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에서 자유? · 12장 / 전체 41장
마태복음 7장, 끝까지 읽기
이 부에서 다루는 주장들은 결이 다릅니다. 보통 「폐해졌다」고 말하는 구절 하나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어 선을 긋습니다. 한쪽에는 종을, 다른 쪽에는 아들을 둡니다.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 옛 성도와 새 피조물로 나눕니다. 그렇게 선을 긋고 나면, 계명들은 우리가 더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듣는 저편 사람들과 함께 조용히 선 너머로 밀려납니다.
이 부에서는 그러한 선 여덟 가지를 살펴보며, 첫 번째 선은 마태복음 7장을 곧장 가로지릅니다.
주장
마태복음 7장 21~23절 끝에서 예슈아께서는 분주하고 은사 많은 무리에게 「아노미아(토라없음)를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구절을 흔히 이렇게 풀이합니다.
“마태복음 7장 23절은 15절에서 시작하는 거짓 선지자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여기서 법 없음이란 사랑 없이 영적 은사를 잘못 쓰는 일을 뜻합니다.”
세심하게 읽은 결과이고, 실제로 뒷받침하는 근거도 있습니다. 15절은 분명 거짓 선지자 이야기로 시작하며, 22절은 그분의 이름으로 예언한 일을 말하고, 바울 역시 사랑 없는 은사는 아무 가치가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허투루 내놓은 주장이 아니라, 참된 두 사실을 가져다 하나로 잇고 있습니다. 문제는 본문도 두 사실을 같은 방식으로 잇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단락이 시작되는 곳
이 단락은 15절에서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7:15-20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오나 속으로는 탐욕스러운 이리들이다. 너희가 그들의 열매들로 그들을 에피기노스코(오판없이-분명히-아는)하게 될 것이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는가?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들을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들을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들을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들을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들의 열매들로 그들을 에피기노스코(오판없이-분명히-아는)하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 저 주장은 맞습니다. 단락은 거짓 선지자를 경계하라는 말씀으로 문을 엽니다. 그러나 예슈아께서는 은사나 사역의 능력으로 그들을 알아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단락의 처음과 끝에서 거듭 「너희가 그들의 열매들로 그들을 에피기노스코(오판없이-분명히-아는)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리가 양의 털을 뒤집어쓸 수는 있어도, 포도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결혼식장에서 신랑 얼굴을 가까이 찍는 것으로 시작해 한 걸음, 또 한 걸음 물러서며 마침내 식장 전체를 화면에 담는 사진사를 떠올려 보십시오. 첫 번째 사진만 본 사람은 그날이 한 남자만의 날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도 같은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거짓 선지자를 가까이 비추며 시작하지만, 21절에 이르면 화면이 넓어집니다.
그리고 화면이 넓어집니다
「나에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들의 바실레이아(왕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고.」 여기서 「자마다」, 곧 「모든 사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파스(모든)입니다. 예슈아께서는 더 이상 앞에 나서서 예언하는 사람들만을 두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분을 주라 부르는 모든 사람을 두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들어가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텔레마(뜻)를 행하는 자」입니다. 은사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어서 단락이 마무리되는데, 매듭짓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7:24-27 그러므로 내 이 말들을 듣고 행하는 자는 모두 반석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니, 비가 내리고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혔으나 무너지지 않았으니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이 말들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을 것이니, 비가 내리고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자 무너졌으니 그 무너짐이 심했다.”
집을 짓는 두 사람 모두 「내 이 말들을 듣고」라는 같은 말로 소개됩니다. 거짓 선지자로 시작한 이 대목은 무리 가운데서 듣는 모든 사람에게로 넓어지며 끝납니다. 집을 짓는 두 사람과 두 집이 나오고, 둘 사이의 차이는 오직 들은 대로 행했는가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23절이 가리키는 범위는 거짓 선지자 너머에까지 미칩니다. 「주여 주여」 하는 모든 사람, 그리고 듣는 모든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며, 문 앞에서 내려지는 판결은 이 넓은 화면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랑 없는 은사
그 주장의 후반부는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빌려 온 것입니다. 「내가 사람들의 방언과 천사들의 방언으로 말할지라도 아가페(사랑)가 없으면, 나는 울리는 구리나 쩔렁이는 심벌즈가 되었다.」
그 말씀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참되며, 우리도 굳게 붙잡고 있습니다. 사랑 없는 방언은 소음에 불과하고, 사랑 없는 예언과 믿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가진 것을 다 나눠 준다 해도 「아가페(사랑)가 없으면, 나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라고 씁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3장은 바울이 썼고, 마태복음 7장은 예슈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문 앞에서 예슈아께서 고르신 말은 「사랑이 없던 자들아」가 아닙니다. 아노미아인데, 이 말은 「없음」을 뜻하는 「아」와 「법」을 뜻하는 「노모스」가 합쳐진 낱말이며, 노모스는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옮긴 번역본이 토라를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아노미아는 토라 없음, 곧 토라가 없는 것처럼 사는 삶입니다.
