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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정에 선 바울 · 6장 / 전체 47장

하박국, 레위기, 그리고 저주

지난 장에서 우리는 갈라디아서 3장 10절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읽어 보았고, 모세가 기록한 그대로 기록된 말씀 안에 머물지 않는 사람에게 저주가 내린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 갑니다. 그리고 바로 뒤따르는 세 구절을 보며 많은 독자가 토라는 이제 영원히 폐기되었다고 단정 짓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계속해서 읽어 나가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11-12 그리고 노모스(법) 안에서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않음이 분명하니,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모스(법)는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들 안에서 살 것이다.”

이 두 구절을 재빨리 읽으면 마치 믿음과 율법이 맞붙어 하나는 이기고 다른 하나는 지는 시합처럼 들립니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은 남고,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들 안에서 살 것이다」라는 말씀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은 모두 구약 성경, 곧 히브리 성경에서 가져온 인용문입니다. 바울은 성경끼리 서로 맞서 싸우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한 본문 옆에 다른 본문을 나란히 놓고 있을 뿐입니다.

두 본문, 두 가지 역할

첫 번째 인용문은 하박국 선지자의 글에서 왔습니다.

하박국 2:4 보라, 그의 혼(네페쉬)이 교만하여 그 안에서 곧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살 것이다.

히브리어 원문은 「차디크 베에무나토 이흐예」이며, 「의인은 자기의 신실함으로 살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어떻게 의롭다는 선언을 받는지를 말합니다. 곧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인용문은 레위기에서 왔습니다.

레위기 18:5 너희는 내 규례(후카)와 내 판결(미쉬파트)을 지켜라. 사람(아담)이 그것들을 행하면 그것으로 산다. 나는 여호와다.

여기 쓰인 히브리어는 「바하이 바헴」으로, 「그는 그것들로 살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이 그 의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말합니다. 곧 하나님의 규례와 판결을 행하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두 본문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다는 선언을 받고, 계명을 행함으로써 그 의 안에서 살아갑니다. 레위기 본문에게 하박국 본문의 역할을 대신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레위기 말씀이 쓸모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애초에 그 역할을 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닐 뿐입니다.

바울이 레위기 18장 5절을 내버렸을까요? 그는 다른 편지에서 똑같은 구절을 있는 그대로 인용하면서, 모세가 기록한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로마서 10:5 모세가 노모스(법)에서 나오는 디카이오쉬네(의로움)에 관해 쓰기를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들로 살 것이다”라고 했다.

바울은 「모세가 … 쓰기를」이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틀렸다거나 그 말씀의 기한이 끝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들로 살 것」입니다.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의 뜻

그렇다면 바울이 반대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요? 바울 자신이 직접 그 뜻을 밝혀 줍니다.

갈라디아서 2:21 나는 하나님의 하리스(은혜)를 무효로 만들지 않으니, 이는 노모스(법)를 통해 디카이오쉬네(의로움)가 있다면 메시아(그리스도)는 도레안(헛되이) 죽으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의가 율법을 통해 온다면, 메시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셈이 됩니다. 여기서 헛되이라는 말은 원어로 「도레안(거저, 헛되이, 까닭 없이)」입니다. 율법을 통해 의를 얻으려 하는 것은 메시아의 죽음을 쓸모없는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메시아 없이 오직 율법만으로 의를 얻으려 하는 것입니다.

같은 편지의 뒷부분에서 바울은 그러한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말해 줍니다. 우리는 1장에서 갈라디아서 5장 4절을 읽었고, 1권에서도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바로 앞의 두 구절과 함께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2-4 보라, 나 바울이 여러분에게 말하니, 여러분이 할례를 받으면 메시아(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내가 또 할례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니, 그는 노모스(법) 전체를 행할 의무가 있다. 노모스(법) 안에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메시아(그리스도)에게서 단절되었고 하리스(은혜)에서 떨어진 것이다.

그 길을 따라가면 결국 메시아에게서 단절되고 맙니다. 이 결과를 보면 그 길이 본래 어떠한 길인지 알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메시아를 제쳐 둔 채 걸어간 길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두 가지 의에 각각 다른 이름을 붙였습니다.

빌립보서 3:9 노모스(법)에서 난 나 자신의 디카이오쉬네(의로움)가 아닌, 메시아(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믿음 위에 있는 하나님께로부터의 디카이오쉬네(의로움)를 가지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다.

첫째는 「노모스(법)에서 난 나 자신의 디카이오쉬네(의로움)」이고, 둘째는 「믿음 위에 있는 하나님께로부터의 디카이오쉬네(의로움)」입니다. 첫째는 사람이 스스로 세우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바로 이 지점에서 걸려 넘어졌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10:3-4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디카이오쉬네(의로움)를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들의 디카이오쉬네(의로움)를 세우려 하며 하나님의 디카이오쉬네(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메시아(그리스도)께서 믿는 모든 자에게 디카이오쉬네(의로움)를 위한 노모스(법)의 텔로스(목표/완성)이시기 때문이다.

메시아께서는 토라의 「텔로스(목표)」이시며, 토라는 그분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목표를 제쳐 두고 토라를 통해 자기들만의 의를 세우려 했습니다.

