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성전 · 18장 / 전체 45장
우리가 본문 앞으로 가져오는 것
평범한 어느 교회의 일요일 아침을 떠올려 보십시오. 예배가 시작되기 전, 목사가 교인들과 함께 베이컨까지 곁들인 아침 식사를 나눕니다. 이윽고 음악 소리가 잦아들면 목사는 강단으로 걸어 올라갑니다. 자리에 앉은 교인 가운데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목사가 무엇을 먹든 예배를 인도하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똑같은 접시를 앞에 둔 그 사람을 1세기 신자들의 모임 한가운데에 놓아 보십시오.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토라를 읽거나 하나님의 백성을 이끄는 일은 그 세계에서는 상식 밖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앞자리로 나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행동도 같고 성경도 같지만, 두 시대의 반응은 이보다 더 다를 수가 없습니다. 그 까닭은 돼지고기가 아니라 안경에서 시작됩니다.
쓰고 있는 줄도 모르는 안경
평생 도수가 높고 특이한 안경을 쓰고 살아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너무 어릴 때부터 썼기 때문에 콧등에 얹힌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고, 세상은 원래 그렇게 생겼거니 하고 여깁니다. 색깔은 조금 어긋나 있고 테두리는 약간 휘어 보이지만, 자신이 아는 한 세상은 본래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누군가 손을 뻗어 얼굴에서 그 안경을 벗겨 줍니다. 그제야 비로소 지금까지 모든 것을 렌즈 너머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깜짝 놀랍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을 펼쳐 보기도 전에 이미 누군가 그 의미를 해석하는 틀을 손에 쥐여 주었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읽을 때쯤이면 그 틀이 먼저 말을 겁니다. 이미 안경을 쓰고 있는 셈입니다.
눈으로 읽고 머리로 고쳐 쓰는 구절
여기 시험 삼아 살펴볼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천천히 읽어 보십시오.
로마서 3:31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노모스(법)를 폐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노모스(법)를 세운다.
말씀은 명백합니다. 믿음은 노모스(법), 곧 토라를 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믿음은 그것을 세웁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앉아 있는 대다수 사람은 로마서를 읽어 보기도 전에 이미 율법이 끝났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눈길이 「노모스(법)를 세운다」라는 구절에 닿으면 머릿속에서 묘한 일이 벌어집니다. 본문을 슬그머니 고쳐 쓰는 것입니다. 머릿속에서 누군가 속삭입니다. 율법을 세운다는 말은 우리가 율법을 지킨다는 뜻이 아니라, 율법이 우리의 죄를 드러내 준다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눈은 한 가지를 읽는데, 머리는 그것을 다른 항목으로 분류해 넣습니다.
이것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슈아께서도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똑같은 모습을 보셨습니다.
마가복음 7:8-9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 주전자와 잔을 씻는 것과 이런 많은 것들을 — 지킨다.”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능히 저버린다.
사람에게서 물려받은 전통이 하나님의 계명을 읽는 렌즈가 되었고, 급기야 그 전통이 계명을 슬그머니 밀어내고 말았습니다.
번역이 본래의 말을 가릴 때
안경은 우리 머릿속에만 있지 않습니다. 때로는 책장에 꽂힌 성경 속에 아예 인쇄되어 있기도 합니다.
모든 번역은 해석의 과정이며, 어떤 번역가도 이를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번역할 때 내린 선택이 한 구절과 다른 구절을 이어 주는 실을 끊어 놓기도 합니다.
헬라어 낱말 「아노미아(토라 없음)」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많은 성경이 이 말을 「불법」으로 옮기고, 어떤 성경은 「죄악」이나 「악행」으로 옮깁니다. 오늘날의 독자가 「불법」이라는 말을 들으면 은행 강도나 고속도로에서 과속하는 운전자, 혹은 무법천지였던 서부 개척 시대를 떠올립니다. 한마디로 일반적인 나쁜 행동을 뜻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낱말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앞부분의 「아」는 「없음」을 뜻합니다. 뒷부분의 「노미아」는 법을 뜻하는 노모스에서 나왔는데, 1세기 유대인 기록자들에게 이 말은 곧 토라를 의미했습니다. 아노미아는 일반적인 비행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토라 없이 살아가며 그분의 가르침을 제쳐 두는 특정한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이 책에서 아노미아를 토라 없음이라고 적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번역본이 그 자리에 「불법」이라는 모호한 말을 찍어 놓으면, 본문은 「토라를 버리지 말라」고 말하는데 독자는 「범죄자가 되지 말라」는 말로 듣게 됩니다. 게다가 하나의 헬라어 낱말이 여러 다른 말로 나뉘어 번역되다 보니, 독자는 서로 다른 성경 책에 나오는 구절들이 실은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합니다.
다른 낱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여기서 「마침」으로 옮겨진 원어가 「텔로스(목표, 완성)」라는 사실을 아는 독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텔로스는 끝을 뜻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어떤 것이 지향하는 지점, 곧 목표를 뜻합니다. 예슈아 직역성경(YLV)에서 로마서 10장 4절은 「노모스(법)의 텔로스(목표/완성)」라고 읽습니다. 한 낱말이 여러 말로 흩어지든 다른 말로 가려지든 결과는 같습니다. 구절과 구절이 나누던 대화가 뚝 끊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 책 내내 번역어 옆에 원어를 나란히 적어 두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장식 삼아 넣어 둔 것이 아닙니다. 안경을 벗겨 내는 작업입니다.
고문대에서 비틀리다
베드로는 이러한 위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편지들을 두고 이렇게 썼습니다.
베드로후서 3:16 그가 모든 편지들에서도 이것들에 관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 편지들 안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어, 배우지 못하고 굳세지 못한 이들이 다른 그라파이(기록된-성경들)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멸망을 위해 그것들을 왜곡한다.
여기서 「왜곡한다」로 옮긴 낱말은 스트레블로오(비틀다)인데, 본래 고문대에서 사람의 몸을 비틀어 꺾을 때 쓰던 말입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 가운데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더러 있어서, 배우지 못하고 굳세지 못한 이들이 다른 성경 본문들을 비틀듯 그것도 비틀어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원래의 말을 가리는 렌즈 너머로 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도 전혀 의도하지 않은 채 그 비트는 일에 가담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는 대가
우리가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지 못하는 까닭이 물려받은 해석의 틀과 본뜻을 가리는 번역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이유들은 마음을 더 불편하게 만듭니다. 성경의 어떤 대목들은 사람들 앞에서 소리 내어 읽히는 법이 아예 없는데, 왜 그러냐고 물으면, 정직한 대답은 그 말씀을 읽는 데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