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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성전 · 44장 / 전체 45장

할례와 민족들

여기까지 생각하며 읽어 온 독자라면 마음이 편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토라가 여전히 서 있고, 그 정결이 여전히 거룩한 것을 지키며, 사도들도 여전히 그것을 지켰다면, 한 가지가 반드시 뒤따르는 듯합니다. 민족들 가운데서 믿게 된 사람은 누구나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표였으니, 그것을 빼놓고 토라를 지킨다고 말할 수 있을지 알기 어렵습니다.

이 물음은 정당하며, 새로운 물음도 아닙니다. 1세기 교회에서 이 물음은 「적지 않은 논쟁과 토론」(사도행전 15:2)을 일으켰습니다. 어떤 이들은 토라를 지키는 사람은 그 표를 받아야 한다고 굳게 믿고 진지하게 주장했습니다. 사도들은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답은 토라가 더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답은 토라 자체에서 나왔습니다.

누구의 표였는가

할례가 시작되는 곳,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창세기 17:11-13 너희는 너희 포피의 살(바사르)을 베어라. 그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베리트)의 표(오트)가 될 것이다. 너희 중 모든 남자는 대대로 난 지 팔 일이 되면 할례를 받아야 하니, 집에서 태어난 자나 네 씨가 아닌 이방인에게서 돈으로 산 자도 그러하다. 네 집에서 태어난 자와 네 돈으로 산 자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하니, 나의 언약(베리트)이 너희 살(바사르)에 영원한 언약(베리트)으로 있을 것이다.

본문은 경계를 긋고, 그것을 더 또렷하게 되풀이합니다. 「네 집에서 태어난 자와 네 돈으로 산 자」입니다. 기준은 온 인류가 아니며,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도 아닙니다. 기준은 「네 집」, 곧 아브라함의 집안입니다.

할례를 받은 이방인 종조차 민족들의 한 사람으로서 그 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아브라함의 집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에 받은 것입니다. 그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는 물(할례하다)이며, 그것이 남기는 표, 곧 오트는 베리트(언약)를 나타냅니다. 이 언약은 한 가문의 혈통과, 그 가문에 속한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가운데 그저 머물러 사는 이방인은 어떻습니까? 토라는 바로 그 경우를 말합니다.

출애굽기 12:48 네게 머무는 나그네가 여호와를 위해 페사흐를 지키려거든,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그가 가까이 와서 그것을 지킬 수 있고, 그 땅의 본토인처럼 될 것이다. 할례 받지 않은 자는 아무도 그를 먹지 못한다.

문장의 짜임을 보십시오. 그 땅에 머무는 나그네는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그네가 「여호와를 위해 페사흐를 지키려거든」 그 집의 남자들이 할례를 받아야 하고, 그런 뒤에 가까이 와서 그것을 먹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한 가지 행위에 붙은 조건입니다. 모든 민족의 모든 사람에게 지운 요구가 아니며, 어디에서도 구원의 값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한 집안의 문양

오래전에 왕에게서 가문의 문양, 곧 방패에 새기는 표지를 받은 옛 귀족 가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집안에 태어난 자녀들이 그 문양을 지니고, 정식으로 입양되어 집안에 들어온 사람도 지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정체이며, 왕이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안의 한 사람이 동맹한 모든 나라를 찾아다니며, 나라마다 자기 집안의 문양을 방패에 그려 넣으라고 고집한다고 해 봅시다. 그는 왕을 높인다고 믿겠지만, 실은 왕의 결정을 뒤집고 있는 것입니다. 왕은 그 문양을 한 집안에 주었습니다. 그것을 모두에게 강요하는 것은 왕의 명령에 덧붙이는 일이며, 왕이 그 나라들에 준 자리를 빼앗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일어난 일이 그것입니다.

사도행전 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에서 내려와 형제들에게 “모세의 에토스(관습)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공의회에서 베드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똑같이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답했습니다(사도행전 15:11). 여기서 우리는 그 답이 모세를 떠난 것이 아니라 모세에게 충실한 것이었던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토라는 민족들에게 할례를 명령한 적이 없고,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은 적도 없습니다. 그것을 조건으로 삼는다면 분명한 계명 하나를 어기게 됩니다.

신명기 4: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지 말고 거기서 빼지도 말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미츠바)들을 지켜라.

「더하지 말고 거기서 빼지도 말며.」 우리는 이 구절을 흔히 계명을 버리는 사람들에게 들이대지만, 이 말씀은 반대쪽으로도 똑같이 날카롭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신 계명을 더하는 것은 주신 계명을 빼는 것만큼 금지되어 있습니다.

문제를 매듭짓는 바울의 한 문장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처음 들으면 모순처럼 들리는 문장을 썼습니다.

