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성전 · 29장 / 전체 45장
로마서 7장을 통째로 읽기
토라를 반대하는 주장에 요새가 있다면 그것은 로마서 7장입니다. 그 주장은 대개 이렇게 흘러갑니다. 바울은 우리를 결혼한 여자에 비유합니다. 여자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 법으로 남편에게 매여 있고,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집니다. 법이 옛 남편입니다. 십자가로 옛 남편이 죽었고, 이제 우리는 그 대신 메시아께 속합니다. 메시아와 함께 죽은 신자는 더 이상 법에 매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진실한 선생들 가운데 이 본문을 그렇게 읽은 이가 많았고, 그 까닭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법」, 「풀려나다」, 「죽다」라는 낱말이 모두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은 천천히 읽을 만한 값이 있습니다. 문장마다 한 가지를 물으면서 읽는 것입니다. 「누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로마서 7:1-6 형제들이여, 노모스(법)를 아는 자들에게 말하지만 노모스(법)가 사람을 살아 있는 동안만 지배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이는 남편 있는 여자는 살아 있는 남편에게 노모스(법)로 매여 있으나,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노모스(법)에서 풀려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 다른 남자에게 가면 간음한 여자로 불릴 것이나, 남편이 죽으면 노모스(법)에서 자유로워 다른 남자에게 가더라도 간음한 여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이여, 여러분도 메시아(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노모스(법)에 대해 죽임을 당했으니, 이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다른 분에게 속하여 하나님께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다. 이는 우리가 육신 안에 있었을 때 노모스(법)를 통해 드러난 죄들의 파테마(정욕/고통)들이 우리 지체들 안에서 역사하여 죽음에게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붙들려 있던 것 안에서 죽었으므로, 우리가 노모스(법)에서 무효화되었으니, 우리는 그람마(문자)의 팔라이오테스(낡음/진부함)로가 아니라 프뉴마(영)의 카이노테스(새로움)로 섬기게 된다.
죽은 쪽은 법입니까, 우리입니까?
먼저 2절과 3절의 비유부터 보겠습니다. 여자와 남편과 법이 나옵니다. 누가 죽습니까? 법이 아니라 남편이 죽습니다. 3절 끝에서도 법은 그대로 서 있습니다. 「간음한 여자가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바로 그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이 4절에서 이것을 어떻게 적용하는지 보십시오. 「여러분도 … 노모스(법)에 대해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죽임을 당한 것은 우리입니다. 이 여섯 절 어디에서도 바울은 법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려 했다면 여기가 바로 그 자리였는데,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본문이 「반드시」 무슨 뜻이어야 하는지 이미 알고 들어오면 이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법이 죽었다는 말을 읽으리라 마음이 기대하고 있으면, 눈은 「여러분도 …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무엇에서 풀려났습니까?
다음으로, 여자가 무엇에서 풀려나는지 자세히 보십시오. 2절이 정확히 말합니다. 「남편의 노모스(법)에서 풀려나기 때문이다.」 여자는 법 전체에서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그 한 남자에게 매어 두었던 규정에서 풀려납니다.
보통의 혼인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과부가 다시 결혼합니다. 첫 남편이 죽었을 때 혼인법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녀를 첫 남편에게 매어 두었던 바로 그 법이 이제 그녀가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다고 말하고, 전에는 그녀를 간음한 여자라고 불렀을 바로 그 법이 이제 그녀는 간음한 여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법 밖으로 걸어 나간 것이 아닙니다. 법 안에서 새 남편에게 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서 풀려났습니까? 5절이 알려 줍니다.
「이는 우리가 육신 안에 있었을 때 노모스(법)를 통해 드러난 죄들의 파테마(정욕/고통)들이 우리 지체들 안에서 역사하여 죽음에게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붙들고 있던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판결을 내렸으며, 그 옛 삶의 열매는 죽음이었습니다. 끝난 결혼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정죄에서 풀려난 것이지, 기준에서 풀려난 것이 아닙니다.
6절은 풀려난 사람이 그다음에 무엇을 하는지 보여 줍니다. 「우리는 그람마(문자)의 팔라이오테스(낡음/진부함)로가 아니라 프뉴마(영)의 카이노테스(새로움)로 섬기게 된다.」 여기서 쓰인 낱말은 둘레우오(종으로 섬기다)인데, 종이 섬기듯 섬긴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섬기기를 그만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섬긴다고 말합니다.
