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정에 선 바울 · 14장 / 전체 47장
로마서 2장 4절, 제자리에서 읽기
로마서 2장 4절은 짧고 부드러우며,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느냐는 물음 전체를 단번에 풀어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온전히 읽어 보겠습니다.
로마서 2:4 아니면 그분의 크레스토테스(선하심)의 부요함과 관용과 마크로튀미아(오래-참음)를 멸시하는가? 하나님의 선하심이 당신을 메타노이아(회개 / 영적영역)로 인도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이 구절에서 널리 퍼진 주장이 하나 자랐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맞서 꾸짖어서 바꾸지 않으시고, 친절하게 대하셔서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회개로 이끄는 길은 그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느끼게 하는 것이고, 그 선하심을 겪는 경험, 곧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셨는지에 압도되는 그 순간이 바로 회개라고 합니다. 죄를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친절을 보이면 돌이킴은 저절로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이 말을 좋아하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탕자 이야기의 아버지처럼 들리고, 은혜처럼 들립니다. 로마서 2장 4절은 쓰인 그대로 옳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참으로 회개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문장은 4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이 가는 곳
계속 읽기 전에 이 구절 자체를 자세히 보십시오. 이 구절은 이미 그 주장이 허락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당신을 메타노이아(회개 / 영적영역)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곳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곳 자체가 아닙니다. 이 구절에서 선하심은 당신을 움직이는 것이고, 회개는 선하심이 당신을 데려가는 곳입니다.
바울이 회개를 가리켜 쓴 낱말은 메타노이아(회개)로, 생각과 방향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1권 「거룩한 성전」에서 보았듯이, 성경에서 회개는 돌아감, 곧 몸을 돌려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밀려오는 감정이 아니라, 걸어가는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 주장은 이 둘을 슬그머니 맞바꾸어, 타고 가는 것을 도착지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느끼는 것과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앞의 것은 뒤의 것을 낳으라고 있는 것입니다.
선하심이라는 낱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그분의 크레스토테스(선하심)의 부요함」에서 이 낱말은 크레스토테스이고, 당신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선하심」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 뜻은 도덕적인 선함, 곧 곧고 바름이며, 이 점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다툼이 싫어 무엇이든 받아 주는 무른 사람의 친절이 아니라, 성품이 처음부터 끝까지 곧은 분의 선하심입니다. 그 선하심은 오래 참으며,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구절 자체가 밝힙니다. 그것은 「당신을 메타노이아(회개 / 영적영역)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 부드러운 구절 안에서 바울은 날카로운 물음도 던집니다. 「아니면 그분의 크레스토테스(선하심)의 부요함과 관용과 마크로튀미아(오래-참음)를 멸시하는가?」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관용과 오래 참으심의 부요함을 받고도 그것을 멸시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러는지 바울은 바로 다음 줄에서 보여 줍니다.
활주로
공항의 활주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활주로가 길고 넓은 데는 까닭이 하나 있습니다. 비행기가 속도를 내어 날아오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좋은 활주로는 선물입니다. 활주로가 없으면 어떤 비행기도 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활주로는 차를 세워 두는 곳이 아닙니다. 활주로가 얼마나 길고 매끄러운지 감탄하며 온종일 그 위를 오가기만 하는 조종사는 활주로가 무엇을 위해 있는지 잘못 안 것입니다. 그리고 활주로는 아무리 길어도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 활주로입니다. 그분의 관용과 오래 참으심과 그분이 주시는 시간은 모두 사람이 돌이키게 하려고 있습니다. 이제 바울이 다음에 어디로 가는지 읽어 보십시오.
