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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성전 · 35장 / 전체 45장

예슈아께서는 안식일을 지키셨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장을 지나오면서 질문 하나가 줄곧 우리를 따라다녔습니다. 신약성경이 안식일을 거듭 말하고 단 한 구절도 안식일을 폐지하지 않는다면, 정작 예슈아 자신이 안식일을 어기시지 않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일리 있는 질문이며, 아무 근거 없이 나온 말도 아닙니다. 이렇게 묻는 이들은 성경 구절 하나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에 「그분이 사바톤을 깨뜨릴 뿐만 아니라」라고 똑똑히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안식일을 어기셨다면,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안식일은 더 이상 구속력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구절을 세심하게 읽어 보아야 합니다. 아울러 사복음서가 기록한 모든 안식일 장면도 하나하나 살펴보아야 합니다.

문장 전체를 읽으십시오

요한복음 5:16-18 이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슈아(예수)를 핍박했으며, 사바톤(레위기 23장의 모든 모에드를 지칭함)에 이런 일들을 행하신다 하여 그분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예슈아(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셨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분을 더욱 죽이려 했으니, 이는 그분이 사바톤(레위기 23장의 모든 모에드를 지칭함)을 깨뜨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었다.

먼저 누가 이 말을 하고 있는지 눈여겨보십시오. 16절은 「유대인들이 예슈아(예수)를 핍박했으며」라고 알려 주며, 18절은 그들의 속셈이 무엇이었는지 밝힙니다. 그들은 「그분을 더욱 죽이려 했」습니다. 요한이 직접 나서서 이 사건에 자기 판결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예슈아를 죽이려 했던 자들의 고발 내용을 전달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 같은 문장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 보십시오. 거기에는 고발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가지 담겨 있습니다. 그분이 「사바톤을 깨뜨」렸다는 것과,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두 번째 고발을 그 표현 그대로 받아들였을까요? 요한은 복음서 첫머리에서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다고 선언합니다. 요한의 눈에 예슈아는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만드신 분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이미 그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표현은 적대자들의 말이지 요한의 말이 아닙니다. 첫 번째 고발도 같은 숨결에서, 같은 입에서 나왔습니다. 한쪽을 적대자들의 말로 받아들이면서, 다른 한쪽만 슬그머니 요한 자신의 판결로 격상시킬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깨뜨리다」로 옮긴 낱말은 뤼오(풀다, 허물다)입니다. 이 낱말은 예슈아께서 산상수훈에서 「이 가장 작은 계명들 가운데 하나라도 어기고 또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는 하늘들의 바실레이아(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라 불릴 것이나」(마태복음 5:19) 하고 경고하실 때 쓰신 바로 그 낱말입니다. 적대자들은 예슈아께서 제자들에게 절대로 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던 바로 그 일로 예슈아를 고발했습니다. 이 점 하나만 보아도, 우리는 그들의 고발에 섣불리 동조해서는 안 됩니다.

문법만 이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복음서는 예슈아께서 안식일에 무엇을 하셨는지, 또 시비를 거는 자들에게 무엇이라 답하셨는지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 기록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으니 직접 읽어 보면 됩니다.

밀밭의 이삭

마태복음 12:1-2 그 카이로스(정해진-때)에 예슈아(예수)께서 사바톤(레위기 23장의 모든 모에드를 지칭함)들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는데, 그분의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들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보고 그분께 말하기를: “보소서, 당신의 제자들이 사바톤(레위기 23장의 모든 모에드를 지칭함)에 행하면 안 되는 것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행하면 안 되는 것」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토라 자체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신명기 23:26 네가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 네 손으로 이삭을 딸 수 있으나 네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지 말라.

배고픈 나그네는 이웃의 밭을 지나가면서 손으로 곡식 이삭을 따도 됩니다. 다만 낫을 대어 거두어들이지는 못합니다. 제자들은 손으로 이삭을 따서 먹었을 뿐, 밭에서 추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토라는 바로 그 일을 허용했습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이 구절을 신명기 23장 25절로 매기지만, YLV는 히브리어 성경의 절 구분을 따릅니다.)

