11). 토라는 생명을 주려고 부여된 것이 아닙니다(갈라디아서 3:21).

바울은 이 대답을 스스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인용했습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할 때, 바울은 창세기와 선지서와 시편을 딛고 서 있습니다. 선지서에서는 우리가 6장에서 읽었듯이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살 것이다」(하박국 2:4)는 말씀을 가져왔습니다. 창세기와 시편도 똑같이 말합니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시편 143:2 당신의 종을 판결(미쉬파트)에 들이지 마소서, 살아 있는 자가 당신 앞에서 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바울보다 천 년 앞서 이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믿음이며, 예나 지금이나 늘 그러했습니다. 토라 자체가 그 책 안에 제단과 피를 담아 두었습니다. 토라는 “이것을 지켜라, 그러면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책이 아닙니다.

두 번째 질문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여기에 대한 대답이 바로 토라입니다. 이를 가장 뚜렷하게 확인하는 길은 일들이 일어난 순서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열한 장 뒤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6: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목소리를 듣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규례(후카)와 내 토라를 지켰기 때문이다.”

믿음이 먼저 왔고, 그 삶을 걸어가는 걸음이 뒤따랐습니다.

이스라엘도 시내산에서 똑같은 순서를 보여 줍니다.

출애굽기 20:2-3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다. 너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마라.

2절은 구출이고, 3절은 첫째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들을 지켜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이끌어 내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그들을 이끌어 내신 다음에 계명들을 주셨습니다. 구원이 먼저 오고, 토라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입니다.

혼인식을 떠올려 보십시오. 혼인 서약을 외운다고 해서 신부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랑과 선택과 언약 자체가 모두 먼저 오며, 어떤 서약도 그것들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일단 부부가 되고 나면, 어떤 남편도 “이제 우리에게 사랑이 있으니 서약 따위는 지킬 필요가 없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서약이 혼인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지만, 혼인한 사람들은 서약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바울도 편지 뒷부분에서 똑같이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13-14 이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자유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자유를 사르크스(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아가페(사랑)로 서로 종노릇하라. 이는 온 노모스(법)가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한 말씀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몇 구절 뒤에서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갈라디아서 6:2 서로의 무거운 짐을 지라. 그러면 메시아(그리스도)의 노모스(법)를 완성하게 될 것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들은 토라에서 벗어난 자들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토라를 지킬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열 구절 간격

이 말씀들은 토라를 지키는 일에 반대할 때 흔히 인용되는 구절 바로 가까이에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4절에서 바울은 「노모스(법) 안에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메시아(그리스도)에게서 단절되었고」라고 씁니다. 그리고 열 구절 뒤인 5장 14절에서는 「온 노모스(법)가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한 말씀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라고 씁니다. 만약 5장 4절이 「토라를 지키지 말라」는 뜻이었다면, 5장 14절은 결코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5장 4절은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우리는 6장에서 이 구절들을 처음 읽었습니다. 앞 구절과 함께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3-4 내가 또 할례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니, 그는 노모스(법) 전체를 행할 의무가 있다. 노모스(법) 안에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메시아(그리스도)에게서 단절되었고 하리스(은혜)에서 떨어진 것이다.

여기에 쓰인 동사는 「지키다」가 아니라 의롭게 만들거나 의롭다고 선언한다는 뜻의 「디카이오오(의롭다 하다)」입니다. 바울이 꾸짖는 대상은 토라를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토라를 통해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는 시도입니다. 3절은 이 시도가 어떤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는지를 보여 줍니다. 곧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갈라디아에 찾아온 사람들이 전파하던 바가 바로 그것이었으며, 사도행전 15장이 기록한 가르침과도 같습니다. 「모세의 에토스(관습)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사도행전 15:1).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다른 복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의 답을 믿음에서 토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길을 잘못 드는 두 가지 방식

결국 길을 잘못 드는 방식은 두 가지이며, 이 둘은 거울처럼 서로를 비춥니다.

잘못성경이 부르는 이름
첫 번째 질문에 토라를 집어넣는 것“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 토라를 지켜라”메시아에게서 단절됨(갈라디아서 5:4). 토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율법주의라 불릴 만한 일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서 토라를 빼버리는 것“나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니 토라는 필요 없다”아노미아(요한일서 3:4): 「내게서 떠나라」(마태복음 7:23)

「토라를 지키라」는 말은 두 번째 질문의 답이고, 갈라디아서 5장 4절은 첫 번째 질문의 답입니다. 서로 다른 질문에 대한 서로 다른 대답입니다. 이 둘을 하나로 뒤섞어 버리면, 우리가 이 장을 시작하며 보았던 문장, 곧 토라를 지키는 것이 율법주의라는 말이 나오고 맙니다.

아브라함이 서 있던 자리

지난 세 장에 걸쳐 우리는 성경이 토라 없음을 단 한 번도 좋게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거기에 따라붙는 말들은 떠나라, 거두어 냄, 멸망의 아들, 미워하셨다, 불, 저주, 진노입니다.

반면에 토라를 지키는 것은 다른 복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바울은 성경이 「아브라함에게 미리 복음을」 전했다고 말합니다(갈라디아서 3:8). 미리 복음을 전해 들은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어 의롭다 여김을 받았고, 그 뒤에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과 규례와 토라를 지켰습니다. 이것은 다른 복음이 아니라, 가장 오래된 복음입니다.

이로써 2부를 마칩니다. 우리는 계명을 지킬 수 있는지, 또 계명을 지키는 일이 교만이나 무거운 짐이나 율법주의인지 물었고, 성경은 각 질문에 성경 자신의 말로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는 아직 할 말이 더 남아 있으며, 그 가운데 몇몇 문장은 정반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중 한 문장은 바울이 스스로 토라를 허물어뜨렸다고 고백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바울은 「내가 허물었던 것들을 다시 세우면, 나 자신이 범법자임을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씁니다. 바울이 허문 것이 무엇인지는 안디옥의 한 식탁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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