고린도전서 7:18-19 어떤 자가 이미 할례를 받고 부름을 받았다면, 제거를 시도하지 말라; 무할례 상태에서 부름을 받은 자는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는 아무것도 아니고, 무할례도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전부이다.

그는 「무할례 상태에서 부름을 받은 자는 할례를 받지 말라」고 쓰고, 바로 이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전부이다」라고 씁니다.

두 부분을 합치면 이치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전부이고, 무할례 상태에서 부름을 받은 사람은 할례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게 할례는 하나님의 계명이 아닙니다. 바울은 여기서 토라를 느슨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토라의 경계를 바르게 읽고 있습니다.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이 일의 다른 쪽 면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3 내가 또 할례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니, 그는 노모스(법) 전체를 행할 의무가 있다.

바울이 보기에 할례는 결코 작은 덤, 넉넉하게 하려고 덧붙이는 장식용 표지가 아니었습니다. 할례는 언약의 표이며, 그것을 받는 사람은 그 언약이 지닌 모든 것을 떠맡습니다. 그래서 유대에서 온 사람들이 강요하던 식으로 할례를 민족들에게 조건으로 지울 수 없었습니다.

칼을 대기 전의 아브라함

더 오래된 까닭도 있으며, 바울은 그것을 가리킵니다.

로마서 4:11 그는 할례의 세메이온(표징)을 받았는데, 이는 무할례 상태에서의 믿음의 디카이오쉬네(의로움)의 스프라기다(인장/봉인)이다. 이는 그가 무할례 가운데서 믿는 모든 자의 아버지가 되어 그들에게도 디카이오쉬네(의로움)가 여겨지게 하려 하심이며

아브라함은 「무할례 상태에서」 의롭다고 여겨졌습니다. 표는 그 뒤에, 믿음으로 이미 그의 것이 된 의에 찍는 인장으로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할례 가운데서 믿는 모든 자의 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다. 믿는 민족들은 그 집안의 표를 받지 않고도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둡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바라시는 할례는 언제나 마음의 할례였고, 그것을 먼저 말한 것은 토라입니다.

신명기 30: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씨(제라)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시어, 네가 마음을 다하고 혼(네페쉬)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살게 하실 것이다.

선지자들은 이 점을 강하게 밀어붙였습니다.

예레미야 9:24-25 여호와의 말이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할례받고도 마음에 할례받지 못한 모든 자를 벌하리라.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광야에 거하여 살쩍을 깎은 모든 자라. 이는 모든 민족이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온 이스라엘 집도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대부분의 영어 성경과 한국어 성경에서는 이 대목이 25절과 26절입니다. 유다가 애굽, 에돔과 나란히 들어 있고, 그 까닭이 놀랍습니다. 「온 이스라엘 집도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속의 표 없는 겉의 표는 그들을 지켜 주지 못했습니다.

바울도 같은 말을 합니다.

로마서 2:29 오히려 은밀한 곳에 있는 자가 유대인이고 카르디아(마음, 혼적영역)의 할례, 그람마(문자)가 아닌 프뉴마(영) 안에서의 할례가 참 할례이니, 그의 칭찬은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다.

바울이 「카르디아(마음, 혼적영역)의 할례, … 프뉴마(영) 안에서의 할례」를 말할 때, 그는 옛 유대교의 생각을 갈아 치울 새 기독교 사상을 발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와 예레미야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와 디도

바울이 이것을 어떻게 살아 냈는지 보십시오. 그는 어머니가 유대인인 디모데(사도행전 16:1)를 데려다가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사도행전 16:3 바울이 이 사람을 함께 데려가기를 원하여 그 지방에 있는 유대인들로 인해 그에게 할례를 베풀었으니, 이는 모두가 그 아버지가 그리스인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도의 경우에는 거절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조차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으니,

대충 읽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앞뒤가 맞지 않아 보입니다. 바울이 듣는 사람에 따라 행동을 바꾼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디모데는 유대인 어머니의 아들이었고, 바울은 누가의 말대로 「그 지방에 있는 유대인들로 인해 … 모두가 그 아버지가 그리스인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디도는 헬라인이었고, 그 표를 지니지 않았습니다. 두 경우 모두 바울은 토라 자신의 기준, 「네 집」을 따랐습니다.

그러므로 토라를 지키는 이방인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결국 토라에 없는 것을 토라에 더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토라를 지킬 필요가 전혀 없다는 주장과 똑같이 신명기 4장 2절에 걸립니다.

이제 우리는 이 책의 길을 끝까지 걸어왔습니다. 책을 덮기 전에, 건물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만큼 뒤로 물러서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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