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정에 선 바울 · 9장 / 전체 47장
로마서 14장 23절, 그 장 안에서 읽기
지난 장을 맺은 이 구절은 대개 매우 영적으로 들리는 주장에 싸여 나오는데, 사람들이 이 주장에 끌리는 까닭도 거기에 있습니다. 주장은 이렇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 죄는 더 이상 규칙 목록으로 재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믿음에서 나지 않은 것은 다 죄이다」라고 말했습니다(로마서 14:23). 그러므로 믿는 사람에게 죄란 믿음으로 살지 않는 모든 것입니다. 율법 안에 머물지 않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왜 이 말에서 자유를 느끼는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죄를 바깥에서 안으로, 규칙에서 마음으로 옮겨 놓고,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의 세세한 내용이 아니라 신뢰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말씀은 실제로 로마서에 있습니다. 「믿음에서 나지 않은 것은 다 죄이다.」 그러니 물어야 할 것은 바울이 이 말을 썼느냐가 아니라, 이 말을 쓸 때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었느냐입니다.
장 전체
로마서 14장은 죄의 본질에 관한 선언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모임 안에서 벌어진 한 가지 상황으로 시작합니다.
로마서 14:1-3 믿음에 약한 자를 받아들이되 디알로기스모이(추론들)의 디아크리시스(분별)를 위해서가 아니다. 어떤 이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고 믿고, 약한 자는 채소만 먹는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무시하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크리노(심판/결정하다)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받아들이셨기 때문이다.
같은 모임 안에 두 부류의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한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채소만 먹는데, 바울은 그를 「믿음에 약한 자」라고 부릅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이 두 사람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서로 받아들여야 하고, 어느 쪽도 상대를 업신여기거나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은 대부분 음식과 먹는 일, 그리고 한 신자의 양심과 다른 신자의 양심이 나란히 놓인 상황을 다룹니다.
우리가 살피는 구절은 이 장의 끝에 있습니다.
로마서 14:22-23 당신이 가진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가져라. 자기가 크리노(심판/결정하다)하는 것에 자신을 정죄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그런데 디아크리노(갈라짐/의심)하면서 먹는 자는 정죄를 받는다. 이는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에서 나지 않은 것은 다 죄이다.
23절은 누가 정죄를 받는지를 분명하게 가립니다. 먹는 사람 모두가 아니고, 믿음이라는 어떤 일반적인 성품이 모자란 사람 모두도 아닙니다. 「디아크리노(갈라짐/의심)하면서 먹는 자」입니다. 헬라어 디아크리노는 가르다, 구별하다라는 뜻인데, 여기 쓰인 형태(중간태 · 수동태)로는 속이 둘로 갈라져 흔들리는 사람, 곧 의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는 먹기는 하지만 마음으로는 먹어도 되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로마서 14장 23절은 바로 이 사람에 관한 말씀입니다. 무엇을 먹는 것이 잘못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먹는 사람은 자기 확신을 거슬러 행동한 것입니다. 그 음식 자체가 무엇이었든, 그는 「믿음에서」 먹지 않았습니다. 의심하면서 먹었고, 바울은 그에게는 그것이 죄였다고 말합니다.
주차 자리
시내에서 어느 주차 자리에 차를 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옆에 표지판이 서 있는데 나뭇가지에 반쯤 가려서 잘 읽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대도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확신이 없는 채로 시동을 끄며 속으로 말합니다. “잘못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여기 세워 두자.”
어쩌면 그 자리는 세워도 아무 문제가 없는 곳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여러분 안에서는 이미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잘못일지도 모른다고 여긴 일을 하기로 했고, 규칙이 무엇이든 그것을 어길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23절의 그 사람이 바로 이렇습니다. 바울은 죄의 한 가지 경우, 곧 자기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정의를 밀어내는 새로운 죄의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가 아니라 한 가지 경우
성경은 죄를 여러 가지로 말하며, 하나하나가 실제의 한 경우를 가리킵니다.
요한일서 5:17 모든 불의가 죄이나,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도 있다.
야고보서 4:17 그러므로 선을 행할 줄 알면서 행하지 않는 이에게는 죄가 된다.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옳은 일을 알고도 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의심하면서 먹는 것은 죄입니다. 이 말은 모두 참이지만,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죄 전체의 정의는 아닙니다.
죄를 정의하는 구절은 3장에서 자세히 읽은 말씀입니다. 「죄를 행하는 이마다 또한 아노미아(토라없음)를 행하니; 죄는 아노미아(토라없음)이다」(요한일서 3:4).
이것이 분명한 정의이며, 이 정의는 그대로 섭니다. 로마서 14장 23절은 이 정의를 없애지 않고, 이 정의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의심하며 먹는 사람에 관한 한 구절을 가져다 죄 전체의 정의로 삼고, 그것으로 토라를 떠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한 가지 경우에게 정의가 할 일을 떠맡기는 것입니다.
두 문장을 나란히 놓으면 문제가 분명해집니다. 그 주장은 “율법 안에 머물지 않는 것은 죄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죄는 아노미아(토라없음)이다」라고 말합니다. 토라 없이 사는 것은 이제 믿음 덕분에 안전해진 회색 지대가 아닙니다. 요한이 죄가 무엇인지 말할 때 바로 그것을 지목했습니다. 로마서 14장 23절은 사람이 죄를 짓는 길을 하나 더 알려 줍니다. 자기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이미 지목한 길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믿음은 율법과 싸우지 않는다
그 주장은 전제를 하나 더 깔고 있습니다. 믿음과 율법은 서로 반대편에 서 있어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율법이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못한다는 전제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직접 답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노모스(법)를 폐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노모스(법)를 세운다」(로마서 3:31). 이 구절은 4장에서 읽었고, 1권 「거룩한 성전」에서는 우리가 다 읽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고쳐 읽기 쉬운 구절로 살펴보았습니다. 믿음은 율법을 폐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율법을 세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믿음은 어떤 모습입니까? 믿음을 다룬 큰 장이 그 모습을 보여 줍니다.
히브리서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상속물로 받을 곳으로 나가라고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였으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면서 나갔다.
헬라어 피스티스(믿음)는 믿음 또는 신뢰라는 뜻인데, 여기서 그 믿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지도를 다 가지고 있지 않았고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지만 순종했습니다. 성경에서 믿음과 순종은 서로 다른 두 길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기에 사람은 순종합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잘라 말합니다.
야고보서 2:17 이와 같이 믿음도 행위들이 없으면 그 자체로 죽은 것이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더 깊은 믿음이나 더 속 깊은 믿음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그것을 죽은 것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의 모습
로마서 14장 23절을 바울이 놓은 자리에 다시 놓으면 그 주장은 발 디딜 곳을 잃습니다. 이 구절은 의심하면서 먹는 신자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제는 죄를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 믿음으로 잰다고 선언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죄는 여전히 아노미아이고, 믿음은 여전히 율법을 세우며, 믿음은 아브라함 때부터 언제나 순종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렇다고 누구든 순종해서 구원을 얻어 낸다는 말은 아닙니다. 1장과 2장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메시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받는 믿음은,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일어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으로 가는 바로 그 믿음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모두 이미 돌이킨 사람이 걷는 길에 관한 것입니다. 돌이킴 그 자체, 곧 회개를 두고도 따로 여러 주장이 있는데, 그 첫째 주장은 바로 문 앞에서 시작합니다. 회개의 열매가 성경에 적혀 있기는 하지만 지켜야 할 기준은 아니라는 주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