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정에 선 바울 · 3장 / 전체 47장
요한이 말하는 죄
죄에 관한 설교를 많이 들어 본 분이라면 아마 이런 비유를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죄를 뜻하는 헬라어 낱말은 「하마르티아(과녁을 빗나감)」인데, 흔히 활쏘기 그림을 들어 설명합니다. 과녁을 빗나간다는 뜻입니다. 화살이 날아가다가 못 미치거나 옆으로 빗나가서, 과녁이 아닌 다른 곳에 꽂히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주장도 있습니다. 죄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곧 사람이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지, 어떤 이들이 고집하듯 “토라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주장은 단단한 땅 위에서 출발합니다. “과녁을 빗나간다”는 뜻풀이는 맞으므로 굳이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 과녁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누가 과녁을 그렸는가
어느 여름날 오후의 활터를 떠올려 보십시오.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습니다. 들판 저편 끝에는 과녁도, 동심원도, 정중앙의 과녁점도 없이 그저 넓은 풀밭만 펼쳐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시위를 놓자 화살이 풀밭 여기저기에 꽂힙니다.
누가 빗나갔는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습니다. 과녁을 세워 놓아야만 빗나갔다는 말에 뜻이 생깁니다. 그전에는 모든 화살이 그저 꽂히는 곳에 꽂힐 뿐입니다. 누군가 들판 끝에 과녁을 세우는 순간, 비로소 모든 화살을 재어 볼 수 있습니다. 이 화살은 한가운데 가까이에 꽂혔고, 저 화살은 못 미쳤으며, 또 저 화살은 옆으로 빗나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녁을 빗나간다”는 말은 맞는 풀이이지만, 아직 온전한 풀이는 아닙니다. 죄가 어떤 종류의 일인지, 곧 빗나감이라는 사실은 알려 주지만 무엇을 빗나갔는지는 알려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를 빈칸으로 남겨 두면, 사람은 저마다 자기 화살이 이미 꽂힌 자리에 슬그머니 제 과녁을 그려 넣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 자리를 빈칸으로 두지 않으며, 그 과녁이 무엇인지 이름을 밝혀 주는 이가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이 과녁의 이름을 밝히다
요한일서 3:4 죄를 행하는 이마다 또한 아노미아(토라없음)를 행하니; 죄는 아노미아(토라없음)이다.
1권에서 살펴보았듯이, 「아노미아(토라없음)」는 “없음”을 뜻하는 앞가지 「아」와 법, 곧 토라를 뜻하는 「노모스(법)」가 합쳐진 낱말입니다. 토라 없음, 곧 하나님의 가르침이 없는 것처럼 사는 삶을 뜻합니다.
요한은 「하마르티아」라는 낱말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 낱말을 그대로 쓰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죄는 과녁을 빗나가는 일이며, 그 빗나간 과녁은 바로 토라입니다. 들판 끝에 서 있는 과녁이 바로 그것입니다.
히브리 성경도 똑같이 말합니다. 죄를 뜻하는 흔한 히브리어 낱말 「하타(빗나가다)」에도 빗나간다, 곧 길을 벗어나 잘못 간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선지자 다니엘은 자기 백성의 죄를 고백할 때, 이 낱말을 「주의 계명과 주의 판결(미쉬파트)에서 떠났습니다」(다니엘 9:5)라는 말 바로 옆에 나란히 두었습니다. 과녁을 빗나가는 일과 계명들은 한 문장 안에 함께 속해 있습니다.
바울은 죄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았는가
바울은 같은 진리에 반대편에서 다가갑니다. 토라가 과녁이라면, 사람이 자기가 빗나갔다는 사실을 깨닫는 길 또한 토라입니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행위들의 노모스(법)로는 그분 앞에서 어떤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으니, 사실은 노모스(법)를 통해서 죄의 에피그노시스(신령한, 온전한 지식)가 있기 때문이다.
「에피그노시스」는 무엇을 뚜렷하고 온전하게 다 아는 것을 뜻합니다. 토라가 없으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어렴풋이 느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토라가 있으면 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됩니다.
이어서 바울은 자기에게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들려줍니다.
로마서 7:7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노모스(법)가 죄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나 노모스(법)를 통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죄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노모스(법)가 “탐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탐욕을 알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기의 잠재력을 깊이 생각해 보다가 죄를 발견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노모스(법)를 통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죄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 계명을 직접 가리킵니다. 「탐내지 말라」.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입니다. 여기서 탐냄으로 옮긴 헬라어는 에피튀미아(탐심, 욕망, 강한 갈망)입니다. 바울은 그 계명이 없었더라면 「탐욕을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계명이 과녁을 세워 주었고, 바울은 그 계명을 통해 죄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결코 할 수 없는 말도 똑같이 분명하게 밝힙니다. 「노모스(법)가 죄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과녁은 문제가 아닙니다. 과녁은 문제를 눈에 보이게 해 주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
앞서 본 주장의 뒷부분은 죄가 창조의 목적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언뜻 듣기에는 토라를 대신할 만한, 더 넓고 깊은 풀이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창조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의 아들들이 그 짧은 생애 동안 하늘 아래에서 행할 좋은 일이 무엇인지」(전도서 2:3) 묻는 전도서의 끝자락에서 성경이 직접 밝혀 주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12:13 모든 말의 결론을 들으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라.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달아 본 뒤에, 전도자는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여기서 「모든 사람의 본분」으로 옮긴 히브리어는 말 그대로 「사람(아담)의 전부」입니다.
지킨다는 낱말은 히브리어로 「샤마르(지키다, 보살피다)」인데, 보호하고 살피며 지킨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구절이 참으로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일은 사람답게 사는 삶의 한 조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아담)의 전부」, 곧 사람을 지으신 이유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저 주장의 앞뒤 내용은 서로 맞서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죄가 창조의 목적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은 맞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 주장은 죄가 토라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분의 계명들 없이 사는 것이야말로 창조의 목적에 이르지 못하는 바로 그 길입니다. 요한과 전도서의 전도자는 구약과 신약 양쪽에서 똑같은 한 과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의 과녁
활쏘기 그림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면 도움이 됩니다. “과녁을 빗나간다”는 말은 부드럽게 들릴 수 있습니다. 누구나 때로는 빗나가기 마련이고, 빗나갔다는 말은 율법을 어겼다는 말만큼 매섭게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빗나갔다는 말이 부드럽게 들리는 것은 과녁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말하지 않을 때뿐입니다. 요한이 과녁을 알려 주는 순간, 그 부드러운 낱말은 정확한 낱말이 됩니다. 우리의 실패는 저마다 세워 둔 최선의 기준에 못 미친 데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길로 걷지 않은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나쁜 소식만은 아닙니다. 과녁은 또한 긍휼이기 때문입니다. 과녁이 없다면, 사람은 평생 화살을 쏘면서도 과녁에 더 가까워지고 있는지조차 알 길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어림짐작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과녁이 무엇인지 친히 알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토라가 과녁이라면, 곧바로 어려운 질문이 뒤따릅니다. 과연 누가 그 과녁을 맞힌 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바울 자신도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썼으며, 많은 이들이 이 구절을 들어 토라는 아무도 맞힐 수 없는 과녁이라고 여깁니다. 그 답은 바로 그 구절과, 그 장이 어떻게 끝나는지에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