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정에 선 바울 · 22장 / 전체 47장
지켜 행하는 산상수훈
가장 강한 꼴로 말하면 이 주장은 이렇습니다. “예슈아께서 주신 계명을 우리가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지하거나 어리석습니다. 신약의 계명은 구약의 계명보다 어렵습니다. 그분은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빼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을 천천히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 말의 무게를 느껴 보았을 것입니다. 성내는 것을 살인처럼 다루고, 바라보는 것을 간음처럼 다루더니, 이어서 눈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설마 그렇게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예슈아께서는 일부러 기준을 이를 수 없을 만큼 높이 두셔서, 우리가 결코 거기 이를 수 없음을 보여 주시고, 그래서 우리가 애쓰기를 그치고 그저 은혜 안에서 쉬게 하셨음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진심에서 나온 읽기입니다. 그러나 이 읽기는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그 말을 따온 바로 그 설교부터 그렇습니다.
설교는 어떻게 끝나는가
산상수훈은 아무도 이것을 할 수 없다는 한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집 한 채로 끝납니다.
마태복음 7:24 그러므로 내 이 말들을 듣고 행하는 자는 모두 반석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니,
여기서 말하는 것은 「내 이 말들」, 곧 그분이 방금 하신 말씀들이며, 성냄과 음욕과 눈에 관한 말씀도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들을 듣고 행하는 사람을 그분은 지혜로운 사람에 비기십니다. 낱말은 호모이오오(비기다)로, 비기다, 견주다는 뜻입니다. 「반석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니」.
그 주장은 이 계명들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합니다. 예슈아께서는 그것을 행하는 사람을 지혜롭다고 하십니다. 둘 다 옳을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행한 사람들
성경은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는 일을 아무도 살아 내지 못한 이론으로 다루지도 않습니다. 1장에서 우리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주의 모든 계명과 디카이오마(의로운-행위 / 규례를 행함)들 가운데 흠 없이 나아가는 자들이었다」(누가복음 1:6). 누가는 이 말을 천사들에 대해 쓰지 않았습니다. 늙은 제사장과 그의 아내에 대해 썼습니다.
요한은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계명들이 무겁지 않다고 말한 바로 뒤에(지난 장에서 읽은 구절입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요한일서 5:4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이마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니; 세상을 이긴 이 승리는 우리의 믿음이다.
이긴다는 낱말은 니카오(이기다)로, 이기다, 승리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늘 지기만 하는 사람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는 이깁니다.
바울은 그 나름대로, 실제로 지난날이 있는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고린도전서 6:9-11 혹 불의한 자들이 하나님의 바실레이아(왕국)를 상속받지 못할 것을 알지 못하는가? 속지 말라; 음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나, 간음하는 자들이나, 말라코이(유약한 자들)이나, 아르세노코이타이(남자와 동침하는 남자들)이나, 도둑들도, 탐욕스러운 자들도, 술 취한 자들도, 욕하는 자들도, 약탈자들도 하나님의 바실레이아(왕국)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 중 어떤 자들이 이러했다; 그러나 주 예슈아(예수)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프뉴마(영) 안에서 씻음을 받았고, 거룩하게 되었고, 의롭다함을 받았다.
열쇠가 되는 말은 「이러했다」입니다. 바울은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지금 그렇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음행과 우상 숭배와 도둑질 속에 살다가 거기서 돌아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 씻음을 받았고, 거룩하게 되었고, 의롭다함을 받았다」. 그런 것에서 떠나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바울은 있지도 않은 사람들을 그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편지를 쓰던 그 교회 안의 사람들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눈
이제 이 주장의 한가운데 있는 구절에 이르렀습니다. 앞의 절들과 뒤의 절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27-30 ‘간음하지 말라’ 했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니, 여자를 보고 욕망하는 자는 이미 자기 카르디아(마음, 혼적영역)로 그녀와 간음한 것이다. 만일 오른 눈이 너를 스캔달리조(걸려-넘어지게-하다)하거든 빼내어 던져 버려라, 이는 몸 전체가 게헨나(힌놈 골짜기, 불의 심판 장소)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또 오른손이 너를 스캔달리조(걸려-넘어지게-하다)하거든 잘라내어 던져 버려라, 이는 몸 전체가 게헨나(힌놈 골짜기, 불의 심판 장소)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27절은 십계명의 일곱째 계명 「간음하지 말라」를 인용합니다. 예슈아께서는 모세가 들어 본 적도 없는 새 법을 지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일곱째 계명을 가져다가 마음속까지 가지고 들어가십니다.
마음에 해당하는 낱말은 카르디아(마음, 혼적영역)로, 속사람, 곧 욕망이 생겨나는 자리입니다. 욕망을 품고 보는 사람은 「이미 자기 카르디아(마음, 혼적영역)로 그녀와 간음한 것이다」. 이 계명은 처음부터 몸만 엉뚱한 잠자리에 들이지 않으면 된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행동이 시작되는 자리까지 내려갑니다.
그다음에 눈과 손이 나옵니다. YLV 의 낱말은 스캔달리조, 곧 「걸려-넘어지게-하다」입니다. 요점은 기준이 너무 불가능하니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죄는 가볍게 다룰 것이 아니라, 팔다리를 잘라 내듯 잘라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괴저가 번져 가는 다리를 들여다보는 외과 의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건강한 다리는 불가능한 기준이니 그냥 두고 좋아지기를 바랍시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혀 친절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잘라 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목숨을 잃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모진 말은 건강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환자를 살리겠다는 뜻입니다.
눈과 손에 관한 예슈아의 말씀이 바로 그런 힘을 지닙니다. 「몸 전체가 게헨나(힌놈 골짜기, 불의 심판 장소)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죄에 맞서 단호하게 행동하라고 부릅니다. 행동해 보아야 소용없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스스로를 지우는 주장
이 주장에는 논리의 문제도 있습니다.
두 말을 나란히 놓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주 듣는 말입니다. “토라로 돌아가는 것은 짐입니다. 그 옛 계명들은 우리에게 너무 무겁습니다.” 둘째는 이 장의 주장입니다. “신약의 계명은 구약의 계명보다 더 어렵고, 우리는 은혜로 그것을 따릅니다.”
그러면 단순한 질문이 따라옵니다. 신약의 계명이 구약의 계명보다 어렵고, 은혜가 우리로 그것을 따르게 한다면, 어째서 같은 은혜가 그보다 쉬운 토라의 계명은 감당하게 하지 못합니까?
토라는 너무 무거워 들 수 없다고 하면서, 같은 입으로 더 무거운 짐은 은혜로 질 수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은혜가 더 무거운 짐을 질 수 있다면 더 가벼운 짐도 질 수 있습니다. 두 말은 함께 설 수 없습니다.
논의가 이른 곳은 여기입니다. 눈에 관한 예슈아의 말씀은 모세에 맞서 세운 새롭고 더 어려운 법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일곱째 계명을 마음속 끝까지 가지고 들어간 말씀이었습니다. 예슈아의 계명과 토라의 계명은 하나는 무겁고 다른 하나는 더 무거운, 서로 맞서는 두 짐이 아닙니다.
이 부에서 지금까지 다룬 모든 것은 계명을 지킬 수 있는가를 물었고, 성경은 갈림길마다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더 나아갑니다. 그는 계명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모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