예슈아께서는 토라 본문을 들어 그 고발에 답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5-8 또는 사바톤(레위기 23장의 모든 모에드를 지칭함)들에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사바톤(레위기 23장의 모든 모에드를 지칭함)을 깨뜨려도 죄가 없다는 것을 노모스(법)에서 읽지 못했는가?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성전보다 더 큰 분이 여기 계시다. 만일 ‘나는 희생제물이 아니라 긍휼을 원한다’ 하신 것이 무엇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자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인자가 사바톤(레위기 23장의 모든 모에드를 지칭함)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노모스(법)에서 읽지 못했는가」 하시며, 예슈아께서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그들을 모세의 글로 돌려보내십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은 안식일 제사를 드리느라 무거운 노동을 하지만 「죄가 없다」. 이어서 제자들에게 내리시는 판결이 나옵니다. 「죄 없는 자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슈아께서 하지 않으신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그분은 “그래, 제자들이 안식일을 어겼다. 하지만 규칙보다 은혜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을 죄 없는 자들, 곧 허물이 없는 이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슈아의 판단에 안식일은 조금도 깨지지 않았습니다.

구덩이에 빠진 양

병을 고치신 사건들도 같은 흐름을 따릅니다.

마태복음 12:10-12 보라, 한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이 그분을 고발하려고 물어 말하기를: “사바톤(레위기 23장의 모든 모에드를 지칭함)들에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 그분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를 가졌다가 사바톤(레위기 23장의 모든 모에드를 지칭함)들에 구덩이에 빠지면 잡아당겨 꺼내주지 않겠는가? 하물며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소중하냐! 그러므로 사바톤(레위기 23장의 모든 모에드를 지칭함)들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옳다.”

사람들은 「그분을 고발하려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슈아께서는 그 자리에 있던 농부라면 누구나 이미 하고 있던 일로 답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는데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면 누구나 끌어낼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은 양보다 훨씬 더 귀합니다. 「그러므로 사바톤들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옳다.」

요한복음 5장의 치유 사건으로 이 모든 논쟁이 시작되었는데, 예슈아께서는 7장에서 그 사건을 다시 거론하십니다.

요한복음 7:22-23 그러므로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그것이 모세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조상들에게서 온 것이지만), 너희가 사바톤(레위기 23장의 모든 모에드를 지칭함)에 사람에게 할례를 행한다. 모세의 노모스(법)가 폐하여지지 않게 하려고 사람이 사바톤(레위기 23장의 모든 모에드를 지칭함)에 할례를 받는다면, 내가 사바톤(레위기 23장의 모든 모에드를 지칭함)에 사람을 온전히 낫게 했다고 너희가 나에게 화를 내느냐?

할례는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에 행하라고 명령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드레째 날이 안식일과 겹치더라도, 「모세의 노모스(법)가 폐하여지지 않게 하려고」 할례를 그대로 행합니다. 토라는 두 계명을 함께 품고 있으며, 안식일은 다른 계명을 가로막으려고 주어진 날이 결코 아닙니다. 토라가 안식일에 사람의 몸 한 부분에 칼을 대는 것을 허락한다면, 「사람을 온전히 낫게 했다고」 어찌하여 자신에게 화를 내느냐고 예슈아께서 물으십니다.

