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정에 선 바울 · 7장 / 전체 47장
시내산에서 누가 토라를 받았는가
우리는 여러 형태로 이런 주장을 듣곤 합니다. 토라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곧 육신의 종들에게 주어졌으며, 메시아께서 오실 때까지만 그들을 위해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토라가 맡은 일은 죄를 억제하고 사람들에게 자기 죄를 보여 주는 것이었으며, 메시아께서 오시자 그 일은 끝났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갈라디아서를 근거로 듭니다. 거기서 바울은 율법을 우리를 메시아께로 인도한 보호자라고 부른 뒤, 우리가 더 이상 그 보호자 아래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정해진 때까지는 보호자가 있었고 그 뒤로는 보호자가 전혀 없다는 말이니, 더 따져 볼 것도 없이 결론이 난 문제처럼 보입니다.
이 주장이 일부 맞기는 합니다. 토라는 실제로 죄가 무엇인지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주장 가운데 두 낱말, 곧 「종들」과 「~까지」는 정말 그러한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토라는 누구에게 주어졌습니까? 그리고 바울이 「더 이상 ~ 않다」라고 할 때, 정확히 무엇이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까?
산 앞에 섰던 사람들
토라가 스스로 그 답을 들려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단 하나의 계명을 내리시기 전에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0:2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다.
이것이 첫 말씀입니다. 「너희는 ~하라」거나 「너희는 ~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이신지, 또 그들을 위해 이미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백성에게 먼저 일러 주십니다. 시내산에 모인 백성은 풀려나기를 기다리는 종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풀려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종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에베드(종)이며, 이집트는 「종살이하던 집」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지난날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거기서 나왔습니까? 석 달도 채 되기 전, 그들은 이집트에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고, 여호와께서는 「내가 그 피를 보고 너희를 넘어가겠으니」(출애굽기 12: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어린양의 피로 이미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산 앞에 섰습니다.
그러므로 토라에 나타난 순서는 우리가 2장에서 본 순서와 같습니다. 구원이 먼저 오고, 계명은 그 뒤에 옵니다. 토라는 종들이 그것을 지켜 이집트에서 빠져나올 자격을 얻도록 건네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곳에서 나온 구속받은 백성에게 주어졌습니다.
방금 입양된 아이를 떠올려 보십시오. 서류에 서명이 끝났고, 아이는 집으로 돌아와 이제 법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온전한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첫날 저녁 식탁에서 아이는 이 가족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배우기 시작합니다. 언제 식사를 하는지, 서로 어떻게 말을 건네는지, 또 안식하는 날에는 무엇을 하는지를 배웁니다. 집안 규칙이 그 아이를 아들로 만들었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아이가 이미 아들이기 때문에 그에게 규칙이 주어진 것입니다.
종이 아니라 제사장들
산기슭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구속받은 백성이 어떤 존재가 될지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9:5-6 이제 너희가 내 목소리를 잘 듣고 내 언약(베리트)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내 소유가 될 것이다. 온 땅이 내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내게 제사장 나라,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 아들들에게 말할 말씀이다.
육신의 종들을 가리켜 「내 소유」라거나 「제사장 나라, 거룩한 민족」이라고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로 이끄신 백성을 부르실 때 쓰시는 표현이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들에게 자신의 언약과 계명들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다
또한 앞서 말한 주장은 토라가 육신에 속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뭇 다르게 말합니다.
로마서 7:12 그래서 노모스(법)는 하기오스(거룩)하고, 계명도 하기아(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두 구절 뒤에서 바울은 문제가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로마서 7:14 우리는 노모스(법)가 프뉴마티코스(영적)인 것임을 알지만 나는 사르키코스(육체적)이며 죄 아래 팔린 자이다.
이 문장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노모스(법)가 프뉴마티코스(영적)인 것」, 그리고 「나는 사르키코스(육체적)이며」라는 것입니다. 사르키코스는 사르크스(육체)에서 나온 말로, 육체에 속했다는 뜻입니다. 육신에 속한 것은 율법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율법은 영의 편에 서 있고, 사람이 육신의 편에 서 있습니다. 1권에서 로마서 7장 첫 구절들을 읽을 때 살펴보았듯이,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토라를 허물어뜨리고 있지 않습니다.
