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APE · 41장 / 전체 41장
아가페
이 책은 성경이 무엇을 가리켜 사랑이라 부르는가 하는 물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오직 성경 본문만으로 그 답을 찾아왔으니, 이제 그 전체 흐름을 한자리에서 쭉 읽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 편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 가운데 가장 수가 적은 백성에게 마음을 두셨고(신명기 7:7), 영원한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셔서 이끌어 주셨으며(예레미야 31:3),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메시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로마서 5:8).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니,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요한일서 4:19). 이 책에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모든 사랑은 그분의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낱말과 뜻매김
사랑으로 옮겨지는 낱말은 여럿이지만, 그 어떤 낱말도 그 자체로 거룩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어둠이나 세상을 아가파오(사랑하다)할 수도 있고, 히브리어 아하브(사랑하다)도 선한 사랑과 악한 사랑에 똑같이 쓰입니다. 사랑은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 성질이 정해지며, 낱말들 사이에 우열의 사다리는 없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필레오(사랑하다)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성경 스스로 어떻게 정의하는지는 분명합니다.
요한일서 5:3 하나님의 사랑은 이것이니 — 우리가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 그분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
예슈아께서 “너희가 나를 아가페(사랑)하면, 내 계명들을 지키라”(요한복음 14:15)라고 하신 말씀과, 요한이 “이것이 사랑이니: 우리가 그분의 계명들에 따라 페리파테오(걷다/행하다)하는 것이다”(요한이서 1:6)라고 한 말에도 똑같은 정의가 서 있습니다. 가장 큰 사랑은 친구들을 위하여 자기 프쉬케(혼)를 내려놓는 것이며, 예슈아께서는 누가 당신의 친구인지를 직접 밝혀 주셨습니다. “내가 명하는 것들을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들이다”(요한복음 15:14). 여기서 「친구」는 헬라어 필로스입니다.
한 살, 앎, 그리고 생명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하셨으며, 영(루아흐)으로 하나가 되게 하셔서 둘을 한 살(바사르)로 묶어 주셨습니다(말라기 2:15). 성경은 이 둘의 결합을 가리켜 야다(알다)라는 낱말을 씁니다. 이 낱말은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를 알았다”(창세기 4:1)에서 시작하여, 호세아의 “네가 여호와를 알게 될 것이다”(호세아 2:22)를 거쳐, 예슈아께서 내리신 영원한 생명의 정의로 이어집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당신 … 을 아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3). 그리고 아노미아(토라 없음)를 행하는 자들에게는 “나는 너희를 한 번도 알지 못했으니”(마태복음 7:23)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놓아 버리지 않는 남편
아가서는 사랑이 “죽음같이 강하고”, 많은 물로도 끌 수 없는 야의 불꽃이라고 노래합니다(아가 8:6-7). 호세아는 그 사랑을 삶으로 살아 냈습니다. 음행을 일삼는 아내와, 그 아내의 마음에 대고 다정히 말하며 영원히 아내로 삼아 끝내 포기하지 않는 남편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유일하신 구원자이시니, 그분 밖에는 다른 남편이 없습니다.
그 똑같은 사랑은 콧김이 길어 노하기를 더디 합니다. 그 사랑은 노아의 날에 기다렸고, 아모리 사람을 두고 기다렸으며, 니느웨를 두고 기다렸고, “아무도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시며(베드로후서 3:9) 오늘 우리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크고 두려운 날은 여전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오기 전에, 종은 자기 혼(네페쉬)을 쏟아부으셨고, 목자는 자기 프쉬케(혼)를 내려놓으셨으며, 죄 사함을 위하여 언약의 피가 흘려졌습니다.
내 양을 먹이고 내 계명을 지켜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사랑을 묻는 질문을 세 번 던지시고, 그때마다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베드로는 어린 양들부터 시작하여 양 떼를 말씀으로 먹였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 같이 그들도 거룩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풀무불이 뜨겁게 타오르고 사자들이 기다리는 바벨론에서도 계명을 지켰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다시 읽어 보면, 그 장 역시 똑같은 사랑, 곧 계명을 지키는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혼인 잔치의 문과 성문 안으로는 그분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옛 본성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며, 죄를 고백하고 계속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태어나고, 자라고, 같은 형태가 되고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은 자기 자녀가 남편 있는 여인의 자녀보다 더 많을 것이라 노래했고, 결혼하지 않은 사도는 복음을 통하여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썩지 않는 씨,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태어난 그들은 젖에서 단단한 음식으로 자라나 메시아의 충만함에 이르는 키를 향해 자라며,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걷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태가 되어 순교자의 반열로 나아가고, 어떤 이들은 에녹과 엘리야처럼 옮겨져 올라갑니다. 마침내 그들은 그분의 영광의 몸과 같은 형태가 되어, 죽을 수 없는 아들들이 되며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자들이 됩니다. 그들은 시편 82편과 요한복음 10장이 그 낱말을 쓰는 의미에서 신들이며, 영원토록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어린 양의 종들입니다.
사랑이 식어 가는 시대
이 모든 말씀 곁에 마태복음 24:12의 경고가 서 있습니다. 아노미아(토라 없음)가 많아지므로 대부분 사람의 사랑이 식어 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토라를 치워 버리면 아무도 더 이상 그 선을 볼 수 없게 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인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식어 버립니다. 해답은 감정을 더 뜨겁게 데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옛적 길과 마음의 돌이킴과 만물 회복에 있습니다. 이 부르심은 기독교인과 메시아닉 신자 모두를 향한 부르심이며, 1세기 에클레시아의 믿음으로 돌아오라는 부르심입니다.
제철에 맺는 열매
하나님의 자녀가 썩지 않는 씨, 곧 말씀으로 태어났다면, 말씀을 지키는 일은 자기가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밖에서 지워 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그 씨로 태어난 사람이 누리는 자연스러운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씨앗이 그 안에 머물고(요한일서 3:9), 그 속에 두신 영(루아흐)께서 그가 하나님의 규례(호크)대로 행하게 하십니다(에스겔 36:27). 그렇기에 요한은 그분의 계명들이 무겁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이 그 모습을 그림처럼 보여 줍니다.
시편 1:2-3 오히려 여호와의 토라를 기뻐하고, 그분의 토라를 밤낮으로 읊조린다. 그는 물길 가에 심긴 나무 같아서, 제철에 열매를 맺고 그 잎이 시들지 않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할 것이다.
물길 가에 심긴 나무는 열매를 맺으려고 억지로 애쓰지 않습니다. 나무가 가진 본성과 심긴 자리 덕분에 제철이 되면 자연히 열매를 내놓습니다. 여호와의 토라를 기뻐하는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머무십시오
예슈아께서는 이 모든 말씀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10 내 계명들을 지키면 나의 아가페(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니, 이는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들을 지키어 그분의 아가페(사랑) 안에 머무는 것과 같다.
성경이 정의하는 아가페는 바로 이것입니다. 올랐다 내렸다 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아들이 직접 걸어가신 길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계명들을 지키셨고 아버지의 아가페 안에 머무십니다. 그리고 당신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도 똑같은 길을 열어 주십니다. 지키고, 그 안에 머무는 길입니다.
예슈아께서는 이 말씀을 하신 그 밤에, 이 말씀들을 지킬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를 이어 가셨고, 그들에게 단 하나의 사명을 맡겨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그 하나의 기도와 하나의 사명이 이 시리즈가 다음에 나아갈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