토라가 본래 맡지 않았던 일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을 하라고 토라를 주신 적이 없습니다. 죄를 용서하고 의롭다 하시는 일은 애초부터 토라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13:38-39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이를 알아두십시오. 그분을 통하여 죄 용서가 여러분에게 선포됩니다. 또 모세의 노모스(법)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했던 모든 것에서, 믿는 자마다 이분을 통하여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갈라디아서 3:21 그러면 노모스(법)가 하나님의 약속들에 반하는 것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이는 만일 조에(생명)를 줄 수 있는 노모스(법)가 주어졌다면 실제로 디카이오쉬네(의로움)가 노모스(법)에서 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토라는 생명을 주려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몇 구절 뒤에 말하듯, 토라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도록 우리를 메시아께로 인도하려고 주신 것입니다(갈라디아서 3:24). 이 구절은 7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다룬 문제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찾아와 아주 구체적인 주장을 펼쳤고, 베드로가 그에 대해 대답했습니다.

사도행전 15:1 · 15:11 어떤 사람들이 유대에서 내려와 형제들에게 “모세의 에토스(관습)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주 예슈아(예수)의 하리스(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믿습니다.”

「모세의 에토스(관습)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이것은 토라로 구원을 받으려 하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주 예슈아(예수)의 하리스(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그에 대한 대답입니다.

이로써 「노모스(법) 안에서 의롭게 되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분명해집니다. 메시아의 피도 없고 믿음도 없이, 오직 율법을 지켰다는 사실을 근거로 죄 용서와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애쓰는 것입니다. 그런 길은 메시아를 헛되이 죽으신 분으로 만듭니다.

반대로 이 말이 뜻하지 않는 바도 분명합니다. 메시아의 피로 의롭다는 선언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여기에 전혀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1장 6절이 의롭다고 부르는 삶이며, 바울의 말대로 온 노모스(법)가 완성되는 삶입니다.

갈라디아서 5:14 이는 온 노모스(법)가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한 말씀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무엇에서 속량하셨는가?

이제 앞서 살펴본 두 인용문 바로 다음에 나오는 구절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13 메시아(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심으로 노모스(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것처럼 —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는다.”

메시아께서는 「노모스(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속량하셨다는 말은 원어로 「엑사고라조(값을 치르고 사서 내오다, 값을 주고 풀어 주다)」입니다. 그분께서 값을 치르고 우리를 빼내신 곳은 노모스 자체가 아니라 노모스의 저주입니다. 신약 성경 전체에서 「노모스(법)의 저주」라는 표현은 오직 이곳에만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저주일까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바울이 세 구절 앞에서 바로 그 저주를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곧 기록된 말씀 안에 머물지 않는 사람에게 내리는 신명기 27장 26절의 저주입니다. 그 형벌의 선고가 우리 머리 위에 놓여 있었는데, 메시아께서 우리를 거기서 풀어 주시려고 친히 우리를 대신해 저주가 되셨습니다.

난폭 운전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가 사면을 받은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형벌의 선고에서는 풀려났지만, 속도 제한 규정에서 풀려난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가 법원을 걸어 나오자마자 차에 올라타 어린이 보호 구역을 다시 맹렬하게 질주한다면, 사면 때문에 그가 다시 곤경에 빠졌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가 조심해서 안전하게 운전한다고 해서 다시 형벌 아래로 들어간다고 말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를 다시 법정으로 끌고 가는 길은 교통 법규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어기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주에서 풀려난 사람이 다시 저주 아래로 들어가는 길은 토라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토라 안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나란히 놓아 보는 두 가지 읽기

지금까지 살펴본 두 가지 읽기를 나란히 놓고 나머지 본문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흔한 읽기본문 그대로 읽기
3:11, 하박국 2:4: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율법 대신 믿음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됨
3:12, 레위기 18:5: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들 안에서 살 것이다」폐기된 옛 원리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행함으로 됨 (바울은 로마서 10:5에서 이 구절을 다시 인용함)
3:13, 메시아께서 우리를 속량하신 곳율법 자체「노모스(법)의 저주」
다시 저주 아래로 들어가는 길토라를 지키는 것토라 안에 머물지 않는 것
갈라디아서 5:4이 꾸짖는 일토라를 지키는 것「노모스(법) 안에서 의롭게 되려는」 것

그렇다면 정말로 저주 아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메시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걸어가는 신자가 아닙니다. 저주는 기록된 말씀 안에 머물지 않는 사람에게 내리는 것이며, 우리가 그 저주에서 자유로워지도록 메시아께서 우리를 대신해 그것을 짊어지셨습니다.

토라를 지나간 옛것으로 치부할 때 흔히 끌어오는 구절이 하나 더 있는데, 갈라디아서의 같은 장에서 몇 구절만 더 내려가면 나옵니다. 바울은 메시아가 오실 때까지 율법이 「파이다고고스(보호자)」였다고 말하며, 많은 사람이 이 말을 두고 토라는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에게만 필요했던 것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여기서 다음에 물어보아야 할 중요한 질문이 떠오릅니다. 애초에 토라는 누구에게 주신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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