로마서 2:5-8 또 당신의 완고함과 아메타노에토스(회개 없음 / 영적영역)한 카르디아(마음, 혼적영역)대로 하나님의 오르게(진노)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나타나는 날에 스스로 진노를 쌓고 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주실 것이다. 참음으로 선한 일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아프다르시아(썩지 않음 / 불멸)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조에(생명)를, 다툼을 일삼고 진리에 순종하지 않고 불의에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격분과 오르게(진노)를,
이 대목은 「또 당신의 완고함과 아메타노에토스(회개 없음 / 영적영역)한 카르디아(마음, 혼적영역)대로」로 시작합니다. 아메타노에토스는 메타노이아와 같은 뿌리에 「없음」을 뜻하는 짧은 헬라어 앞가지 a- 를 붙인 말입니다. 바울은 방금 메타노이아로 인도하는 선하심을 말하고, 바로 다음 숨에 그것이 없는 마음, 곧 회개 없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는 일부러 둘을 나란히 놓습니다. 여기 선하심을 받고도 돌이키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 주장은 마음이 녹을 때까지 선하심이 그저 계속 흘러든다고 생각하지만, 바울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스스로 진노를 쌓고 있다」고 말합니다. 동사는 테사우리조(쌓아 두다)로, 쌓아 두다, 보물처럼 모아 두다라는 뜻입니다. 돌이키지 않은 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누리며 보내는 하루는 제자리에 서 있는 하루가 아닙니다. 무언가가 쌓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다가오는 그날을 말합니다. 그날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주실 것이다」. 참음으로 선한 일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않음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진리에 순종하지 않고 불의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임합니다.
4절과 5절을 함께 읽으면 그림 전체가 보입니다. 선하심은 참되고 부요하며, 어딘가로 인도하려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단락은, 그 선하심을 받고도 회개하지 않는 마음에 진노가 쌓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듣는 자와 행하는 자
몇 줄 뒤에서 바울은 아무도 놓칠 수 없게 이것을 말합니다. 이 구절은 1장에서 만났지만, 여기서는 선하심과 진노의 말씀 바로 뒤에 서 있습니다.
로마서 2:13 이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들은 노모스(법)를 듣는 자들이 아니라 노모스(법)를 행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두 낱말은 간단합니다. 듣는 자는 청중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고, 행하는 자는 가르침을 실제로 옮기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의로운 자는 토라를 듣는 사람이 아니라 토라를 행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값없는 선물을 벌어들이는 길을 내놓는 것이 아닙니다. 1장에서 보았듯이, 죄인은 행위로가 아니라 메시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의롭다고 선언됩니다. 그러나 여기, 같은 편지에서 바울은 의로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분명히 합니다. 계명을 듣고, 하나님께 따뜻한 마음을 느끼고, 전처럼 그대로 살아간 사람들이 아닙니다. 들은 말씀의 모양대로 삶이 빚어진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처음의 주장 옆에 놓아 보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심을 겪는 것이 그 자체로 회개라면, 예배에서 깊이 감동하고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채 걸어 나간 사람도 회개한 것입니다. 바울의 말로 하면 그 사람은 듣는 자입니다. 감동했을 수도, 감사했을 수도 있지만, 돌이키지는 않았습니다.
선하심은 무엇을 위해 있는가
그 주장이 기대는 구절은 참되며, 그 낱말 하나하나를 굳게 붙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분의 선하심은 부요하며, 그분의 오래 참으심은 깁니다. 그 모두가 한 가지를 향합니다. 사람이 몸을 돌려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친구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친절한 일은 선하심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하심이 어디로 인도하는지, 그리고 돌이키기를 거부하는 마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말해 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한 호흡에 둘 다 했습니다.
이제 흔히 그 반대를 말하는 데 쓰이는 한 장면으로 갑니다. 예슈아께서 사마리아의 한 우물가에서 목마른 여인을 만나셨을 때 그분은 그 여인에게 생수를 주겠다고 하셨고, 많은 사람이 그 대화를 복음 전하기의 본으로 삼습니다. 사람들을 목마르게 하고, 죄와 율법 이야기는 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화는 물을 주겠다는 말씀 뒤에도 이어지며, 끝까지 읽을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