누가는 또 다른 장면을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13:14-16 그러나 아르키쉬나고고스(회당장)가 예슈아(예수)께서 사바톤(레위기 23장의 모든 모에드를 지칭함)에 고치신 것에 분개하여 무리에게 말했다, “일해야 할 날이 엿새니, 그 날들에 와서 고침을 받아라, 사바톤(레위기 23장의 모든 모에드를 지칭함) 날에는 받지 말라.” 주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위선자들이여, 너희 중 각 사람이 사바톤(레위기 23장의 모든 모에드를 지칭함)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 그런데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나 묶어두었으니, 사바톤(레위기 23장의 모든 모에드를 지칭함) 날에 이 결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회당장이 내세운 규칙을 들어 보십시오. 「그 날들에 와서 고침을 받아라, 사바톤 날에는 받지 말라.」 언뜻 넷째 계명처럼 들리지만, 넷째 계명은 일하는 것을 금할 뿐 병 고침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회당장은 안식일 둘레에 자기만의 울타리를 세워 놓고서, 그 울타리를 율법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슈아께서는 회당장 자신이 안식일마다 자기 소를 풀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는 일을 들어 답하셨습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여 있던 아브라함의 딸이 소 한 마리보다 못하단 말입니까?

이 장면들을 나란히 놓고 보면 뚜렷한 흐름이 드러납니다. 예슈아께서는 사람들이 안식일 위에 겹겹이 쌓아 올린 규칙들과 거듭해서 날카롭게 충돌하셨고, 그때마다 토라에 호소하여 그 규칙들을 물리치셨습니다. 토라가 명한 안식일이 끝났다고 말씀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 문제에 걸려 있는 것

이 문제가 중요한 까닭은 성경이 죄를 정의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우리는 9장에서 다음 구절을 살펴보았습니다.

요한일서 3:4 죄를 행하는 이마다 또한 아노미아(토라없음)를 행하니; 죄는 아노미아(토라없음)이다.

죄는 아노미아, 곧 토라 없음입니다. 만일 예슈아께서 토라의 안식일을 단 한 번이라도 어기셨다면, 성경 자신의 정의에 따라 그분은 죄를 지으신 셈이 됩니다. 그리고 죄인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할 흠 없는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자체가 무효가 되고 맙니다.

성경은 정반대로 말하며, 아주 명백하게 선언합니다.

베드로전서 2:22 그분은 죄를 짓지 않으셨고, 그분의 입에서 속임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히브리서 4:15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들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대제사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 없이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분은 죄를 짓지 않으셨고」. 「죄 없이」. 그리고 예슈아 친히 자신의 삶 전체가 어떠했는지 우리에게 일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5:10 내 계명들을 지키면 나의 아가페(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니, 이는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들을 지키어 그분의 아가페(사랑) 안에 머무는 것과 같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들을 지키어」. 예슈아께서는 계명들 가운데 대부분을 지켰다거나, 하나만 빼고 다 지켰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안식일은 아버지의 계명들 가운데 하나였고, 예슈아께서는 그 안식일을 지키셨습니다.

악보를 쓴 작곡가

자기가 작곡한 교향곡 연습장에 걸어 들어가는 작곡가를 떠올려 보십시오. 관현악단은 그 곡을 수년 동안 연주해 왔고,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단원들은 자기들만의 버릇을 덧붙였습니다. 여기서 느려지고, 저기서 멈추며, 어느 대목에서는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여리게 연주합니다. 작곡가는 연주를 멈추게 하고 말합니다. “내가 쓴 곡은 이렇지 않습니다. 악보를 읽으시오.” 그러자 고참 단원 몇 사람이 불쾌해하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작곡가가 음악을 훼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방 안에서 음악을 훼손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없는 단 한 사람이 바로 그 작곡가입니다. 그는 교향곡을 갈기갈기 찢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곡이 본래 어떤 소리를 내야 하는지 아는 장본인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장면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이는 인자가 사바톤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그러니까 안식일을 마음대로 내버려도 된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안식일이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지 규정할 권위가 자신에게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안식일을 폐지하는 분이 아니라, 안식일을 규정하시는 분입니다.

이처럼 예슈아께서는 안식일을 지키셨으며, 안식일을 깨뜨리신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규정하셨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뒤따릅니다. 토라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 걸어가야 할 길인데, 우리 가운데 많은 이가 그 길에서 떠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면,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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