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성전 · 17장 / 전체 45장
한 걸음씩 벌어진 갈라섬
교회와 회당은 새로운 계시 하나 때문에 어느 날 오후에 단번에 갈라선 것이 아닙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전쟁과 공의회의 결정을 거치며 단계적으로 서서히 멀어졌습니다. 일어난 일들을 순서대로 늘어놓아 보면 실제로 어디에서 갈라섰는지가 드러납니다.
연표
서기 33년 무렵 오순절이 찾아옵니다. 수천 명의 신자가 날마다 성전에 모이며, 그곳을 온전히 자기 집처럼 여깁니다.
서기 57년 무렵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장로들은 그에게 유대인 신자가 수만 명이나 되며, 그들이 “모두 노모스(법)에 열심 있는 자들”이라고 말해 줍니다. 거의 스물다섯 해가 흘렀지만, 아직 아무런 분리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서기 60년대에 들어서며 압박이 거세지기 시작합니다. 62년에는 주님의 형제이자 예루살렘 신자들의 지도자인 야고보가 처형됩니다. 64년에는 로마에 큰불이 번지고, 책임을 덮어씌울 대상이 필요했던 황제 네로는 예슈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화살을 돌려 잔혹한 박해를 가합니다. 뒤이은 몇 해 동안 베드로와 바울도 모두 처형됩니다. 지도자들이 하나둘씩 쓰러집니다.
서기 70년, 로마는 유대인의 반란을 짓밟습니다. 예루살렘은 무너지고 성전은 불에 탑니다. 그 일이 무엇을 뜻했는지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제사도, 제사장 직분도, 순례 절기도 모두 그 한 집에 속해 있었는데, 이제 그 집이 폐허로 주저앉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공식적인 분리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시험대가 된 기도문 한 줄
서기 70년 이후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회당에서 날마다 드리는 기도인 아미다에 새로운 문장 한 줄이 덧붙었습니다. 미님(이단자들)을 저주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문구가 정확히 언제 덧붙었는지, 또 처음에 누구를 겨냥했는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지만, 보통은 80년대나 90년대에 들어간 것으로 봅니다.
탈무드는 기도를 인도하던 사람이 이 대목에서 머뭇거렸을 때 어떻게 했는지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미님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의심을 받아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졌다는 것입니다(바벨론 탈무드, 베라콧 29a). 기도문 한 줄이 시험대가 되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예슈아를 믿는 신자들은 회당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두 메시아를 둘러싼 전쟁
서기 132년, 로마에 맞서 일어난 바르 코크바 반란은 그 틈을 건널 수 없는 협곡으로 벌려 놓았습니다. 반란을 이끈 시몬 바르 코시바는 초기에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고, 당대 가장 존경받던 랍비 가운데 한 사람인 랍비 아키바는 그를 메시아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일이 유대인 신자들에게 얼마나 피하기 어려운 덫이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유대인이었지만, 그들의 메시아는 예슈아였습니다. 바르 코크바가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추앙받은 이상, 그의 군대에 합류하는 일은 단순히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경쟁자로 나선 다른 메시아를 따르는 셈이 되었습니다. 그 전쟁이 끝나고 한 세대가 채 지나지 않아 글을 쓴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바르 코크바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슈아를 메시아로 부인하지 않으면 혹독하게 처벌하라고 명령했다고 기록합니다.
로마는 끔찍할 만큼 잔혹하게 반란을 진압했고, 바르 코크바를 메시아로 따르기를 거부했던 신자들은 나머지 유대 백성들과 그 어느 때보다 더 멀리 떨어져 남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독자적인 길을 걸어간 이방인 교회
그때부터 교회는 유대 세계와 거의 교류하지 않은 채 갈수록 민족들 가운데서 구성원을 받아들였습니다. 144년 무렵에는 마르키온이 구약성경을 내버리려 시도했습니다. 그는 쫓겨났지만, 그의 가르침은 그와 함께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4세기에 이르러,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이 믿음에 제국의 호의를 베푼 지 수십 년이 지난 뒤, 교회 공의회들은 안식일에 쉬는 일과 유대 절기를 지키는 일을 금지하는 규정들을 통과시켰습니다. 예컨대 라오디게아 공의회는 그리스도인이 안식일에 쉬어서는 안 되며 그날에 일해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서서히 멀어지는 흐름으로 시작된 일이 마침내 법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 시기 | 일어난 일 |
|---|---|
| 서기 33년 무렵 | 오순절. 신자들이 날마다 성전에 모임 |
| 57년 무렵 | 수만 명의 유대인 신자가 모두 토라에 열심을 품음 |
| 62년 |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순교함 |
| 64년 | 로마 대화재와 네로의 박해 |
| 64–67년 무렵 |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함 |
| 70년 |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짐 |
| 80–90년대 (전승에 따른 연대) | 이단자들(미님)을 저주하는 문구가 회당 기도문에 들어가고, 예슈아를 믿는 신자들이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함 |
| 132–135년 | 바르 코크바 반란. 그를 메시아로 따르지 않은 신자들이 유대 사회와 더욱 멀어짐 |
| 144년 무렵 | 구약성경을 버리려 한 마르키온이 이단으로 추방됨 |
| 4세기 | 교회 공의회들이 안식일에 쉬는 것과 유대 절기를 지키는 것을 금지함 |
성경에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
위 표를 다시 한번 살펴보십시오. 처음 두 줄을 뺀 나머지 사건은 모두 사도행전이 끝난 뒤에 일어났으며,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도, 민족들 가운데서 나온 신자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한 회당에 앉아 한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음식과 정결, 안식일과 절기는 회당에서나 다룰 일이지 교회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1세기의 말이 아닙니다. 수백 년 뒤 전쟁과 공의회를 거치며 만들어진 틀을 사도행전 15장 위에 거꾸로 덧씌워 되풀이하는 것뿐입니다. 사도행전 15장 20절만 따로 떼어 읽으면, 민족들 가운데서 나온 신자들에게 음식 문제는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21절을 함께 읽으면 그 문제는 이미 결론이 나 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마다 모세의 글이 낭독되는 자리에 있었고, 그 모든 것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1세기의 에클레시아와 매우 다릅니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차이를 인정하기를 거부한 채 1세기를 오늘날 교회의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춘다면, 성경을 성경 그대로 읽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가장 먼저 오해하게 되는 구절은 언제나 음식과 정결, 안식일과 정한 때를 다루는 본문들일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이야기는 어느 교회의 아침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한 목사에게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