로마서 다음 장에서 바울은 적대감이 어느 쪽에서 일어나는지를 말합니다.
로마서 8:7 이는 사르크스(육체)의 프로네마(생각이 굳어 형성된 방향·지향)는 하나님을 향한 에크트라(원수됨)이기 때문이니, 하나님의 노모스(법)에 복종하지 않으며 실로 복종할 수도 없다.
육신은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지 않으며, 또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신과 토라는 동반자가 아니라 대적하는 사이이며, 육신에 둔 생각은 하나님의 율법과 싸웁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육신을 위해 만들어졌고 영적인 사람은 율법을 넘어섰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바울은 그 반대로 말합니다.
보호자
이제 갈라디아서 본문을 직접 살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23-25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노모스(법) 아래 갇혀서, 앞으로 계시될 믿음을 위해 함께 가두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노모스(법)는 우리를 메시아(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파이다고고스(인도자)가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다. 그러나 믿음이 왔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파이다고고스(인도자) 아래 있지 않다.
핵심 낱말은 파이다고고스(인도자)입니다. 바울 시대에 이 사람은 교실에서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아이를 돌보는 집안 종이었습니다. 그는 소년을 데리고 학교에 오갔으며, 아이가 말썽을 피우지 못하게 살폈고, 잘못을 저지르면 훈육했습니다. 아이는 그의 감시 아래서 살았습니다.
바울이 그 시절을 가리키며 쓴 다른 낱말들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바로 「갇혀서」와 「함께 가두어져」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보초의 감시 아래 붙들려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바울은 믿음이 오기 전에 율법의 감시와 정죄 아래 살아가는 삶이 어떠했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우리는 더 이상 파이다고고스(인도자) 아래 있지 않다」고 말할 때, 이는 우리가 더 이상 그 감시와 정죄 아래 갇혀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계명 자체를 없애 버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들이 자라면 집안 종은 더 이상 그를 학교에 데려다주지 않지만, 아버지가 그에게 가르쳐 준 삶의 방식은 그날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제는 감시받는 아이가 아니라 다 자란 아들로서 그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또한 바울은 왜 그 보호자가 있었는지도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를 메시아(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 곧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보호자가 있던 온전한 목적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도록 우리를 메시아께 데려가는 데 있었습니다. 이는 2장에서 살펴본 구원의 순서 가운데 두 번째 단계이며, 이 구절은 세 번째 단계인 성화가 취소되었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 오해를 미리 내다보았다
바울은 율법에 관한 자신의 말이 오해받을 수 있음을 알았기에, 그런 해석을 스스로 차단했습니다.
로마서 6:15 그렇다면 어떻겠는가? 우리가 노모스(법) 아래에 놓여 있지 않고 하리스(은혜) 아래에 놓여 있으므로 죄를 짓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노모스(법) 아래에 놓여 있지 않고 하리스(은혜) 아래에 놓여 있」다는 말은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에 대한 바울 자신의 대답은 「결코 그렇지 않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3장에서 보았듯이 죄는 곧 아노미아, 곧 토라 없음이므로(요한일서 3:4), 은혜 아래 있다는 말이 토라 없이 살아도 된다는 뜻일 수는 없습니다.
예슈아께서는 「~까지」라는 문제를 이미 매듭지으셨습니다.
마태복음 5:18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노모스(법)에서 한 이오타(아주 작은 글자)나 한 케라이아(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1권에서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기한뿐입니다. 토라는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늘은 여전히 우리 머리 위에 있고 땅은 여전히 우리 발아래 있습니다. 예슈아께서 말씀하신 그 기한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보호자가 결코 하지 않은 일
결국 앞서 말한 주장은 두 가지를 잘못 짚었습니다. 토라는 육신의 종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이미 구속받은 백성, 곧 제사장 나라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까지」는 계명이 끝났음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믿음이 왔고 우리가 메시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에, 율법의 정죄 아래 감시받으며 갇혀 지내던 때가 끝났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더 어려운 반론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비록 토라가 거룩하고 영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지킨다고 해서 사람이 실제로 변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입니다. 신실하게 믿는 많은 이들이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아무도 율법을 지킴으로 죄를 이기지 못하며, 그런 식으로 더 거룩해지려고 애쓰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반론에 대한 답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방식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살펴보는 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