잘못 읽기에 대한 바울의 대답
바울은 자기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법이 끝났다고 결론 내리기 전에, 바울은 바로 다음 절에서 그 생각을 막았습니다.
로마서 7:7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노모스(법)가 죄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나 노모스(법)를 통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죄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노모스(법)가 “탐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탐욕을 알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장이 이어질수록 바울은 더없이 분명하게 말합니다.
로마서 7:12 그래서 노모스(법)는 하기오스(거룩)하고, 계명도 하기아(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로마서 7:22 이는 내가 에소(내면적) 안드로포스(사람)에 따라 하나님의 노모스(법)와 함께 기뻐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7:25 우리 주 예슈아(예수) 메시아(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런즉 나 자신은 누스(지성, 영적영역)로는 하나님의 노모스(법)를 섬기고 사르크스(육체)로는 죄의 노모스(법)를 섬긴다.
4절과 25절을 나란히 놓아 보십시오. 같은 사람이 같은 장에서 「여러분도 … 노모스(법)에 대해 죽임을 당했」다고도 쓰고, 「나 자신은 누스(지성, 영적영역)로는 하나님의 노모스(법)를 섬기고」라고도 씁니다. 만일 4절에서 법에 대해 죽었다는 말이 더는 법에 매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면, 바울은 결코 25절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죽었다고 믿는 법을 기뻐하는 사람은 없고, 지킬 의무에서 풀려난 법을 섬기는 사람도 없습니다.
로마서 8장이 논쟁을 맺는 곳
로마서 8장은 이 모든 것 아래에 마지막 줄을 긋습니다. 이 책 8장에서 이 절들을 보았지만, 여기서는 이 절들이 바울이 해 온 말을 마무리합니다.
로마서 8:3-4 이는 노모스(법)가 사르크스(육체)로 인해 약하여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으니, 자기 아들을 죄의 사르크스(육체)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죄로 인해 사르크스(육체)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노모스(법)의 디카이오마(의로운-행위 / 규례를 행함)가 사르크스(육체)를 따르지 않고 프뉴마(영)를 따라 페리파테오(걷다/행하다)하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다.
법이 할 수 없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옳은지 알려 주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은 완벽하게 해냈습니다. 법은 「사르크스(육체)로 인해 약하여」 육체를 순종하게 만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해 육체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습니다. 「노모스(법)의 디카이오마(의로운-행위 / 규례를 행함)가 …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목적은 법의 요구가 없는 백성이 아닙니다. 마침내 그 요구가 채워지는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법을 거부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로마서 8:7 이는 사르크스(육체)의 프로네마(생각이 굳어 형성된 방향·지향)는 하나님을 향한 에크트라(원수됨)이기 때문이니, 하나님의 노모스(법)에 복종하지 않으며 실로 복종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노모스(법)에 복종하지 않」는 것은 육체입니다. 그러므로 토라를 거스르는 쪽은 영이 아니라 육체입니다. 영으로 다시 난 사람은 법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안에서 법의 요구가 채워지는 사람입니다.
새 영이 하시는 일
그 일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예언자들이 이미 답했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새롭게 하실 날을 내다보며 이렇게 썼습니다.
에스겔 36:26-27 내가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 영(루아흐)을 두겠다. 내가 너희 살(바사르)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너희에게 살(바사르) 같은 마음을 주겠다. 내가 내 영(루아흐)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내 규례(호크)대로 행하고 내 판결(미쉬파트)을 지켜 행하게 하겠다.
「너희가 내 규례(호크)대로 행하고.」 「프뉴마(영)의 카이노테스(새로움)로」 섬긴다는 말의 뜻이 여기 있습니다. 영은 규례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영은 우리가 마침내 그 규례대로 걷게 되는 길입니다. 돌 같은 마음을 빼내고 살 같은 마음을 넣어 주시며, 그 영이 우리로 그분의 규례대로 행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7장은 쓰인 그대로 읽어야 합니다. 법이 아니라 우리가 죽었습니다. 우리는 순종에서가 아니라 정죄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풀려난 사람에게 남은 것은 섬김, 곧 영으로 기쁘게 섬기는 일입니다.
이쯤 되면 누군가 대화를 끝내려고 낱말 하나를 꺼내 들곤 합니다. “그건 율법주의입니다.” 이 낱말은 교회 안에서 큰 힘을 지닙니다. 그런데 이 낱말은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으며, 좀 더 자세히 살펴볼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