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성전 · 36장 / 전체 45장
선지자들이 말한 회개
이 부를 마무리하기 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주장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앞선 모든 주장을 하나로 요약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토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우리를 토라에서 자유롭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를 다시 토라로 부르지 않습니다.”
「율법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마치 이집트와 그곳의 사슬로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을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가장 단순하게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예슈아께서는 마지막 날에 관해 말씀하실 때, 누구를 쫓아내겠다고 하셨으며 또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내게서 떠나라
마태복음 7:21-23 나에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들의 바실레이아(왕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텔레마(뜻)를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자들이 내게 말하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또 주의 이름으로 데몬(축출 대상 개별 악령)들을 내쫓지 않았습니까, 또 주의 이름으로 많은 뒤나미스(능력)의 일들을 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선언하기를 ‘나는 너희를 한 번도 알지 못했으니, 아노미아(토라없음)를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할 것이다.
이 사람들은 예슈아의 이름을 낯설어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그분을 향해 「주여 주여」 하고 부릅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예언도 했고, 그분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냈으며, 큰 권능도 행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기준으로만 보면 누구보다 성공한 사역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슈아께서는 그들을 내쫓으시며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십니다. 「아노미아(토라없음)를 행하는 자들아.」
우리는 이 낱말을 이미 여러 차례 만났습니다. 요한은 이 낱말의 뜻을 한 줄로 정의합니다. 「죄는 아노미아(토라없음)이다」(요한일서 3:4). 예슈아의 입에서 토라 없음은 결코 가벼운 허물이 아닙니다. 자신을 주님이라 부르던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내세우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처음에 살폈던 주장과 나란히 놓아 보십시오. 만일 복음이 전하는 말씀이 “토라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이라면, 복음은 예슈아께서 「내게서 떠나라」 하시며 사람들을 쫓아내시는 바로 그 자리로 우리를 부르는 셈이 됩니다. 이 두 가지는 둘 다 참일 수 없습니다.
구약이 이미 내린 정의
그렇다면 회개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회개를 슬퍼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슬픔도 회개의 일부이지만, 선지자들은 훨씬 더 구체적인 동작으로 회개를 그렸습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발걸음을 돌려 다시 돌아가는 일입니다.
말라기 3:7 너희가 너희 조상들의 시대부터 내 규례(호크)에서 떠나 지키지 않았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돌아가겠다. 만군(째바오트)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가 어떻게 돌아가느냐고 말한다.
「너희가 너희 조상들의 시대부터 내 규례(호크)에서 떠나」. 그들이 길을 벗어난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시 돌아가야 할 곳도 바로 그 규례들입니다.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는 ‘돌이키다’, ‘돌아가다’라는 뜻의 슈브입니다.
이 구절 끝에서 이스라엘이 되묻는 말이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돌아가느냐」.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똑같이 묻습니다. 어떻게 돌아가며, 무엇으로 돌아가느냐는 것입니다. 말라기는 이미 그 구절 앞부분에서 답을 주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걸어 나왔던 바로 그 자리로 돌아가는 법입니다.
에스겔도 똑같이 외칩니다.
에스겔 18:30-32 그러므로 이스라엘 집아, 내가 너희를 각각 그 길대로 심판하겠다. 주 여호와의 말이다. 돌이켜라. 너희의 모든 허물에서 돌이켜라. 그러면 죄악이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범한 모든 허물을 너희에게서 던져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루아흐)을 너희 자신에게 만들어라. 이스라엘 집아, 너희가 어찌 죽으려 하느냐? 나는 죽는 자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주 여호와의 말이다. 그러니 돌이켜 살아라.
「돌이켜라. 너희의 모든 허물에서 돌이켜라.」 이 부르심에 담긴 마음은 분명합니다. 「나는 죽는 자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 그러니 돌이켜 살아라.」 돌아오라는 부르심은 협박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집으로 부르는 소리입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그 부르심을 거절하는 모습이 어떠한지 잘 보여 줍니다.
느헤미야 9:26 그러나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고 주를 거역하며, 주의 토라를 등 뒤에 던지고, 그들을 주께로 돌이키려 경고한 주의 예언자들을 죽이며 크게 모독하였나이다.
단 한 문장 안에 두 가지 일이 나란히 나옵니다. 그들은 토라를 등 뒤로 내던졌고, 「그들을 주께로 돌이키려」 찾아온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토라를 내던지는 일과 돌아오라는 부르심을 거절하는 일은, 같은 행동을 양쪽에서 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복음의 첫마디
이제 마태복음을 펴서 예슈아께서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신 날로 가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4:17 이 때부터 예슈아(예수)께서 선포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메타노에이테(회개하라 / 영적영역), 하늘들의 바실레이아(왕국)가 가까이 왔다.” 하셨다.
제일 먼저 나오는 낱말은 우리가 「회개하라」라고 옮기는 메타노에이테입니다. 하지만 예슈아께서는 말라기와 에스겔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에게 그 부르심은 오직 한 가지 뜻, 곧 발걸음을 돌려 다시 돌아오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제 이 조각들을 하나로 맞춰 보십시오. 죄는 아노미아, 곧 토라 없음이고, 복음의 첫마디는 「돌아오라」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첫마디는 결국 “토라 없음에서 돌아오라”는 말씀이 됩니다. 선지자들이 전한 말씀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선지자들이 전했던 바로 그 말씀이며, 이제는 왕국이 문 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이 더해졌을 뿐입니다.
차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
우리는 대부분 길 안내 앱을 켜고 운전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들면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가능한 곳에서 유턴하십시오.” 그 길을 또 지나쳐도, 목소리는 화내는 기색 하나 없이 참을성 있게 다시 안내합니다. 우리를 벌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집으로 데려다주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를 차에 태운 것은 그 목소리가 아닙니다. 그 일은 은혜가 했습니다. 에스겔이 약속한 대로, 은혜가 우리를 용서하고 새 마음을 주어 길 위에 세웠습니다. 하지만 일단 길 위에 올라선 뒤에도 길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마음에 새겨 주신 토라가 바로 그 길입니다. 은혜는 우리를 안으로 데려오고, 토라는 안으로 들어온 우리가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아오라」는 말씀은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공로를 쌓아 돌아오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은혜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내어 주신 길, 예슈아께서 걸으셨고 그 뒤를 이어 사도들이 걸었던 그 길을 걸으라는 초대입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앞길을 내다보며
이 책의 이번 부에서는 참으로 많은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열심과 그 방향, 사도들이 따랐던 「그 도」, 사도행전 15장의 네 가지 규정, 한 토라와 한 나무, 로마서 7장, 성경에 없는 한 낱말, 골로새서에 나오는 그림자, 드로아의 어느 밤, 그리고 안식일과 그 주인까지 살폈습니다. 이 모든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예슈아의 입술에서 나온 단 한마디, 돌아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길에는 방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길에는 고유한 박자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만 알려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언제 멈추어야 하는지, 언제 모여야 하는지, 언제 기뻐하고 언제 자신을 괴롭게 해야 하는지도 일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날들을 「내 정해진 때들(모에딤)」이라 부르시고, 큰길에 세운 이정표처럼 한 해의 흐름 속에 심어 두셨습니다.
그 길에는 달력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