이 점은 굳이 따져 다툴 필요조차 없습니다. 8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요한이 이 낱말의 뜻을 못 박아 두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행하는 이마다 또한 아노미아(토라없음)를 행하니; 죄는 아노미아(토라없음)이다」(요한일서 3:4). 아노미아는 잘못 쓰인 은사가 아니라 죄 그 자체입니다.
예슈아께서 이 말을 쓰신 다른 곳들
예슈아께서 같은 낱말을 쓰신 다른 곳들을 보면 뜻이 한층 더 또렷해집니다. 다음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3: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나 안에는 위선과 아노미아(토라없음)로 가득 차 있다.
이 사람들은 영적 은사를 잘못 쓰고 있던 것이 아니라, 의롭다는 평판을 듣고 있었습니다. 「안에는」이라는 말이 이 구절을 마태복음 7장 15절과 이어 줍니다. 거기서 거짓 선지자들은 「속으로는 탐욕스러운 이리들」이라고 했는데, 「안에는」과 「속으로는」은 원어로 같은 낱말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8절에서 위선자들은 안에 아노미아가 가득합니다. 두 곳 모두 겉모습은 괜찮아 보이지만, 그 밑에는 아노미아가 있습니다.
예슈아께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아노미아(토라없음)가 많아지므로 많은 자들의 아가페(사랑)가 식어질 것이다」(마태복음 24:12).
순서가 분명합니다. 아노미아가 많아지고, 그 때문에 사랑이 식습니다. 아노미아와 사랑은 같은 실패를 부르는 두 가지 이름이 아닙니다. 둘은 정반대 편에 서 있으며, 하나가 자라나면 다른 하나는 사그라듭니다.
가라지 비유에서도 천사들은 왕국에서 「아노미아(토라없음)를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냅니다(마태복음 13:41). 마태복음 7장 23절과 똑같은 아노미아입니다. 시대의 끝에 이 낱말이 기록되어 서 있는 자리가 바로 거기입니다.
사랑이 놓이는 자리
그렇다고 해서 마태복음 7장 23절이 사랑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일러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것이니 — 우리가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요한일서 5:3).
사랑 자체가 계명이므로, 사랑 없는 삶은 계명 밖에서 사는 삶이기도 하며, 그 역시 아노미아에 들어갑니다. 불의와 범법과 죄는 모두 토라를 거스르는 반역이고, 그러한 모든 반역의 뿌리가 아노미아입니다. 사랑 없음은 그 나무에서 뻗어 나온 가지 하나입니다.
본문이 허락하지 않는 것은 방향을 거꾸로 뒤집는 일입니다. 곧 아노미아를 「사랑 없이 쓰인 은사」로 좁혀 버려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 없이 살아도 마태복음 7장 23절을 자기 이야기로 듣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슈아께서 고르신 낱말은 그보다 넓습니다. 나무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결국 이 본문은 두 가지 기준을 제시하며, 두 기준은 서로 맞아떨어집니다. 은사가 아니라 열매이며, 말이 아니라 행함입니다. 쫓겨난 사람들은 예언도 했고, 데몬들도 내쫓았으며, 능력 있는 일들도 행했습니다. 그들에게 없었던 것은 삶 속의 토라였습니다.
2부의 이 첫 번째 선은 버티지 못합니다. 본문이 원을 자꾸만 더 넓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선은 믿는 사람 자신을 가로질러 그어집니다. 영에 속한 사람들을, 육에 속한 사람들에게 주셨던 토라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고들 말합니다.